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봄에 아이가 태어나 여름부터 6개월짜리 육아휴직 중이다.
1월 31일로 육아휴직은 끝, 다음 달부터 다시 출근한다. 고마운 회사 덕분에 다시 없을 소중한 시간을 소중한 두 사람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아이가 잘 때 틈틈이 읽은 책 다섯 권을 소개한다.
[1]
<최소한의 최선>
“꼭 껴안는 것보다 더 껴안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상 받은 소설이 다 재밌진 않지만 수상 소식에 솔깃한 귀를 어찌할 수는 없다. 출판사가 ‘김승옥문학상 대상 문진영 신작’이라 크게 써 붙인 띠지도 나 같은 사람을 겨냥한 것이고, 적중했다. 그런데 정작 2021년에 대상을 받은 소설 ‘두 개의 방’은 이 책에 없다. 이전 소설집에 실렸단다. 상관없다. 박찬욱은 <올드보이>로 칸에서 상을 받았지만 나는 그 뒤에 나온 <스토커>를 훨씬 더 좋아한다. 마음에 남은 단편들을 적어본다.
‘변산에서’는 희진과 민주와 수온이 차를 몰고 여행하는 이야기다. 희진과 민주는 친구고 수온은 민주의 딸이다. 대단할 거 없는 여행이지만 세 사람에게 서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쉽게 알 수 있다. 소설 속 문장을 빌어 말하자면, 읽는 내내 “따뜻했고, 조금 울고 싶었다.”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는 연인과 헤어진 뒤 혼자 인도행 비행기에 탄 사람의 이야기다. 한때 무굴 제국의 수도였으나 이후 400년간 방치된 “폐허의 절대적 아름다움”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이곳에서 만난 현지인 ‘안와’가 건넨 말은 아름다운 폐허 같다. “나는 가끔씩 내 삶이, 필름이 들어 있지 않은 카메라로 셔터를 누르는 것처럼 느껴져.”
’네버랜드에서’도 여행 이야기다. 엄마, 아빠, 언니, 형부, 조카와 함께 태국의 어느 섬을 찾은 ‘나’는 가족 여행의 수두룩한 단점들을 마주한다. 그러다 여행이 끝나갈 즈음에야 무시 못 할 장점 하나를 발견한다.
상 받을 만한 소설이란, 대상 수상 작가란 뭘까.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솔직히 ‘훌륭하다’는 느낌까지는 받지 못했다. 다만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다’고 되뇌게 되는 소설들이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되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하고 편 들어주고 싶어졌다.
- <최소한의 최선> | 문진영 | 문학동네 | 1만 6,000원
[2]
<모던 키친>
“대충 봐서 알 것 같다는 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두꺼운 책이다. 밤마다 자기 전에 몇십 쪽씩 쪼개 읽었다. 서른네 편의 취재 기록을 엮어 만든 책이라 하루에 대여섯 편씩 쪼개 읽기가 나쁘지 않았다. 고충은 따로 있었다. 읽을 때마다 식욕이 솟구쳤다. 저자와 동행한 사진작가들이 전국의 농장과 공장과 주방에서 찍어 담은 올컬러 현장 사진 때문이다. 차마 밤엔 못 먹고, 전날 밤 책에서 본 음식들로 다음날 낮에 배를 채웠다. 이 책을 읽은 며칠은 굽네치킨에 고추바사삭을 배달시키고, 시장 떡집에서 가래떡을 사 오고, 단골 돈까스집 영업시간을 다시 확인하고, 집에 있던 인스턴트 커피를 끓여 마시고, 간짜장을 시 켜먹는 시간이었다.
현장의 책이다. 생생한 건 사진만이 아니다. 현장을 섭외하고 찾아가고 보고 듣고 먹고 묻고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꼼꼼히 글에 담았다. 결과물로써의 맛에 관해 이야기하는 글은 자주 봤지만, 그 맛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들을 기회는 흔치 않다. 유독 이 책을 읽으며 늘 먹던 치킨과 돈까스와 짜장면이 먹고 싶어졌던 건, 새삼스럽게도 그 음식들의 감동적인 뒷면을 봐버렸기 때문 아닐까.
프로의 책이다. 저자 박찬용은 ‘프로의 키친’만 골라 찾아갔다. 프로가 오랜 세월 구축한 곳에서 “아마추어는 상상하지 못할 엄격함”을 포착해 낸다. “브랜딩, 정체성”처럼 말하기는 쉽고 구현하긴 어려운 단어들에 속지 않으려 취재처를 신중히 골랐다. 이 또한 프로의 자세다. 말과 글과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박찬용의 글은 챙겨 읽으려 노력한다. 그는 대충 쓰지 않는다. 공들인 티를 낸다. 반듯한 표지부터 ‘업데이트 예정’이라는 부록까지, 이 책을 만들 때도 그랬을 것이다. 독자에겐 소중한 저자다.
- <모던 키친> | 박찬용 | HBPRESS | 2만 2,000원
[3]
<자매의 책장>
“넌 뭔가 안 풀릴 때 이 책 읽더라.”
<자매의 책장>을 읽으며 반갑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일단 주인공의 딸 이름이 7개월 된 우리 딸 이름과 같아서 반가웠고, 주인공 자매의 곁에 늘 책이 있어서 반가웠다. 책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각 잡고 책을 소개하는 내용도 아닌데 자매는 습관처럼 책을 폈다 덮는다. 애서가, 책덕후 뭐 이런 거창한 말보다는 담백한 한마디가 어울리는 자매다. “특별한 취미는 없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해요.” 두 사람이 읽고 있는 책들 중 내가 좋아한 책 제목을 발견하면, 또 한 번 반갑다.
책 읽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책만 읽고 살 수는 없다. 동생 미주가 읽다 만 책에는 아이 예방접종 날짜와 치과 예약 시간이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언니 우주는 종종 직장에서 시달리느라 “아무리 책을 펼쳐도 끓어오른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하루를 보낸다. 늘 책만 읽을 수는 없기에 책을 펼칠 수 있는 하루 한두 시간이 더욱 귀하다.
동생은 남편, 딸과 셋이 산다. 언니는 엄마와 둘이 산다. 자매는 같이 사는 사람보다 떨어져 사는 서로에게 가장 많이 기댄다. 드러내지는 않는다. 동생은 언니의 어깨가 무거워질까 봐, 언니는 동생의 마음이 복잡해질까 봐. 대신 책을 빌리고 돌려주며 서로의 생활을 가늠해 볼 뿐이다. 동생이 빌리는 책 제목으로, 언니가 밑줄 쳐둔 문장 몇 줄로.
계절이 변하면 세상의 색이 변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만화도 그렇다. 봄은 샛노란 개나리색, 여름엔 싱그러운 나뭇잎색, 가을엔 떨어지는 낙엽색, 겨울엔 눈 내리는 하늘색. 특별한 이벤트 없이 흘러가는 잔잔한 일상도, 사계절의 네 가지 색깔을 입혀보면 제각기 찬란하다.
- <자매의 책장> | 류승희 | 보리 | 1만 8,000원
[4]
<1961 도쿄 하우스>
“이 두 가족이 어떤 갈등을 빚을지… 이런 게 시청자가 원하는 거 아냐?”
방송국 놈들. 언제부턴가 다들 PD나 작가를 이렇게 부른다. 험한 말을 쓰는 사람도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듣는 ‘놈들’도 반박하려 들지 않는다. 님이 놈이 된 이유는 시청률이다. 아무도 안 보는 프로그램의 PD님이 되느니 욕을 좀 먹더라도 화젯거리를 만든 ‘놈’이 되기를 기꺼이 택한다. 2023년 여름을 뒤흔든 <나는 솔로> 16기에 이르면, 방송국 놈들이란 표현은 더 이상 험한 말이 아니라 찬사다.
<1961 도쿄 하우스>는 “특별히 구현된 60년 전 아파트 단지에서 3개월간 생활하면 500만 엔을 준다”는 기획에 혹한 두 가족의 이야기다. 리얼리티 쇼라는 이름을 달고 방송국 놈들은 이번에도 과감히 선을 넘는다. 미리 짜둔 캐릭터를 출연자에 입혀 갈등을 조장하고 평화롭던 두 가족을 이용해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는데, 이게 끝이 아니다. 저자 마리 유키코는 ‘다크 미스터리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음습한 사건의 한가운데로 출연자들을 데려간다. (방송국 놈들 못지않게 이 소설가 놈… 아니 이 소설가도 지독하다.)
컨셉이 흥미로워 집어들긴 했으나 뒷맛이 산뜻하진 않다. 이야기가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이 사람들이 뭘 그리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나는 솔로> 16기를 마지막 회까지 다 보고, 유튜브 라이브를 챙겨보고, SNS에서 벌어지는 설전까지 엿본 뒤의 기분과 비슷하다. 방송국 놈들이라 쉽게 욕하지만, 시청자 놈들은 뭐 그리 다른가.
- <1961 도쿄 하우스> | 마리 유키코 | 하빌리스 | 1만 8,000원
[5]
<말 놓을 용기>
“한국 사람들은 성인이 되면 어린 시절과 같은 ‘우정’을 잃어버린다.”
말과 생각은 한 묶음이다. 생각은 말을 돕는다. 우리는 할 말을 생각하고 생각한 걸 말한다. 말도 생각을 돕는다. 희미한 무언가에 대해 실컷 말하고 나서야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뒤늦게 명확해지는 경험을 자주 한다. 말과 생각이 늘 서로를 돕기만 하는 건 아니다. 말이 생각을 망치고 생각 때문에 말이 꼬이기도 한다. 그만큼 말과 생각은 어렵다. 하지만 중요하다. 어렵지만 중요해서, 말과 생각은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는 한편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말 놓을 용기>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말에서 찾는다. “매번 나이를 따지고 한 살이라도 차이가 나면 형아우를 따지는 관습”의 원인은 한국인의 ‘존비어 체계’다. 아랫사람은 존댓말을 ‘해야 하고’, 윗사람은 반말을 ‘해도 된다’는 아주 특이한 말 습관. 이 습관 때문에 성인이 되면서부터 우린 반말 대신 존댓말 하기를 택한다. 카페 점원이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라고 말하듯 상대를 존중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게 덜 위험해서.
한두 살 많은 사람에게 꼬박꼬박 존댓말 해준다고 해서 그걸 존중이라 할 수 있을까? 깊고 친밀한 대화는 오히려 쌍방이 상하관계에 얽매이지 않을 때 가능하다. 이를 위해 저자는 ’평어‘를 제안한다. 이름 호칭과 반말을 결합한 평어는 이런 모양이다. “명균, 지난 2023년은 어땠어? 너의 마음이 궁금해.” 당장 좀 어색하더라도 난 평어를 써보고 싶다. 대화를 돕기는커녕 방해만 하는 ’영혼 없는 높임 표현’들이 이젠 정말 지긋지긋하기 때문이다.
- <말 놓을 용기> | 이성민 | 민음사 | 1만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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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