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제28회 부산 국제 영화제에 다녀왔다. 영화제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딛는 예술가들의 넘실거리는 뜨거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주변을 얼쩡거리기만 해도 큰 동기부여를 얻을 수 있고, 아직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한 배우를 먼저 점 찍은 뒤, 그 배우의 다음 행보를 혼자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기 10인의 뜨거운 젊은 배우가 있다. 물론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배우들도 많기는 하다. 허나 이들의 잠재력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코인에 탑승하는 것도 늦지 않은 것으로 보일 정도다. 당신이 생각하는 넥스트 전도연, 넥스트 송강호는 누구인가. 현시점 다음 행보가 가장 궁금한 열 명의 젊은 배우를 여러분께 소개한다.
[1]
김시은(1999)
- 주요 출연작 : <다음 소희>, <너와 나>, <오징어 게임 시즌 2>(예정)
<다음 소희>의 소희 역으로 백상예술대상을 비롯한 여러 국내 시상식에서 신인 연기상을 수상했던 배우 김시은의 데뷔는 ‘다음 하니’를 뽑는 오디션이었다. 2016년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EBS 프로그램 <톡!톡! 보니하니>에서, 김시은은 비록 하니가 되지는 못했으나 그 재능을 인정받아 프로그램의 보조 역할을 맡게 된다. (본인이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오디션을 위한 셀프 자기소개 영상이 아직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는데, 그 쾌활하고 밝은 모습을 보고 나면 이 배우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을 울게 한 소희와 웃게 한 하니. 이번 주 개봉한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에서 김시은은, 소희와 하니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또 한 번 관객을 울고 웃게 한다. 단언컨대 지금 이 시점, 그 다음이 가장 궁금한 배우다.
[2]
박규영(1993)
- 주요 출연작 : <셀러브리티>, <스위트홈>, <사이코지만 괜찮아>, <오징어 게임 시즌 2>(예정)
박규영 배우의 첫 단독 주연 작품인 넷플릭스 시리즈 <셀러브리티>에서 박규영이 연기한 주인공인 파워 인플루언서 서아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인생 역전의 치트키가 궁금하지 않냐고. 얼핏 스타들의 성공엔 ‘치트키’와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는 것처럼 느껴지는 표현이지만, 배우 박규영은 꽤 오래전부터 치트키를 쓰지 않고 꾸준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온 배우다. 최근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넷플릭스 작품들을 통해서다. 특히 <스위트홈>의 과격한 베이시스트 윤지수를 통해 전 세계 팬들과 넷플릭스 관계자(?)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공개 예정 작품인 <오징어 게임>과 <스위트홈>의 다음 시즌들까지. 박규영이 등장하는 작품이 곧 화제작이자 ‘핫플’ 예약이다.
[3]
고윤정(1996)
- 주요 출연작 : <무빙>, <헌트>, <스위트홈>,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예정)
‘<무빙>의 장희수를 연기했다’ 배우 고윤정에 대한 설명은 이 한마디로 충분하다. 고윤정은 분명 <무빙>의 최대 수혜자이지만, 역으로 말해 <무빙>의 성공이 고윤정 덕분이라는 말이 충분히 성립 가능할 정도로 고윤정의 매력 또한 대단했다. 그런 고윤정은 실은 <무빙>의 흥행 전부터 업계 관계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정재 감독의 데뷔작 <헌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도, 감독이 <스위트홈> 속 박유리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의 단단함을 보고 반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응급실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늘 주도적이면서도, 동시에 아픈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는 고윤정 배우가 다음 연기 예정인 직업은 의사다. 정말 적절하다.
[4]
박유림(1993)
- 주요 출연작 : <드라이브 마이 카>, <발레리나>, <기적의 형제>
자신의 영화 데뷔작의 감독이 세계적인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인 건 어떤 기분일까. 칸 영화제 각본상을 비롯해 미국 아카데미에서 국제장편영화상까지 수상한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배우 박유림은, 말을 하지 못하는 한국인 수어 사용자 ‘유나’를 통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 영화엔 유나가 연극 오디션을 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유나는 진실성 있는 수어 연기를 통해 마침내 연출가의 마음을 얻고야 만다. 그렇게 박유림이 극 중 연극과 세 시간에 달하는 긴 영화의 문을 닫는 순간, 우리는 이 배우의 다음 무대를 어서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놀라운 건 박유림이 아직 제대로 입도 떼지 않았다는 것이다.
[5]
하윤경(1992)
- 주요 출연작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슬기로운 의사생활>, <경아의 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막을 내린 지 1년이 넘어가는 시점에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주인공 우영우가 외우던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가 아닌 친구 최수연을 표현하는 수식어다. ‘봄날의 햇살’. 하윤경 배우가 연기한 최수연은 사실 드라마를 향한 비판, 그러니까 ‘장애인들의 현실을 지나치게 미화한 것이 아닌가’하는 비판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현실엔 최수연처럼 그들에게 따뜻한 햇살을 내리쬐어 주는 존재가 드무니까. 그럼에도 하윤경은 그 누구보다 진정성 있는 표정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실제로 존재함을 믿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우리가 최수연을 믿을 수 있었던 건, 그 누구보다 이를 연기한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주영화제에서 2관왕을 차지한 <경아의 딸>을 비롯한 다음 믿음의 결과들이 기다려지는 배우다.
[6]
주종혁(1991)
- 주요 출연작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유미의 세포들>, <한국이 싫어서>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라는 말은 이상하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존재로서의 빌런을 미워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특히 주인공이 매력적이거나 사회적 약자인 경우엔 훨씬 어려운 일일 텐데. 배우 주종혁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그 어려운 걸 해낸다. 법무법인 한바다의 변호사인 ‘권모술수’ 권민우 역할로 말이다. <우영우>에서 주종혁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최수연이 극의 판타지성을 끌어올리면, 기계적 공정을 말하는 권민우가 극을 현실로 돌려놨다. 올해 부산영화제 개막작이었던 <한국이 싫어서>(장강명 소설 원작, 내년 개봉 예정)에서도, 주종혁은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의 새 삶을 꾸리는 청년의 단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권민우처럼 계산적이지만 때론 순수하게 자신만의 연기를 선보일 그의 다음 술수가 궁금하다.
[7]
류경수(1992)
- 주요 출연작 : <이태원 클라쓰>, <지옥>, <정이>, <구미호뎐1938>
배우 류경수를 얘기할 때 <이태원 클라쓰>의 최승권을 말하는 것도 이제 옛말이 되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널리 알리게 된 류경수는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크고 작은 역을 가리지 않고 출연하며 꾸준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는 배우다. 류경수의 장점은 그 누구보다 특별 장르 영화에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지옥>에서 연기한 사이비 종교의 사제 역할과, <정이>의 AI 연구소 소장 역 모두 우리가 사는 현실에선 절대 마주칠 수 없는 인물에 속한다. 그럼에도 류경수는 그 등장만으로 판타지스러운 세계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온갖 컴퓨터그래픽과 AI가 난무할 미래의 어떤 영상 콘텐츠 속에서도, 그의 존재감만큼은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8]
정가람(1993)
- 주요 출연작 : <4등>, <사랑의 이해>, <좋아하면 울리는>, <탄금>(예정)
영화 얘기를 하다 보면 종종 <4등>을 인생 영화로 꼽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4등>은 늘 4등만 하는 초등생 수영선수 준호의 이야기로, 1등만 인정하는 한국 사회의 결과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다. 정가람 배우는 이 영화에서 준호를 훈육하는 코치 광수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는데, 알고 보면 광수의 준호를 향한 행동은 사실 어린 광수가 세상으로부터 받았던 것과 닮아 있다. 이 영화를 통해 대종상 영화제에서 신인배우상을 수상한 정가람은 그 이후 꾸준히 굵직굵직한 작품들에 출연해 왔다. <독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등의 장르 영화뿐 아니라 <좋아하면 울리는>, <사랑의 이해>와 같은 로맨스 영화까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재현하며 영화계에 뛰어들었던 정가람은 현재 결과가 아닌 그 과정을 즐기는 중이다.
[9]
정재광(1990)
- 주요 출연작 : <낫아웃>, <화란>, <범죄도시2>, <최악의 악>
정재광 배우는 21년 개봉한 이정곤 감독의 <낫아웃>에서 19세 야구부 소년 광호를 연기했다. 정재광은 당시 이미 서른을 넘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모든 것이 서툰 미생의 소년을 완벽히 표현해 내어 전주영화제 경쟁 부문과 청룡영화상을 포함한 여러 시상식에서 배우상을 수상했다. ‘낫아웃’은 아직 완전한 아웃은 아니지만 살 가능성이 희박한 상태에 놓인 타자를 표현하는 야구 용어다. 천만 영화 <범죄도시2>와 <화란> 등의 주목받는 상업 장르 영화에 연달아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하고 있는 정재광을 아직 홈런타자라고 부르긴 이를 것이다. 그러나 아웃이 되기 직전까지 온 힘을 다해 달리던 광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재광의 다음 타석을 기대하지 않기란 어렵다.
[10]
유수빈(1992)
- 주요 출연작 : <D.P. 시즌2>, <거래>, <엑시트>, <인간실격>, <소년들>
2019년 개봉해 940만 관객이라는 깜짝 흥행 기록을 세운 영화 <엑시트>의 최고 명장면이라고 불리는 순간이 있다. “사람 살려주세요!!!” 특유의 웅장한 발성으로 구조 신호를 보내던 한 남자는, 이어지는 SOS 모스 부호를 입으로 내뱉는 과정에서 우습게 박자를 놓친다. “따따따! 따따-따따..” 텍스트로는 설명이 어려우니 유튜브에 ‘엑시트 따따따’라고 검색해 보길 바란다. 이 영화의 신스틸러였던 유수빈 배우는 역시나 개그맨이 어릴 적 꿈이었다고 한다. 최근 출연한 런닝맨에서도 그는 자신과 닮은 꼴인 이광수 배우 성대모사를 하며 예능감을 선보이기도 했다. 올해엔 <D.P. 시즌2>에 어리바리한 이병 박세웅으로 출연하여 또 한 번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웃음을 베이스로 깔고 있는 젊은 배우의 저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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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홍
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에서 최우수상 수상. 영화 글과 평론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