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벌써 연말이 가까워지네! 서울의 모든 미쉐린 레스토랑 방문기를 연재하는 이번 도장깨기 코너에서, 연말 무드에 좀 더 어울리는 곳은 어디일까 고민하다가 여기를 떠올렸지. 두 번째로 소개할 곳은 손종원 셰프가 이끄는 라망시크레야.
손종원 셰프는 두 곳의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을 이끌고 있어. 회현의 레스케이프 호텔에 위치한 컨템퍼러리 프렌치 레스토랑 라망시크레, 그리고 역삼동의 조선팰리스 호텔에 위치한 한식 기반 이노베이티브 레스토랑 이타닉 가든. 두 곳은 색도, 개성도 다르지만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 한 곳의 스타 레스토랑을 갖는 것도 누군가에는 평생의 바람이 될 수 있는데, 이렇게 두 곳의 개성 있는 레스토랑을 이끄는 손종원 셰프는 어떤 사람일까?
완벽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 손종원 셰프. 난 가끔 손솁에게 물어보곤 해. “언제 쉬어요?” 모든 일상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누가 보기에도 솁은 쉬지 않는 사람이야.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가볍게 운동을 다녀오고 바로 레스토랑으로 출근해 점심 서비스를 하고, 브레이크 타임에는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미팅을 하고 레스토랑 안팎의 사람들을 만나고, 저녁 서비스를 마친 뒤 회의실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하며 여러 가지 작업을 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삶의 모든 에너지와 우선순위가 ‘요리’로 향해 있으니, 그 결과는 고스란히 테이블 위의 완성도로 드러나.
나는 2019년 오픈한 라망시크레에 초기부터 지금까지 드문드문 그러나 꾸준히 방문했어. 다 합하면 열 번 정도 되려나? 여긴 내가 개인적으로도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곳인데, 그 이유는 매번 방문할 때마다 기대감을 갖게 한다는 거야. 한 발치 떨어져 어떤 셰프와 음식, 공간의 발전을 온전히 체감하는 것만큼 지극한 즐거움이 없거든. 반 년 뒤에 오면 또 무엇인가가 발전해 있는 곳은 의외로 흔치 않아서 말이야. 레스토랑의 주방에 들어가면 이곳의 모토인 ‘evolve’가 벽에 붙어 있는데, 단순한 단어이지만 손솁은 저 단어를 레스토랑의 변화로 증명해 내고 있지. 대표적인 것은 ‘캐비아와 계란’이라는 요리인데, 단순한 조합의 식재료이지만 플레이팅부터 디테일까지 매번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라망시크레, 비밀의 연인이 찾는 미식의 놀이동산
우선 레스토랑 이름 이야기부터 해볼게. 라망 시크레(L’Amant Secret)는 불어로 ‘비밀의 연인’이라는 뜻이야. 프랑스의 디자이너 자크 가르시아가 벨에포크 스타일로 화려하며 로맨틱하게 디자인한 레스케이프 호텔의 무드를 응축한 레스토랑인데, 셰프와 함께 컨셉을 기획했던 곳은 아니고 컨템퍼러리 웨스턴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으로 공간이 먼저 꾸려진 뒤에 손종원 셰프를 맞이했어. 그래서 셰프는 이 공간과 분위기에 어울리는 요리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해.
실내를 좀 더 살펴볼게. 붉은 톤의 실내 벽면은 피사체의 후면을 촬영해 은밀하며 궁금증을 자아내는 작품으로 유명한 최랄라 작가의 작품들이 채우고 있고, 흰 천이 깔린 테이블마다 붉은 장미가 센터피스로 놓여 있어. 멀었던 관계조차 이곳에서는 무엇인가를 속삭이게 만드는 분위기야. 연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정말 좋겠지?
솁은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놀이동산에 온 듯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하고 싶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프렌치 기반의 컨템퍼러리 요리를 제공하면서도 코스 곳곳에 위트를 담아냈어. 트러플 요리가 나올 때 강아지가 땅에서 트러플을 캐내는 영상을 바구니에 담아 함께 보여준다거나, 명동 근처에서 맛볼 수 있는 길거리 음식을 작은 한입 요리로 재해석해낸다거나 하는 것들.
그럼 과연 어떤 요리가 나오는지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해 보자. 라망시크레 메뉴판의 특징은, 이름이 적혀 있다는 거야. 비밀의 연인에게서 받는 것처럼 빨간 편지봉투를 열면 그날의 메뉴를 확인할 수 있어. 메뉴는 계절에 따라, 그리고 계절 내에서도 식재료의 변동에 따라 조금씩 늘 달라져.
첫 코스의 이름은 ‘쁘띠 라망 시크레’. 팝업 카드와 함께, 가볍게 한입에 먹을 수 있는 작은 요리들이 준비돼. 이날은 장미 향이 아주 가득했지. 수박과 장미를 우려낸 향긋한 티와 장미꽃을 연상시키는 작은 타르트가 나왔어. 손솁은 미묘한 향을 정말 섬세하게 잘 표현하는데, 첫입에서 그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어.
다음 코스는 ‘비밀의 정원에서 온 작은 한 입 거리들’이야. 바구니에 신선한 채소와 함께, 앙증맞은 허브 부케를 비롯해 작은 요리들이 준비돼. 여기서 잠깐! 비밀의 정원은 어디일까? 바로 레스토랑의 비상계단으로 나가 올라가면 깜짝 놀랄 공간이 하나 있는데, 여기서 다양한 허브가 재배돼. 캡슐커피 찌꺼기로 만든 퇴비를 사용하고, 레스토랑 바로 위의 빈 공간에서 직접 허브를 재배해 요리에 사용하는 거지. 일반 고객들에게 공개되는 공간은 아니지만, 종종 직원들의 인스타를 통해 정원을 가꾸는 모습, 휴게시간에 정원에서 쉬는 모습을 엿볼 수 있어.
땅이 아주 깊지는 않아 당근이나 감자 같은 뿌리채소까지 키우는 것은 무리이지만, 다양한 허브를 재배하고 있고, 내가 갔을 때는 귀엽고 제멋대로 자란 가지도 있었어.
그리고 다음은 초당옥수수 차우더. 입 안에서 은은한 단맛과 여리게 흩어지는 질감이 훌륭했던 요리야. 지금까지의 요리를 눈으로 보기만 해도 알겠지만, 라망시크레는 보석을 세공하듯 굉장히 정교하고 세밀하며 장식적인 플레이팅이 인상적이지. 파인다이닝이 맛있어야 함은 물론인데, 여기에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더해지니 정말 먹는 예술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아.
그리고 청사과와 가리비 요리야. 위는 얇은 겔로 포장하듯 코팅한 뒤에 작은 꽃과 허브를 올려냈어. 아삭하고 녹진한 식감이 입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즐거움이 있었네.
그리고 라망시크레의 모토 Evolve를 상징하는 계란과 캐비아 요리야. 이 요리의 다양한 버전을 먹어 보았는데 이번에는 모든 요소를 분리해서 더 개인의 입맛에 맞게 조정하는 형태로 서빙이 되었지. 그래서 이번에는 온전히 캐비어만 듬뿍 떠서 손등에 올려 먹는 호사도 누려 보고, 샴페인도 한 모금 마시고, 또 절반은 고소한 계란이 들어간 훈연 가자미 사바용 소스에 허브 오일, 다양한 가니쉬와 듬뿍 넣어 슥슥 비벼도 먹고, 바삭한 사워도우 와플에 올려 먹기도 하고… 하나의 코스이지만, 네다섯 가지 이상의 조합으로 다채로운 즐거움을 느끼며 오랜 시간 코스를 즐겼어.
그리고 두 가지 빵과 함께 두 가지 버터가 나오는데, 버터 모양 좀 봐! 정말 이 공간, 셰프의 스타일과 너무 잘 어울리지? 초록 버터는 아까 소개한 옥상의 비밀 정원에서 재배한 허브를 잔뜩 다져 넣은 허브 버터로, 듬뿍 발라 먹어도 왠지 살찌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야. 참고로 나는 버터 애호가라 한 번에 저 버터를 절반씩 푹 떠서 빵 위에 ‘올려’ 먹어. 버터를 나이프로 얇게 ‘발라’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맛의 풍부함을 느낄 수 있으니, 생각보다 더 듬뿍 버터를 빵 위에 한 번 얹어 먹어 보길!
다음은 병어와 쥬키니 호박이야. 너무 예쁘지. 노란색, 연두색, 초록색 쥬키니를 가지런히 정리해 부드럽게 구워낸 병어 위에 올리고, 풍부한 맛을 담은 구운 대하 베이스의 미네스트로네와 함께 완성했어. 미네스트로네는 갖은 채소와 함께 끓여낸 수프인데, 셰프의 방식대로 새롭게 만들어 냈지. 접시도 참 예쁜데, 손솁이 2018년 파리에서 만나 알게 된 프랑스의 도예 작가 자크 페르게이(Jacques Pergay)의 꽃(Fleur)이라는 접시야. 자연주의적이면서도 우아한 흰 빛의 도자기는 음식의 아름다움을 함께 표현해 내.
드디어 메인 코스! 메인은 껍질 아래에 트러플을 잔뜩 넣은 향기로운 닭과 잣 소스야. 일단 전체 닭의 모습을 보여주고, 주방으로 다시 가지고 들어가서 플레이팅한 뒤 서빙돼. 저 디쉬를 받고 자세히 보니 검은색 나비가 가득하더라. 블랙 트러플을 얇게 슬라이스 한 뒤 펀치로 찍어 나비 모양을 낸 거야. 그리고 남는 자투리 트러플은 소스에 넣어 활용했어. 아무튼, 정말 화려하다니까.
연인과 함께하기 참 좋은 공간이라, 와인을 곁들이지 않을 수 없어. 최은혜 소믈리에의 페어링도 훌륭하니, 고려해 보길!
두 번째 메인은 양고기.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한 양고기를 셰프가 직접 서빙해 줘. 다양한 부위, 다양한 조리법으로 다채로운 맛을 느낄 수 있어.
그리고 이어지는 디저트 타임! 디저트 또한 계절에 따라 아주 자주 바뀌는 편인데, 이때는 새콤한 루바브가 한창이라 루바브 타르트와 키르쉬 크림, 요거트 소르베와 루바브 아이스크림이 함께 나왔어. 새콤달콤한 순간.
마지막 코스, ‘굿바이 키스’. 여기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예전에 다른 미쉐린 스타 셰프님과 함께 이곳에서 식사한 적이 있거든. 그분이 이 초콜릿을 받자마자 “이 입술 손종원 셰프님 입술을 본따 만든 것인가요?”라고 묻더라고. 하하하. 그렇게는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갑자기 그 순간 막 집어먹기가 조금 머뭇거려지던 기억. 다행히도(?) 누구의 실제 입술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네 가지 초콜릿은, 그중 한두 개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당당히 네 개 다 맛보고 싶다고 요청해도 되니까 마지막까지 기분 좋게, 야무지게, 네 개 다 먹으며 마무리하기를 제안할게.
라망시크레의 다이닝 포인트
- 아마도 서울에서 가장 낭만적인 인테리어. 남자라면 오랜만에 턱시도를, 여자라면 ‘이걸 언제 입지?’ 싶었던 화려하고 예쁜 드레스를 입어도 좋을 공간. 멋지게 기분내 봐.
- 손종원 셰프의 보석을 세공한 듯한 화려하고 정교한 요리를 보는 시각적인 즐거움이 압도적인 곳이야. 맛있는 것은 당연하고.
- 라망시크레는 독보적으로 ‘음식의 미묘하고 섬세한 향’을 아주 잘 살려내는 곳 중 하나야. 와인을 곁들이면 그 매력이 배가되니, 소믈리에의 가이드를 한 번 따라 봐.
- 기념일이라면 꼭 미리 이야기하는 것을 잊지 말기를! 작은 서프라이즈와 함께 귀여운 레터링 서비스도 준비될 수 있어.
라망시크레
- 주소: 서울 중구 퇴계로 67 레스케이프 호텔 26층
- 전화번호: 02-317-4003
- 영업시간: 일요일 휴무, 월-토 12:00-22:00 (브레이크타임 15:00-18:00)
- 가격: 런치 코스 16만 원, 디너 코스 25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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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a
미쉐린 스타 도장깨기를 연재합니다. 셰프의 이야기를 전하고, 샴페인을 연료로 삼는 미식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