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대상은 우리를 늘 주눅 들게 하기 마련이다. 난생 처음 에스프레소를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있어 보이려고 주문한 에스프레소를 받아보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날은 하필 짝사랑하던 친구를 만난 자리였다. 마치 늘 마시는 것 마냥 작은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셨을 때 비로소 알게 됐다. 무지에서 오는 허세의 끝은 쓰디쓰다는 걸.
처음 손안에 쥐어진 와인 리스트와 마주했을 때 그날의 쓴맛이 떠올랐다. 분명 읽을 수 있는 글자 같은데 도무지 해독이 되지 않는 답답함을 느끼며 등 뒤론 식은땀이 한 줄 흘렀다. 낯익은 단어와 아리송한 암호문 같은 글자, 그리고 옆에 붙은 가격을 보고 있노라니 식전부터 식욕이 달아나는 듯했다. 결국 가장 익숙한 이름을 가진 지불할 수 있는 적당한 가격의 와인을 골랐다. 성공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애초에 모르는데 그것이 성공한 선택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 내릴 수 있을까. 마치 내 얘기 같다고 생각해도 그렇게 좌절할 필요는 전혀 없다. 선택 단계에서의 난해함과 결과 판단의 모호함은 대체로 와인을 처음 접하거나 이제 막 알아가는 단계에서 벌어지는 흔한 일이다.
소주를 마실 때도 참이슬을 마실지, 처음처럼을 마실지, 아니면 진로를 마실지도 망설여지는 오늘날 하물며 다양성의 최종 보스 격인 와인은 오죽할까. 그나마 희망적인 소식은 와인에 제법 익숙해지면 와인 리스트는 두려움의 대상에서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와인이 즐거워진다. 책에서 본 것들, 공부한 것들에 대한 지식과 감각적 경험이 서로 맞물리기도 하고, 때로는 어긋나기도 하는 그 모든 순간들은 마치 연애 초기의 연인처럼 세상이 온통 장밋빛으로 물드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와인 리스트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와인의 재미는 두려움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가급적 추천 받길 권하지만 본인의 의지로 와인을 고르고 싶고, 와인에 대해 호기심이 있다면 와인 리스트를 받아서 펼쳐보자. 업장마다 와인 리스트를 표기하는 방법은 대소동이하지만 보통 다음과 같은 정보가 기재되어 있다.
- 생산국 / 세부 지명
- 종류
- 와인 생산자(메이커) 및 이름
- 품종
- 빈티지
- 가격
친절하게 맛에 대한 세부사항이라도 써놓으면 좋으련만 와인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거나 고급 레스토랑일수록 정보는 심플한 편이다. 와인 종류가 많지 않은 캐주얼한 곳이라면 맛 설명이 필요하기도 하고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보유하고 있는 와인이 많을수록, 그리고 소믈리에나 소믈리에에 준하는 직원이 있다면 와인을 일일이 설명하기보다는 손님이 선택한 와인에 대해 어드바이징 해주는 편이 효과적이다.
만약 와인의 초급자라면 ‘생산국’과 ‘품종’에만 주의를 기울여도 좋다. 생산자의 이름은 어차피 머리에도 들어오지 않고, 빈티지 또한 큰맘 먹고 고급 와인을 먹을 각오가 아니라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와인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정보를 굳이 꼽자면 포도의 품종을 택하고 싶다. 품종은 와인 경험의 시작점이다. 섬세한 향의 레드와인을 즐기고 싶을 땐 피노 누아를, 볼륨감 있는 묵직한 레드 와인이 당긴다면 카르베네 쇼비뇽이나 말벡을, 적당한 산미와 더불어 너무 무겁지 않은 느낌을 맛보고 싶다면 산조베제나 쉬라즈를 고르는 식이다.
물론 품종과 맛이 마치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일대일로 매칭되는 건 아니다. 어떤 피노누아는 카베르네 쇼비뇽 만큼의 탄닌감과 무게감을 주기도 하고, 어떤 카베르네 쇼비뇽은 묵직함보다는 섬세하고 청량한 미디엄 정도의 바디감을 주기도 한다. 생산되는 국가나 세부 지형, 기후, 양조 방식에 따라 맛의 표현이 무한하다는 게 와인의 진정한 매력이자 묘미지만 와인을 어렵다고 느끼게 해주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내가 고른 이 품종의 와인이 정확히 내가 기대하는 맛을 내는지는 와인 리스트만 봐선 알기 어렵다. 그럴 땐 주저하지 말고 전문가의 도움을 청하자.
어느 정도 와인을 경험한 후 품종과 나라가 주는 맛의 팔레트를 대략 알 것만 같다면 당신은 중급자의 길로 들어섰다. 초급자일 땐 감각적 만족감에 집중했다면 이젠 차이를 즐기면서 그동안 몰랐던 와인 세계의 빠진 퍼즐을 맞추는 재미가 붙어가는 시기다. 이제 눈여겨봐야 할 건 ‘세부 지명’과 ‘생산자’, ‘빈티지’다. 세부 지역에 따라서도 생산자마다 스타일이 있고, 매 빈티지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하고 일관되게 맛을 뽑아내는 생산자도 있다. 재미있는 건 이미 맛보았던 와인일지라도 컨디션이나 환경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중급자 정도 되면 대개 두 길 중 하나를 걷게 된다. 소위 말하는 특급 와인이나 스타 와인 같은 고급 와인을 동경하며 맛의 자극을 점점 상향하고 싶어 하는 등반가의 길과, 더욱더 다양한 와인의 세계를 맛보고 경험해 보고 싶어 하는 탐험가의 길이다. 등반가의 길에선 이미 지나온 길은 중요하지 않다. 탐험가는 이미 지나온 길이든 어떤 길이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 강한 자극과 넓은 재미를 추구하는 어느 길이 옳고 그른 것인가의 문제는 아니며 삶에 대한, 그리고 와인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탐험가의 정신으로 안 먹어본 와인을 용감하게 선택할 것인가, 등반가의 정신으로 점점 더 높은 와인을 추구할 것인가는 당신의 몫이다.
와인 리스트란 어떤 와인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따분한 글자와 숫자의 나열이기도 하지만 한 업장이 가진 와인에 대한 생각과 애정을 나타내는 표식이기도 하다. 이름을 한 번쯤 들어봄 직한 와인들로 가득한 와인 리스트와 업계 관계자나 전문가가 봐도 생소한 와인이 많이 적힌 와인 리스트가 주는 인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안정 지향의 손님에게는 유명하고 익숙한 와인을, 재미를 찾는 손님에게는 숨겨진 보석 같은 와인을 추천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유명한 와인일수록 오히려 맛본 사람이 많아 덜 팔릴 가능성이 많고, 너무 생소한 와인은 선택을 받기 어려울 수 있다. 이래도 저래도 쉽지 않지만 추천하는 이와 손님이 와인에 대한 태도가 서로 맞다면 와인을 추천하고 고르는 일 또한 서로 즐거운 일이 된다. 어차피 즐거우려고 마시는 와인이니 마치 평생 살 집을 고르는 것처럼 너무 심각하게 와인 리스트를 뚫어져라 째려보진 않으시길 권하는 바다. 마음 편히 추천을 받는 쉬운 길이 있으니 말이다.
회심의 추천 와인 05
- 와인명 : 산디 산타 리타 힐즈 샤르도네 Sandhi Santa Rita Hills Chardonnay
- 종류 : 화이트
- 지역 : 미국 –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
- 품종 : 샤르도네
- 알코올 : 12.5%
- 수입사 : 안단테와인프로젝트
미국 화이트와인은 느끼하고 버터 맛이 난다는 편견을 단번에 깨부숴주는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샤르도네 와인. 어느 스타일을 표방하는 게 아니라 땅이 지닌 떼루아를 표현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는 와인 메이커의 철학을 혀끝에서 느껴보고 싶다면 강력하게 추천하는 와인.
회심의 추천 와인 06
- 와인명 : 샤토 마르테 파밀리에 2019 Château Martet Reserve de la Famille 2019
- 종류 : 레드
- 지역 : 프랑스 – 보르도
- 품종 : 메를로
- 알코올 : 15%
- 수입사 : 와인브라더스
강하지만 부드러운 매력을 가진 보르도 메를로의 저력을 보여주는 우아한 와인. 남성성과 여성성을 한 몸에 가진 듯한 온화하면서 힘찬 마성의 메를로를 맛보고 싶다면 후회 없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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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우
‘어라우즈' 셰프 & 푸드 라이터. 운이 좋아 요리하고 글도 쓰면서 사진도 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