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봄에 아이가 태어나 여름부터 7개월짜리 육아휴직 중이다.
알라딘이 창립 24주년을 맞아 재밌는 기록을 알려줬다. 알라딘 구매 내역을 통계로 낸 기록이다. 링크는 여기. 내가 산 책을 쌓으면 10층짜리 건물 높이가 되고(읽은 책이라고는 안 했다), 이 기세라면 100세까지 12,954권을 더 살 수 있단다(읽을 수 있다고는 안 했다). 쌓아 올린 10층 높이의 책더미 중 5권을 골라 소개한다.
[1]
<3인의 명탐정>
“그들은 항상 내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기 마련이었다.”
포털엔 보기 싫은 뉴스가 한가득인데, 그중 하나가 범죄 소식이다. 왜 잔혹하고 치졸한 범죄는 항상 저지르고 난 뒤에야 알려질까. 뒤늦게 현장 스케치를 열심히 해봐야 시끄러운 뒷이야기만 무성해질 뿐. ‘관련 뉴스’ 몇 개를 더 읽어봐도 진실은 여전히 흐릿하고 후킹한 제목들만 어지럽다. 전날 야구경기 스코어만 확인하고 포털창을 끄는 게 맘 편하다.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도 한가득인데, 그중 하나가 탐정이다. 왜 탐정은 늘 범죄가 벌어지고 난 뒤에야 나타날까, 싶지만 예방은 애초에 탐정의 일이 아니다. 마치 범행을 목격한 사람처럼 사건의 A부터 Z까지 실체를 밝혀내고 결말에 이르러 범인을 지목하는, 이 비현실적인 존재가 주는 쾌감 때문에 굳이 잔혹하고 치졸한 범죄로 시작되는 추리소설을 찾는 것이다.
쾌감을 세 배로 느끼고 싶다면 <3인의 명탐정>을 추천한다. 주말 파티가 열린 서스턴 저택에서 주최자가 살해된다. 문은 잠겨 있고 발자국은 없다. 아무도 범행을 저지를 수 없었는데…? 그러나 재밌는 추리소설이 그렇듯 저택 안에 있던 모두가 용의자다. 이제 탐정이 나타날 차례. 그런데 한 명이 아니라 셋이다. 나른해 보이는 사이먼 경, 자비로운 브라운 신부, 지나치게 쾌활한 프랑스인 피콩. 물론 이들은 협업 따위 없이 각자의 추리를 펼쳐나간다. 그게 탐정의 자존심이고, 덕분에 세 배의 쾌감은 온전하다. (여기서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이 책에서 1+1+1은 3이 아니라 4 이상이다!)
- <3인의 명탐정> 레오 브루스 | 엘릭시스 | 1만 6,000원
[2]
<코인묵시록>
“장부만 확실하면 정부는 없어도 돼.”
딱딱해서 지루하고 복잡해서 어려운 지식을 전달하려면 정공법만으로는 안 된다. 그럴 때 만화는 우회로가 아니라 지름길이다. 그래서 사 모은 교양만화 시리즈가 몇 개 있다.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명탐정 3인의 추리 방식이 다르듯, 만화가 3인의 스타일도 제각각이다. 독자의 쾌감은 또 한 번 온전히 세 배.
<코인묵시록>은 김태권 작가의 신작이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투자하긴 너무 쉬운 가상화폐 얘기다. 책 표지에 적힌 여섯 글자에 읽어야 할 이유가 압축되어 있다. “모르면 당한다!” 사실 출간이 좀 늦은 감은 있다. 투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씩 투자해 봤을 만큼 가상화폐 열풍이 이미 여러 차례 휩쓸고 지나갔으니까. 그러나 NFT 아트 매거진 편집장으로 일하며 업계를 경험한 작가의 생각은 다르다. 이대로 사라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고, 가상화폐를 활용해 더욱 다양한 실험이 이뤄질 거라는 얘기. 당하지 않는 것을 넘어 ‘기회’로 삼으려면 그 위험성을 미리 알아둬야 한다.
책의 주요 등장인물은 가상화폐로 ‘한탕 친’ 사람들이다. 트윗 한 줄로 도지코인 가격을 좌우했던 일론 머스크는 아무것도 아니다. 뒤이어 나오는 사람들이 진짜 사기꾼이다. 테라/루나 코인, FTX 사태, 원코인 등 ‘탈중앙화’라는 가상화폐의 장점을 이용해 속이고 감추고 빼돌린 사례가 가득하다. 신기한 건 기사로 볼 땐 한 줄 넘기기도 어려웠던 내용들이 쏙쏙 이해된다는 점. 방대한 역사를 만화로 옮겨본 작가에게, 코인쯤이야 너무 쉬운 미션이었을지도.
- <코인묵시록> 김태권 | 비아북 | 1만 7,000원
[3]
<ALONE>
“부모님이 나가면서 문을 쾅 닫는 소리는
자유를 알리는 신호음 같았고,
그렇게 나는 오롯이 혼자 남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병원에서의 3일은 꿈만 같았다. ‘몸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뭔지 비로소 알게 됐다. 퇴원 후 아내와 아이는 산후조리원에 들어갔다. 나는 2주 동안 집을 혼자 썼다. 꿈 같은 두 사람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외로운 시간이자, 혼자 있을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 타이밍 좋게 <ALONE>을 읽기 시작했다.
외로움을 주제로 22명의 작가가 쓴 22편의 에세이를 엮었다. 우린 자주 까먹는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는 걸.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아무리 많아도, 항상 일과 사람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라도. 심지어 사랑하는 아기가 태어나 너무 기쁜 순간에도. 외로움은 때로 나를 갉아먹고, 때로 나를 자유롭게 한다. “이제 내게는 아무도 없구나”라는 막막함을 주는가 하면, “이제 너는 뭐든 할 수 있어”라는 자신감도 준다. 책을 읽으며 외로웠다. 외로워서 좋았다. 혼자 있는다는 건 외로움이자 기회다.
벼락치기로 아이 맞이를 준비하다 보니 2주는 금방 지나갔다. 드디어 조리원 퇴소날. 둘이었다가 혼자였지만 이젠 셋이다. 아내와 나 사이에 새로 생긴 예쁜 끈 하나. 품에 안긴 아기는 유리창 너머로 볼 때와 차원이 달랐다. 집에 와서도 어쩜 그리 천사처럼 쌔근쌔근 잘 자던지. 눈은, 코는, 귀는, 입은, 볼은, 손가락은, 발가락은, 엉덩이는, 또 어쩜 그렇게 귀여운지. 하지만 거기까지, 그날 밤부터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됐다. 천사 같은 아이가 먹고 울고 싸고 먹는 사이, 똥기저귀와 통잠 사이에서 나는 또 한 번 외로웠다. 내가 또 까먹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는 걸. 22개의 외로움에 내 외로움을 하나 더, 얹는다.
- <ALONE> 줌파 라히리 외 21명 | 혜다| 1만 6,800원
[4]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고 싶어서이다.”
아이 이름은 내가 지었다. 특이한 성 뒤에 잘 붙는 이름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다행히 아내와 나 모두 흡족한 이름이 찾아왔다. 발음하기 좋고, 흔하지 않고, 너무 멋 부리지 않은. 이름을 정해놓고 아이를 기다리며 루시드폴의 ‘연두’를 많이 들었다. “루비처럼 빨간, 진주처럼 하얀 꽃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말에 “난 연두색으로 피고 질 거야”라고 답하는 노래. 들을 때마다 난 무슨 색으로 살고 있나, 이게 내 색이 맞나 돌아보게 된다.
믿고 읽는 작가 임경선의 신간도 돌아보기 좋은 책이다. 작가 스스로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수시로 던졌던 질문들을 3개로 좁혔다. 나이를 잊고 살 수 있을까. 글로 먹고 살 수 있을까. 삶의 선택은 어떻게 이뤄질까. 셋 다 평소 내가 하던 고민들이라 읽는 내내 1:1 상담을 받는 기분이었다. 또 세 개의 챕터 말미에는 ‘묻고 답하기’ 코너가 붙어 있다. 각 질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어 강연을 듣는 기분이었다. 상담에, 강연에, 책값만 5,000원 너무 싸다.
아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면 좋겠다. 또한 한편으로는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에 너무 몰두하지 않으면 좋겠다. 이 책의 부제 “인생의 선택이 쌓이면 내가 된다”처럼, ‘나 자신’이라는 건 계속 바뀌어 가는 거니까. 새싹이 자라면 빨간 꽃도 되고 하얀 꽃도 되고 파란 꽃도 된다. 연두는 무슨 색이든 될 수 있음을 잊지 않기를.
-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임경선 | 마음산책 | 1만 5,000원
[5]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동경하는 대상이 생기는 것은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모으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이 소설을 대체 어떻게 번역하겠는가.” 지난번에 책 <각각의 계절>을 읽고 내가 쓴 문장이다. 한국어의 맛을 잘 살린 작가의 솜씨를 강조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문장을 후회한다. 한국 시 번역가 7인의 인터뷰를 모은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를 읽고 나서다. 인도계 미국인이지만 한국어에 빠져 한국문학 번역가가 된 알차나는 말한다. “풀릴 수 없는 번역은 없는 것 같아요. 무슨 언어든 일치하는 단어나 표현이 있는데 아직 못 찾은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내가 한국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번역 없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역시 <각각의 계절>을 소개할 때 내가 썼던 문장이다. 역시 조금 후회한다. 한국 시 번역가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곳에서 행복을 찾는다. 한국어와 한국어로 된 문학을 너무 사랑하기에, 다른 나라 사람에게도 알리고 싶은 마음.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단어를 고르고 의미를 헤아리는 마음. 그 과정에서 이들은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느낌. 피가 빠르게 도는 느낌”을 받는다.
인터뷰어는 은유 작가다. 그는 글쓰기 강의를 열고, 사람을 인터뷰하고, 생각을 산문으로 옮기며 벌써 11권의 책을 냈다. 시 번역가를 인터뷰한 이번 책은 시를 곁들여 썼던 첫 책 <올드걸의 시집>과도 맞닿는다. 유계영 시인은 “시 쓰기는 세상을 사랑스럽게 보는 일”이라고 말했다는데,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인터뷰는 사람을 사랑스럽게 보는 일”이라 생각하게 된다.
조금 더럽혀진 마음으로 귀가해 이 책을 펼쳐 읽었다. ‘정답이 없어서 오답도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덕분에 단잠을 잤다.
-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은유 | 읻다 | 1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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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