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멋쟁이 할아버지가 되고 싶은 김고운이다. ‘세월=멋’이라는 공식을 몸소 보여주는 할아버지들의 사진을 보다가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슈트를 근사하게 차려입고 흰머리를 멀끔하게 빗어 넘긴 사람들 사이에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반바지와 스니커즈를 입은, 꽃할배 지망생이라면 어디선가 한 번쯤은 봤을 그 할아버지. 나이젤 카본이다.
그가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는 브랜드 나이젤 카본은 빈티지를 바탕으로 제품을 다루는 브랜드다. 그래서 유행을 좇지 않는다. “오랫동안 가치가 지속되는 디자인을 오래 입을 수 있도록 튼튼하게”라는 철학으로 제품을 만들며, 이러한 가치가 잘 드러나기 때문에 국내는 물론 일본, 영국에서도 두터운 팬덤을 유지하고 있다.
나이젤 카본은 1949년 영국 출신으로 70대 중반이지만 여전히 상품을 기획하고 디자인한다. 사진 속 개구쟁이 같은 웃음에서 이 패션에 대한 이 남자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금까지도 꾸럭미를 간직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어느 인터뷰에서 어떻게 젊음을 유지하냐는 질문에 그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이 대답을 듣고 더 궁금해졌다. 그가 이토록 사랑하는 일에 대해. 오늘은 나이젤 카본을 말하는 세 가지 키워드와 협업 제품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keyword #1
빈티지
나이젤 카본은 지독한 빈티지 컬렉터다. 수집한 빈티지가 4,000점이 넘어 제품을 기획할 때면 빈티지 숍이 아니라 개인 창고에서 레퍼런스를 찾을 정도. 하지만 그에게도 빈티지와 상관없던 시절이 있었다. 영국의 뉴캐슬 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과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Cricket(현재의 나이젤 카본)이라는 브랜드를 시작할 당시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건 60년대 팝 문화였다. 비틀즈, 비치보이스, 롤링 스톤즈와 같은 아티스트를 동경하던 그에게 빈티지 세계를 안내한 사람은 디자이너 폴 스미스. 그는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기 전 편집숍을 운영했는데 이때 알고 지내던 나이젤 카본에게 영국군 조종사 자켓 빈티지 제품을 보여주었다. 나이젤 카본이 빈티지에 눈을 뜬 순간이다.
keyword #2
영국
[1924년 에베레스트 탐사대.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조지 맬러리.]
나이젤 카본의 영국 사랑은 각별하다. 하위 라인 중의 하나인 Nigel Cabourn Authentic은 영국 원단만을 사용한다. 각각의 제품을 봐도 영국에 대한 사랑이 묻어난다. 오락가락하는 날씨를 위해 발수가공이 된 맥 코트, 영국 신사들이 많이 착용하는 멜빵 같은 제품이 그렇다. 그중 애정이 가장 많이 담긴 제품은 영국의 등반가인 조지 맬러리가 입었던 자켓이다. 조지 맬러리는 “왜 에베레스트를 오르나요?”라는 질문에 “그게 거기 있어서요”라고 대답한 전설적인 인물. 그는 1924년에 에베레스트 원정을 떠났고 8,600m 지점에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실종되었다. 에베레스트의 높이가 8,848m인 것을 고려하면 어쩌면 그가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품을 살펴보자. 에베레스트 어귀에서 입었던 옷인 만큼 전체적인 소재는 보온성이 좋은 울이다.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영국의 해리슨 트위드 사의 울을 사용하였다. 어깨 패치 부분은 방수 원단인데 역시 유서 깊은 영국 브랜드 벤타일의 원단이다. 이 사람이 얼마나 영국을 사랑하는지 조금 감이 올 거다. 가격은 이런 자부심에 걸맞는 112만 5,000원. 구매는 여기에서.
- Mallory jacket 112만 5,000원
keyword #3
일본
나이젤 카본은 양쪽 손목에 손목시계를 찬다. 한쪽은 영국 시간, 다른 한쪽은 일본 시간으로 세팅되어 있다. 그가 이토록 일본에 진심인 것은 빈티지를 즐기고 이를 활용한 제품 기획을 가장 잘하는 나라가 일본이기 때문이다. 상태가 좋고 희귀한 빈티지들은 일본에 있는 경우가 많고 빈티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재현할 수 있는 장인 또한 일본에 많으니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일본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거다. 일본 원단으로 일본에서 생산되는 나이젤 카본 메인라인(Nigel Cabourn Mainline)이 존재하고 나이젤 카본 단독 매장이 일본에 10개나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이젤 카본 메인라인에는 특히 빈티지를 기반으로 한 옷이 많다. 위 사진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 육군에게 지급되었던 치노 팬츠다. 미 육군사관학교에서 사용되던 의류에서 영감을 받아 나이젤 카본이 일본에서 개발한 원단을 사용하였다. 유행과 관계없는 클래식 디자인을 좋은 부자재로 제작하여 오랫동안 입을 수 있다. 나이젤 카본 디자인 철학이 잘 구현된 모양새다. 구매는 여기에서.
- New basic chino pants 28만 4,000원
자기 장단에 맞춰 신나게 연주하다 보면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붙어서 합주하는 재즈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 나이젤 카본은 일본 문구 브랜드 미도리부터 미국 부츠 브랜드 레드윙까지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했다. 그 중 두 가지 협업 제품을 소개한다.
Item #1
반스
첫 번째는 반스 볼트(Vans Vault). 2003년 시작된 반스의 프리미엄 라인으로 ‘Vans’에서 ‘Va’를, ‘Ultimate’에서 ‘ult’를 따와서 Vault라고 이름 지어졌다. 주로 어센틱, 올드스쿨 같은 반스의 초창기 모델을 재해석해서 출시한다. 나이젤 카본과 반스 볼트가 협업한 제품 중 2021년 출시한 반스 어센틱이라는 제품이 눈에 들어왔다.
반스 어센틱은 1966년 반스의 시작을 함께한 디자인으로 반스의 스테디셀러를 넘어 스니커즈의 스테디셀러라고 할 수 있는 모델이다. 이 신발은 애초에 배의 갑판(deck)에서 신는 용도로 개발되었다.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개발한 와플 고무 밑창은 의외로 스케이트 보더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면서 현재 반스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나이젤 카본은 갑판에서 힌트를 얻어 해군 컨셉의 반스 어센틱을 기획하였다. 아웃솔의 색은 해군을 상징하는 네이비색, 그리고 군용 제품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캔버스 원단으로 제작하였다. 그 위에는 군대에서 물자를 분류할 때 사용되었던 인쇄 방법인 스텐실 기법으로 USN(United States Navy)라고 인쇄되어 있어 군용의 투박한 느낌이 전달된다. 보급 창고에서 꺼낸 느낌이랄까. 이 제품은 출시 당시에도 마니아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현재는 중고로만 구할 수 있다. 가격은 20만 원 정도.
Item #2
타이맥스
타이맥스는 1850년도에 미국에서 시작한 시계 브랜드다. 무려 170년이 넘었다니 그 자체로 빈티지인 셈이다. 그러니 나이젤 카본과 타이맥스의 협업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과거 미군 군용 시계를 납품한 경험을 바탕으로 1997년 출시한 타이맥스 익스페디션 모델. 나이젤 카본은 이 제품에 2차 세계 대전에서 ‘사막의 여우’라 불리는 독일의 롬멜 장군을 물리치는 영국 육군 원수(?) 몽고메리의 아프리카 전투라는 배경을 설정했다. 이 전투의 패배 이후 독일군이 힘을 잃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북아프리카에서의 이 전투는 세계2차대전의 분수령이 되는 중요한 전투이다.
몽고메리 장군 휘하 부대에 보급된 시계라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제품인 만큼 파우치에도 신경을 썼다. 사막의 고운 모래와 뜨거운 열기는 시계가 고장나는 원인이 되기도 할테니깐. 베젤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졌고 크기는 36mm로 부담없이 착용할 수 있는 사이즈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방수 성능이 수심 30m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인데 이는 기존 모델인 타이맥스 익스페디션 모델 보다도 낮은 등급이다. 이는 역시 높은 방수 성능이 필요 없는 사막이라는 설정 때문이다. 영국군이 승리한 전투로 배경을 선정한 것이나 그걸 위해 성능을 낮추기도 하는 그의 고집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흰색 다이얼 위에는 숫자와 초침, 분침, 시침이 전부다. 시간을 나타내는 기능 외에는 다른 기능이 전혀 없다. 요일이나 날짜 정도는 있을 법한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아날로그 디자인이 더 나이젤 카본 답다는 생각을 한다. 스마트 워치를 찬 나이젤 카본은 아무래도 상상이 잘 가지 않으니까. 가격은 25만 8,000원. 구매는 여기에서.
- Nigel cabourn X Timex desert watch 25만 8,000원
그가 좋아하는 빈티지, 영국, 일본을 관통하는 게 있다. 바로 이야기다. 그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역사 속 이야기나 브랜드, 제품에 관한 이야기들을 활용해서 물성을 가진 제품으로 기획, 제작하는데 탁월한 이야기 꾼이다. 이는 그가 70이 넘도록 꾸준히 패션을 사랑하고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할테다. 이야기는 시간이 흐를 수록 가치가 생기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는한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끊이지 않을 거니깐. 실제로 그는 2024년 조지 맬러리의 에베레스트 등정 100주년을 기념하는 제품을 구상 중이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듣는 것이 아니라 옷을 착용하면서 직접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나이젤 카본은 싫어할 수 없는 브랜드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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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운
패션 관련 글을 씁니다. 헛바람이 단단히 들었습니다. 누가 좀 말려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