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평범한 히어로에게 마음을 빼앗기다, <무빙>

디즈니 플러스의 최대 히트작 무빙의 모든 것
디즈니 플러스의 최대 히트작 무빙의 모든 것

2023. 09. 12

“하늘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이는 <무빙>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이미현(한효주)의 대사다. 미현은 원래 딱히 하늘을 볼 일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때는 스마트폰이 존재하지 않는 1990년대이지만, 그래서 그 시대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와 달리 하늘을 조금 더 많이 볼 것 같지만, 그럼에도 그때의 사람들 역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게 특별한 일이 없으면 딱히 하늘을 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moving_hyoju03

물론 보는 사람이 있기야 있었겠지만, 미현의 말처럼 ‘하늘을 보는 버릇’을 가진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뭐, 하늘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눈처럼 내려오는 걸 본 적이 있다면 모를까. 그런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진 적이 있다면 나 역시 시도 때도 없이 하늘을 올려다볼 것이 분명하지만, 그런 건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일어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하늘을 안 본다.

02 moving 6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요즘 유행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하늘을 보는 버릇이라고 하면 너무 낭만적인 것 같으니, 매주 수요일 디즈니플러스에 올라오는 <무빙>을 보는 버릇이라고 하자. 8월 9일 1화부터 7화가 공개된 이후, 9월 13일 기준 17화까지가 공개된 드라마 <무빙>은 공개 첫 주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03 moving 4 02 moving 3

실제로 TV-OTT 통합 드라마 화제성 순위에서 한동안 1위를 차지하기도 했었고, 그에 힘입어 디즈니플러스의 신규 가입자 수도 기록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무빙>은 디즈니플러스의 한국 오리지널 콘텐츠 중에선 단연 최고 인기작임이 분명한데, 사실 그것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무빙>이 한국 작품들이 번번이 실패했던 ‘한국형 히어로물’ 콘텐츠 중 가장 큰 호응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f04

작년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이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지구를 떠났을 때(그리고 아직까지 못 돌아오고 있다), 이젠 정말 한국에선 초능력의 ‘초’ 자도 꺼내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말이 돌았었다. 개인적으론 그 영화의 무질서함과 뻔뻔함이 좋았지만, 영화가 창조한 세계에 발을 디디는 것조차 꺼려 했던 사람들의 반응도 아예 이해할 수 없던 것은 아니었다. 쉽게 말해 <외계+인>은 그 방점이 사람(인)보다는 외계 생명체에 기울어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러고 보면 제목 세 글자의 글자 수부터 상징적이다. ‘인’은 한 글자고, ‘외계’는 두 글자니까. 그 두 단어를 더해서(+) 시너지를 내려고 했던 것 같지만, 결과는 안타깝게도 마이너스였다.

01 moving 6

이런 얘기를 한 까닭은 <무빙>이 그 반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빙>은 분명 <외계+인>처럼 초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그 무게 중심이 ‘초능력’에 있다기보다는 ‘사람’에 있는 것이 매력인 작품이다. 그것도 그냥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말이다. 그리고 그 지점이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공감을 처음부터 수월하게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03 moving 2 04 moving 2

<무빙>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보통 사람이다. 극에서 그들은 남들과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그려질 뿐이지, 결코 특별한 사람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가진 능력을 통해 도덕적 우위를 획득한 다음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고, 편법을 통해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무빙>은 그들도 특수 능력만 빼면 부족하고 타인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도 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노력한다.

ku

류승룡 배우가 연기한 장주원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그는 처음부터 가장 보편적인 요식업의 대명사인 치킨집을 오픈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론 치킨집 사장님이라는 것만으로 그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시리즈를 계속해서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드라마 10화 <괴물>에서부터 밝혀지는 그의 과거 모습을 본다면, 그가 그 누구보다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길눈이 어둡고 무협지를 좋아하는 순수한 동네 형. 그런 장주원이 xx화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며 정말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눈물을 흘릴 때. 이 사람을 우리와 다른 ‘괴물’로 보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아무도 없을 것이다.

01 moving 5

그에 반해 이 드라마에서 아직까지 가장 신비로운 존재로 남아 있는 캐릭터는 장주원의 파트너이자 이미현의 남편인 김두식이다. 아직 그의 모든 행적과 과거가 밝혀지지 않긴 했지만, 그러나 그 역시 여러 장면에서 인간적인 매력을 뽐낸다. 처음부터 츄리닝 복장에 팔 토시를 낀 채 등장하며 우는 아들을 달랬던 그는 이후 극에서 곧 사랑에 빠진다. 안기부의 최정예 블랙 요원으로서 자신의 비행 능력을 자유 자재로 컨트롤할 줄 아는 능력자처럼 느껴졌던 그는, 마침내 미현과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허점을 보이고야 만다. 아직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이 감동적인 장면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무튼 두식은 의도치 않게 하늘을 난다. 단언컨대 이 장면은 <무빙>의 최고 명장면 중 하나다.

생각해 보면 강풀 작가의 웹툰엔 스크롤을 한참 동안 멈추게 하는 명장면들이 차고 넘쳤었다. <무빙>의 성공이 지닌 또 하나의 포인트는, <무빙>이 영상화된 강풀 원작 작품 중 가장 성공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 기존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단지 성공을 못 한 것뿐만이 아니라, 심한 악평을 받을 정도였었다. 이토록 좋은 이야기를 쓰는 작가인데. 명장면들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인데. 그동안 그렇게 기대감과 먼 작품들만 나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무빙>은 무슨 이유에서 강풀 원작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물론 답은 다소 뻔하다. 이번 작품에 강풀 작가가 처음으로 직접 각본을 썼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것 외에는 설명할 수 있는 요소가 딱히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감히 설명 불가능한 생각을 사족으로 붙여 보려고 한다.

3

나는 <무빙>의 세계가 강풀 작가가 자신의 창조한 세계 중 가장 사랑하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웹툰 <무빙>은 <무빙>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2015년에 연재되었던 <무빙>은 사실 강풀이 2005년 연재한 <타이밍>과 2009년 연재한 <어게인>, 그리고 2017에 연재한 <브릿지>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이다. 메인 줄거리 자체는 독립적이지만, 여러 작품에 ‘같은 인물’로 출연하는 캐릭터들이 여럿 존재한다. 예컨대 <무빙>의 주요 인물인 봉석과 희수, 강훈을 포함한 여러 캐릭터가 <브릿지>에 등장하고, 또 <타이밍>의 주요 캐릭터가 <무빙>과 <브릿지>에 얼굴을 비추는 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작품의 세계는 하늘을 나는 사람을 포함한 다양한 초능력자들이 존재하는 세계다.

05

말하자면 강풀은 2005년부터 지금까지 하나의 세계에 관한 생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렇게 긴 세월 동안 하나의 대상에 대한 생각을 이어오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드라마 <무빙>을 알게 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이 세계와 사랑에 빠져버리고, 미현처럼 하늘을 보는 버릇이 생겨버렸는데 말이다. 오그라든다고, 왜 그리 낭만적이냐고 말해도 할 수 없다. 나는 이미 <무빙>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 같다.

About Author
김철홍

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에서 최우수상 수상. 영화 글과 평론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