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파리, 런던, 로마, 피렌체, 베를린 … 유럽 여러 도시의 골목을 다니며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우린 동네에 이런 멋진 공간들이 없을까?’. 주요 상권이 아닌 주택가 지역에 하나둘씩 보석 같이 존재하는 작은 식당과 바들이 너무나 빛나 보였다. 어둑한 골목에서 따스하게 새어나어오는 불빛, 유리창 안 쪽엔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장면을 보며 언젠가는 동네 어귀 골목 어느 즈음에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언젠가는 생각보다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는 걸.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던 무렵, 어쩌다 보니 서울 홍은동과 남가좌동의 경계 즈음 주택가 한가운데 작은 와인바 ‘어라우즈’를 열었다. 지도를 봐도 입구를 쉽게 찾기 힘든 말도 안 되는 위치에 있는 공간이었지만 나름 꽤 운치 있었다. 2년 동안 영업을 하고 지난해부터는 5,000세대가 넘는 아파트 단지 상가로 이전을 했는데 그제야 알게 됐다. 유럽의 주택가와 같은 공간이 우리나라에선 아파트 단지였구나란 사실을 말이다. 동네 주민들은 일부러 멀리 나가지 않아도 근처에 갈만한 공간을 원했고, 나는 동네 고객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공간을 꿈꿨다. 두 바람이 만나 신당동 아파트 단지 내에 위치한 지금의 어라우즈가 탄생했다.
어라우즈엔 메뉴판이 없다. 심지어 와인 리스트도 없다. 음식은 오마카세 식으로 알아서, 와인은 손님과의 대화를 통해 추천하는 방식이다. 영감은 일본 교토의 한 정육점에서 얻었다. 정육점임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진열하는 쇼케이스를 없애고 손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날의 고기를 추천하는 곳이다. 불편할 수 있지만 마트나 다른 대형 정육센터와 달리 동네 정육점의 역할과 존재 이유는 동네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맞춤형 서비스에 있다고 본 것이다. 진열대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할 여지가 줄어들기에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것.
와인 리스트가 없다는 게 무모해 보일 수 있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아무래도 와인이 중심이 되어 음식을 즐기는 공간이다보니 와인을 늘 다채롭게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와인의 가짓수가 점점 늘고 재고가 소진된 와인은 새로운 와인으로 교체해야 하기에 리스트를 매번 갱신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스마트하게 태블릿으로 와인 리스트를 만들 수도 있지만 혼자서 메뉴를 짜고 운영도 하고 와인을 골라야 하는 1인 업장 입장에선 그조차 쉽지 않다. 무엇보다 와인 리스트를 만들어도 막상 고객들에겐 큰 의미가 없다는 점이 리스트를 없앤 가장 큰 이유였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만 와인을 잘 모르는 경우 와인 리스트를 보고 알 수 있는 건 단지 흰 종이에 검은 글씨가 있다는 것뿐. 와인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다 해도 난생처음 들어보는 와인들로 가득하다면 당혹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경험을 토대로 국가나 지역 품종으로 대략 어떤 와인일지 짐작만 해볼 따름이다. 와인을 잘 아는 고객이든 그렇지 않은 고객이든 결국 리스트를 보고 ‘아는 와인’ 또는 ‘안다고 생각하는 와인’을 고르거나, ‘가격’을 보고 선택을 한다.
와인은 정답이 없는 온전한 취향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와인을 판매한다는 건 여타 공산품을 파는 것과는 다른 메커니즘을 요한다. 거의 무한한 선택지 가운데 팔고 싶은 와인을 들이미는 게 아니라 고객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적절히 추천해 주는데 일의 묘미가 있다. 최소한의 정보만 단순히 나열돼 있는 리스트만으론 취향을 찾는데 충분치 않다. 결국 고객은 오늘 요리에 어울리는 와인이 무엇인지, 어떤 와인을 추천하는지 물어볼 수밖에 없기에 필연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여기서 와인 리스트의 존재는 마치 정육점의 진열대처럼 대화를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메뉴판이나 와인 리스트가 없다는 건 손님 입장에선 굉장히 불친절한 서비스 형태일 수 있지만 한 번 적응하거나 신뢰하고 나면 서로가 편하다. 늘 수많은 선택지에 둘러싸여 피곤한 현대인에게 선택의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나름의 배려이기도 하다.
누군가 와인을 추천하는 게 힘들거나 어렵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매일 와인을 추천하는 일은 마치 매일 전쟁에 나가는 것과 같다고. 전쟁이란 표현이 다소 과격하게 느껴진다면 바둑이나 체스 같은 고도의 심리전 게임 같은 것이라고 봐도 좋다. 어찌 되었건 와인을 적절하게 추천해서 손님이 만족했다면 승리요, 그렇지 않다면 패배하는 승부다. 모름지기 손자는 ‘지피지기’ 면 ‘백전불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우선 고객이 어떤 유형인지 파악하는 게 와인 추천의 첫 단계다.
와인바를 찾는 고객의 유형은 크게 세 가지다.
A : 와인을 잘 모른다고 깨끗하게 인정하는 타입.
B :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와인을 잘 안 다고 믿는 타입.
C : 와인을 정말로 잘 아는 타입.
A 유형의 고객을 만나면 아무 와인이나 추천해도 될 것 같지만 무엇을 좋아하는지 본인도 모르는 경우가 있어 도리어 추천할 수 있는 선택지가 제한적이다. 가격 부담이 적으면서 누가 마셔도 좋아할 만한 와인 위주로 추천할 수밖에 없다.
B 유형은 가장 시간을 많이 쏟아야 하는 타입이다. 고객과 대화를 통해 와인을 추천하는 곳이지만 현실적으로 마냥 시간을 쏟긴 어렵다. 와인을 서빙하고 음식을 만들어야 하기에 길어야 1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 B는 대화를 가장 많이 해야 하는 타입이면서 동시에 호불호를 가장 강하게 어필하는 까다로운 타입이기도 하다. 대신 가장 흥미로운 대화가 벌어지는 상대이기도 하고, 추천할 수 있는 와인의 범위가 가장 넓어 추천하는 재미가 있어 그만큼 즐겁게 승부할 수 있는 고객 유형이기도 하다.
C 유형은 가장 부담스러운 존재다. 대화를 해보면 마치 난공불락의 성을 마주하는 기분이 드는데 그만큼 승리하면 가장 성취감이 큰 유형이기도 하다. 흔히 고객이 와인을 잘 알면 비싸고 좋은 와인을 고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다르다. 특별히 가격의 하한선을 둔 게 아니라면 가지고 있는 패 중에 오히려 가장 가성비가 좋은 와인을 추천하는 편이 안전하다. 와인 경험이 많기에 가격과 만족감에 가장 민감한 유형이 C다. 맛보면 꽤 좋은 와인인데 가격이 본인 생각보다 낮은 경우 만족스러워할 확률이 높은 고객들이다. 오히려 이런 추천은 경험이 적어 추천받은 와인이 가성비가 좋은 와인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힘든 A나 가격이 곧 품질이라 믿는 일부 B 유형의 고객에게는 통하기 어려운 전략이다.
유형 파악은 본 게임이 시작되기 전 가벼운 정찰에 해당한다. 상대방의 전력을 파악했다면 이제 가지고 있는 패를 꺼내어 전장에 들어설 차례다. 전쟁이든 포커든 화투든 갖고 있는 패가 많을수록 유리해지는 법. 전투에 앞서 어떤 유형의 손님이 와도 대처할 수 있도록 다양한 와인을 구비해 놓는 건 승리를 향한 포석이다. 와인을 추천할 땐 네 병을 가져다 놓는다. 세병 이하는 선택지가 적어 보이고, 다섯 병 이상은 선택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와인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는 어떤 고객은 열 병을 꺼내 놓아도 다른 게 더 없냐고 하기도 하고, ‘그냥 아무거나 맛있는 걸로 한 병 추천해 주세요’ 하는 고객도 있다. 전자가 까다로워 보여도 오히려 후자의 경우가 ‘모 아니면 도’ 이기에 어려운 상대다.
와인의 가격 구성을 어떻게 하는 가도 관건인데 이 부분이야 말로 와인 추천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미리 가격별로 추천할 와인을 정해 놓을 수도 있지만 고객이 원하는 와인이 아닐 경우와 고객의 지불 범위도 고려해야 하기에 가장 까다로우면서 승패를 좌우하는 극적인 순간이다. 만약 꼭 추천하려는 와인이 있다면 네 병 중 두 번째로 저렴한 가격대에 놓는다. 대개 일행 앞에서의 체면, 저렴한 것이 퀄리티도 낮을 것이란 선입견으로 인해 가장 저렴한 선택지는 잘 고르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5만 원, 7만 원, 9만 원, 12만 원짜리 와인을 추천했다고 해보자. 5만 원짜리 와인이 좋다고 강조해도 대부분의 선택은 7만 원과 9만 원짜리 둘 중에 이루어진다. 만약 고객의 기분이 좋은 날이거나 특별한 날이라면 9만 원과 12만 원 중 선택되는 식이다. 비쌀수록 좋은 와인일 가능성이 크지만 반드시 비싼 와인이라고 해서 고객이 만족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전쟁이나 적 같이 과격한 표현을 쓰긴 했지만 사실 와인을 고르고 추천하는 일은 요리하는 것만큼 재미있고 보람된 일이다. 작은 업장임에도 불구하고 100여 가지 와인을 구비해 놓은 이유는 순전히 기꺼이 찾아온 고객을 하나라도 더 만족시키려는 목적 때문이다. 와인 추천이 정말 좋았다는 말 한마디에 모든 수고로움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란. 만족하는 고객의 모습을 보고 만족하는 게 이 일의 가치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오늘도 와인을 팝니다.
회심의 추천 와인 01
- 와인명 : 아데가스 발미뇨르 알바리뇨 Adegas Valminor Albarino
- 종류 : 화이트
- 지역 : 스페인 -갈리시아 – 리아스 바이사스
- 품종 : 알바리뇨
- 알코올 : 12.5%
- 수입사 : 와인포레
와인을 잘 모르는 고객부터 와인을 잘 아는 고객까지 두루 만족시킬 수 있는 필살의 화이트 와인. 산도가 튀지 않고 입안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볼륨감과 함께 균형을 잘 잡고 있어 호불호가 적은 편이다. 무엇보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과 잘 맞는 서글서글한 친화력 덕에 페어링에 최적이며 해산물에 특화되어 있다.
회심의 추천 와인 02
- 와인명 : 셉 피노 누아 Cep Pinot Noir, Sonoma Coast 2019
- 종류 : 레드
- 지역 : 미국 – 캘리포니아- 소노마코스트
- 품종 : 피노 누아
- 알코올 : 13.4%
- 수입사 : 안단테와인프로젝트
좋은 와인은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한 번 맛보면 좋은 와인인지 알아보는 법. 피노 누아를 좋아하는 사람도, 피노 누아를 선호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이 와인을 한번 맛보면 생각이 바뀔 수 있다. 붉은 베리류의 신선함과 농익고 복합적인 중후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놀라운 밸런스를 가진 와인.
About Author
장준우
‘어라우즈' 셰프 & 푸드 라이터. 운이 좋아 요리하고 글도 쓰면서 사진도 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