CULTURE

[book]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

베스트셀러보다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시리즈
베스트셀러보다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시리즈

2024. 07. 28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최근 뉴스레터 <퍼줄거임>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그 많던 OO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OO에 들어갈 말은 다양하다. 친구, 지루함, 명분과 의리, 열정, 교양… 이번에 고른 5권은 잃어버린 데서부터 시작됐다. 잃어버린 걸 되찾는 이야기, 잃어버린 걸 받아들이는 이야기, 잃어버린 데서 배우는 이야기 등등.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내는 나만의 방법은 ‘읽어버리기’다.


“내가 오빠를 좋아하긴 하는데, 너는 진짜 너무 너다.”

장편과 단편집 중 하나만 고르라면 난 단편집 쪽인데,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같은 책을 만나면 편애가 더욱 심해진다. 아이돌 공연장에서 만난 두 사람을 그린 <세상 모든 바다>, 소설판 나는 solo <롤링 선더 러브> 등 재밌는 단편이 많았지만… 이 짧은 글에서는 특히 좋았던 세 편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전조등>은 ‘그’로 지칭되는 한 남자의 인생을 요약 정리한 소설이다. 요약 정리를 읽고 먹먹함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요약 정리답게 문장은 군더더기없고 읽는 이를 지루하게 두지 않는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잘만 하면 요약도 소설이 될 수 있구나. 그러다 어느 한 장면은 느릿느릿 공들여 묘사한다. 속도 변화라고 해야 할지, 줌인/줌아웃이라 해야 할지. 다 읽고 생각했다. 요약도 예술이 될 수 있구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전조등>과 닮았다. 니콜라이와 진주, 두 사람의 인생을 요약 정리한다는 점에서. 니콜라이와 진주의 인생은 초반부터 쉽지 않고 그 쉽지 않음이 둘을 잇는 끈이 된다. 둘의 대화가 슬프지 않아서 좋았다. 좋아서 슬프기도 했지만. 읽으면서 영화 <버닝> 생각도 났는데 유아인과 전종서보다 니콜라이와 진주가 훨씬 사랑스럽다.

<보편 교양>의 주인공 ‘곽’은 고3 선택과목으로 ‘고전읽기’를 가르치는 국어교사다. 이 수업만큼은 지문이 아니라 책을 읽히고 싶다는 마음으로 한 학기 과정을 준비하는 과정이 성실하게 서술된다. 엎드려 자거나 이어폰 꽂은 학생들 사이 유독 열심히 듣는 한 명, 은재의 그 열심이 사소한 문제를 낳는다. 교양이란 뭘까, 책은 왜 읽어야 할까. 아무도 묻지 않는 사치스러운 고민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세 편을 연달아 읽었던 그날 하루는 꽤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 김기태 | 문학동네 | 1만 6,800원

“우정은 마술이고, 그것이 작동할 때 그 속임수의 작동 원리는 관객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

신문사 기자 빌리 베이커에게 어느날 편집장의 미션이 떨어진다. “중년 남성에게 닥친 우정의 위기에 대해 써주세요.” 빌리는 거부하고 싶었다. 중년 남성이란 단어도, 우정의 위기라는 말도. 난 아직 40대에 불과하니 중년 남성도 아니고, 친구도 많다고!!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결혼 후 아이가 생기면서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이 친구였음을. 그리하여 빌리는 친구들을 찾기 위해 메일을 쓰기 시작하는데…

읽기 전까지만 해도 중년 남성들은 왜 친구가 없는지에 대해 분석한 사회과학 서적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이 책은 사라져버린 친구를 찾아나선 한 남자의 모험기다. 물론 사회학, 심리학, 정신의학 등 각 분야 전문가들도 모험에 동행한다. 하지만 빌리의 친구는 전문가들의 이론 속에 없다. 친구들과 규칙적으로 어울리려면 무언가 할 것(술이 아닌)이 필요하고, 어딘가 갈 곳(술집이 아닌)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락할 용기가 필요하다.

우정의 위기를 맞은 또 한 사람,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 역시 용기다. “힘들다”고 말할 용기. 다 같이 힘든 요즘 같은 때는 멀쩡한 척, 무던한 척 하기도 지친다. 그럴수록 친구는 멀어진다. 하지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이 문장을 읽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고, 그들이 우리에게 기댈 수 있다는 걸 안다는 것은 인간의 교류 활동에서 가장 만족감을 주는 일 중 하나다.”

이 책은 빌리 친구 로리의 에피소드로 끝난다. 로리는 우정을 회복하려는 빌리의 발버둥을 신기한 듯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친구다. 그러던 로리가 어느 날 성큼 다가온다. 당연하게도, 서프라이즈 선물이나 다정한 안부 인사는 아니다. 새벽 2시에 온 문자 한 통이다. “니가 정말 보고 싶다.” 로리는 용기를 냈고, 그것만으로 빌리의 친구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 <마흔 살, 그 많던 친구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 빌리 베이커 | 열린책들 | 1만 8,000원

“약간의 지루함은 사람을 덜 지루하게 만들게 되어 있다.”

원서 제목은 “100 Things We’ve Lost to the Internet”이다. 확실히 인터넷이 가져다준 것의 숫자를 헤아리기보다는 잃어버린 걸 꼽는 게 빨랐겠다. 그래도 100개를 채우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1번 ‘지루함’부터 33번 ‘생일 카드’, 69번 ‘눈 맞춤’을 지나 100번 ‘종결’에 다다른다. 끝없이 정보와 광고와 알림 메시지를 쏟아내는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느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생일 카드를 쓰기는커녕 눈 맞출 시간도 없는 21세기가 이 책 한 권에 담겨 있다.

책에는 없지만 나도 잃어버린 게 하나 있다. 낱말퍼즐! 구글링 한 번으로 답을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세상에서, 퍼즐의 빈칸을 붙들고 머리를 싸매는 순간의 답답함과 기어코 답을 찾아냈을 때의 쾌감은 이제 없다. 물론 뉴욕타임스처럼 낱말퍼즐을 훌륭한 ‘디지털 상품’으로 재탄생시킨 미디어도 있지만, 나처럼 시대에 뒤처진 퍼즐 근본주의자는 인터넷이 야속하다. ‘그래도 퍼즐은 손으로 풀어야 제맛인데…’(인터넷 덕분에 퍼즐 만들기가 쉬워졌다는 건 비밀)

뉴욕타임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책의 저자 패멀라 폴은 <뉴욕타임스 북리뷰> 편집장이다. 디지털 전환에 그 어떤 언론사보다 진심인 곳에서 북리뷰 담당자란, 인터넷 덕분에 획득한 길고 긴 습득물 목록보다는 드문드문 보이는 유실물 목록에 더 마음이 가는 사람 아닐까.

원서 제목에서 ‘인터넷’을 뺀 출판사의 결정이 나는 마음에 든다. 인터넷 얘기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앞세운 책도 서점 한 자리를 차지했으면 하는 게, 취침 전 독서(61번)를 좋아하고 여전히 잡지(71번)를 모으는 책벌레 소년(23번)의 입장이다. 

  • <우리가 두고 온 100가지 유실물> | 패멀라 폴 | 생각의힘 | 1만 9,000원

“뭐든지 혼자 짊어지겠다는 마음가짐은 대견하지만, 그래서는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눈 내리는 겨울날, 고비키초의 극장 뒤편에서 사람이 죽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소년 기쿠노스케가 덩치 큰 도박꾼 사쿠베에를 벤 것이다. 원수의 피를 뒤집어쓴 소년은 잘린 머리를 들고 유유히 극장을 떠난다. 때는 에도시대 후기. 복수가 무사의 본분이고, 오히려 본분을 회피하면 사람을 해친 것보다 더 큰 지탄을 받던 시기였다.

<고비키초의 복수>는 소년의 친구 소이치로가 이날 사건을 목격한 다섯 명의 진술을 기록한 소설이다. 극장 입구에서 사람을 불러모으는 문전 게이샤 잇파치, 무술 연기 담당 요사부로, 의상 담당 호타루, 소도구 담당 규조, 각본 담당 긴지까지 목격자 5인은 모두 극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들의 진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사건 진술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목격자 5인의 인생이다. 무슨 연유로 이 극장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그들에게 극장이 어떤 의미인지 자기 목소리로 직접 얘기하는데(소도구 담당 규조는 워낙 과묵한 성격이라 아내가 대신 말한다) 액자소설처럼 5개의 서로 다른 재미를 준다.

진술이 더해질수록 소년 기쿠노스케가 복수를 하게 된 사연도 점차 구체화된다. 진술을 다 듣고 난 소이치로가 기쿠노스케와 재회하는 종막에 다다르면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다. 충격적인 반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탄탄한 빌드업에 걸맞는 마무리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이 떠올랐지만 두 작품에 없는 따뜻한 온기가 <고비키초의 복수>엔 있다.

  • <고비키초의 복수> | 나가이 사야코 | 은행나무 | 1만 8,000원

“수십 년간 이 일을 했지만, 다시 초보자가 된 기분이다.”

제목 밑에 적힌 부제 “훌륭한 것을 만들어내는 일에 대한 뉴욕 목수의 이야기” 때문인가. 표지에서 단단함이 느껴진다. 손에 쥐어보면 더 그렇다. 담백한 색감과 까슬한 질감이 조화롭다. 내용물을 겨우 감싼 껍데기에 그치지 않고, 알맹이의 훌륭한 만듦새를 예고하는 표지다. 표지가 옷이라면, ‘사람들이 좋아할까?’보다는 ‘나에게 어울릴까?’를 먼저 고려해 걸친 셔츠 같다. 아주 잘 어울린다.

저자는 책의 성격을 한줄로 요약한다. ”이 책은 내가 인생을 개척한 이야기다.” 무려 인생을, 심지어 개척했다고 하니 거창하게 들리는데… “약간의 운이 따르고 결단력이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저자는 여기에 노력을 더해 40년을 보냈다. 약간의 운이 따라줘서 좋은 동료를 만났다. 클라이언트의 복잡한 요구사항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로 결단력 있게 나아갔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보니 목수 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는 고백한다. 자기 인생을 정리하다 보니 “세상이 바라는 삶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질에 대한 고찰”로 발전해버렸다고. 그 자질에는 뭐가 있을까.

접어둔 페이지의 문장들을 다시 봤다. (메모해둔 문장이 너무 많아서 구글닥스에 옮겨적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바라는 만큼 완벽하게 날카로운 공구는 이 세상에 없다. 적당히 괜찮은 끌이 있으면 계속 날을 갈아가며 쓰면 된다.” “모든 실수는 하나의 문과 같다. 열쇠는 실수 뒤에 숨겨져 있다.” “실패, 무너짐, 약점, 오류를 함부로 조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완벽에 관하여>를 읽고, 완벽주의를 버리는 것에 관하여 생각했다.

  • <완벽에 관하여> | 마크 엘리슨 | 북스톤 | 2만원
About Author
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