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구름 관찰자를 위한 매뉴얼

베스트셀러보다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시리즈
베스트셀러보다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시리즈

2023. 06. 29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도 만들어 보내고 있다).

정신없는 6월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책을 붙잡았던 이유는 둘 중 하나다. 아직 덜 바쁘거나, 나에게 책이 정말 소중하거나. 태어난 아이가 책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읽을 책이 너무 많아 항상 조급했는데, ‘같이 읽을 책’이 많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1]
<나의 돈 많은 고등학교 친구>

“사람들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가지가 쭉쭉 뻗어 탐스러운 열매가 열리기를 바라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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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인스타 스토리에 표지를 찍어 올린다. 개인 기록용(+약간의 잘난 척)이다. 그런데 이 책은 올리기 전에 잠깐 망설였다. 제목이 좀 민망했기 때문이다. <나의 돈 많은 고등학교 친구>가 어때서? ‘돈 많은’까지는 괜찮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으니까. 그 뒤에 ‘친구’가 붙으니 거부감이 확 든다. 생각해 보라. “이쪽은 내 친구인데, 돈이 많아!” 훗날 내가 대부호가 되더라도 ‘돈 많은 친구’로 기억되기는 싫다.

그럼에도 책을 고른 건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저자의 신작이기 때문이다. <김 부장> 시리즈를 읽으면서 “돈 얘기하는 책은 재미없다”라는 고정관념이 깨졌다. 난 자가도 없고, 대기업 근처도 안 가봤고, 부장도 아니지만 와닿는 이야기였다. 전형적인 캐릭터를 실감 나게, 복잡한 상황을 단순하게 펼쳐내는 필력 덕에 세 권을 금방 다 읽었다. 재밌으면 됐지, 제목 좀 민망하면 어때.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도 있는데.

한 줄 요약을 하자면 이렇다.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했던 친구가 어떻게 저리 돈을 많이 벌었나? 슈퍼리치가 된 ‘고등학교 친구’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면 몇 쪽 못 읽고 덮었을 테지만, 이번에도 저자는 캐릭터와 스토리의 힘을 빌린다. 광수의 아들 광현이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돈 버는 방법을 익혀나가는 과정이 펼쳐진다. 고등학교 친구 ‘영현’과 함께.

송희구 작가의 장점은, 쉬운 이야기 속에 오래 남을 한 문장을 단단히 심어둔다는 점이다. 한 번 듣고 날아가 버릴 말도 그의 스토리텔링을 거치면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목표란 부자 그 자체가 아닌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부자엔 욕심이 없는데,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되고 싶다.

  • <나의 돈 많은 고등학교 친구> 송희구(지은이) | 서삼독 | 1만 8,000원

[2]
<구름관찰자를 위한 가이드>

 “만약 적란운이 구름의 왕이라면, 그 왕은 분명 머리끝까지 화가 난 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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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말, 아기가 태어났다. 우리 아이는 커서 무슨 일을 할까? 스스로를 한계 짓지 말고 큰 꿈을 꾸며 살길 바란다. 아이가 스스로 꿈꿀 수 있을 때까지 옆에 있어 줘야지. 달이 뜨면 저게 달이라고, 비가 오면 저게 비라고 마음껏 아는 척하면서. 아이 눈엔 구름도 신기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도 그랬다. “아이들은 세계 제일의 구름관찰자다. 6살짜리 아이라면 그림에서 좀처럼 뭉게구름을 빠뜨리지 않는다.” 예습 차원에서 <구름관찰자를 위한 가이드>를 미리 읽는다.

책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에 살짝 당황했다. 농담이야 진담이야? 자신을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추종자들’에 맞서는 구름 덕후라 소개하는 그는, 2005년에 설립된 구름감상협회 회장이기도 하다. 구름감상협회 회원은 전 세계 120개국에 걸쳐 5만 명이 넘고, 한국에서는 44명 정도가 활동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단다(이건 어떻게 확인했지?). 협회 선언문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구름이 부당한 비난을 받고 있으며 구름이 없다면 우리의 삶도 한없이 초라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네… 알았어요… 비난 안 할게요…)

아는 척하고픈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저자는 구름과 관련된 온갖 잡학지식을 쏟아놓는다. 구름 분류표에 따라 하층운, 중층운, 상층운으로 구성된 목차도 큰 의미가 없다. 구름이 생기는 과학적 원리를 이야기하다가, 신화 속 구름이 상징하는 바를 설명하다가, 뭉게구름이 일기예보 방송의 로고가 된 썰을 풀다가, 로마 여행에서 본 구름 얘기를 하다가, 적란운은 ‘구름계의 다스베이더’라고 했다가… 조금 정신없지만, 구름 덕후의 수다를 귀로 듣는 기분이다. 아, 불만도 있다. 이 책은 왜 컬러가 아닐까. 표지 속 구름이 아름답기에 더욱 아쉽다.

  • <구름관찰자를 위한 가이드> 개빈 프레터피니(지은이) | 김성훈(옮긴이) | 김영사  2만 2,000원

[3]
<가모 저택 사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당신들은 전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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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난 다음 날 새벽, 불길한 소리에 눈을 떴다. 경계경보였다. 대피할 준비를 하란다. 아이 얼굴부터 떠올랐다. 아내도 움직이기 힘든 상황. 창문 밖에선 사이렌이 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을 전하는 뉴스 속 자료화면이 오버랩됐다. 머리가 하얘졌다. 오발령이었지만, 놀란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 가운데, <가모 저택 사건>을 읽었다. 소설의 배경인 1936년은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기 불과 5년 전으로, 일본의 군부가 득세하기 시작한 시기다. 경계경보 때문인지 읽는 내내 마음이 서늘했다.

<가모 저택 사건>은 미스터리에 타임슬립을 섞은 이야기다. 1994년 대입을 준비하던 스무 살 다카시가 묵던 호텔에 불이 나고, 위기의 순간에 누군가 다카시를 구한다. 시간 여행자 히라타가 1936년의 가모 저택으로 다카시를 데려간 것. 다카시는 당장 1994년으로 돌아가자고 히라타를 조르지만, 다음날 사건이 터진다. 저택의 주인 가모 노리유키가 유서를 쓰고 자살했는데 현장에 있어야 할 권총이 없다. 누가 권총을 가져갔나? 아니면 자살이 아니라 살인사건인가? 다카시 눈에는 가모 집안 사람들 모두가 의심스럽다. 노리유키의 딸, 아들, 동생, 정부, 하녀들까지. 다카시와 히라타는 시간여행을 미루고, 진실을 파헤친다.

다카시의 활약 덕분에 저택에서 벌어진 사건은 일단락된다. 하지만 다카시의 마음은 편치 않다. 다가올 전쟁 때문이다. “당신들은 죽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게 된다. 살아남는다 한들 쓰라린 앞날이 기다릴 뿐이다.” 사건의 진상을 쫓아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전쟁에 대해, 역사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미야베 미유키가 다시 쓰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홍보 문구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 <가모 저택 사건> | 미야베 미유키(지은이), 이기웅(옮긴이) | 북스피어 | 1만 8,800원

[4]
<디베이터>

“우리는 토론을 하기 위해 답을 미리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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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대선 토론을 볼 땐 잔뜩 긴장했다. 누가 더 논리적인가로 대통령이 정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드라마와 현실은 달랐다. 대선 토론의 목표는 ‘상대방을 얼마나 잘 설득하느냐’가 아니라 ‘우리 편을 얼마나 더 우리 편으로 만드느냐’로 보였다. TV 토론을 보는 내 마음도 시들해졌다.

정치뿐만이 아니다.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남과 다른 내 생각을 ‘설득’하려는 사람을 만나보기 힘들다. 생각이 비슷하면 공감, 생각이 다르면 개취. 대부분의 대화는 한 방향으로 흘러가다 비슷하게 마무리된다. 용기 내 반대 의견을 제시하면 ‘갑자기 정색하는 사람’이 된다. 내 생각을 얘기하고, 남의 생각을 묻는 횟수가 점점 줄어든다. 토론 없는 세상에서 ‘토론자(debater)’를 자처하는 저자가 궁금했다.

<디베이터>는 토론 기술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친구들과 잘 지내기 위해 대답을 회피하고 농담으로 에두르던 10대 소년이 토론대회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성장 스토리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생각하고, 말하고, 듣고, 또 생각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해 왔다. 이 책에 그 업데이트 기록이 생생히, 그리고 꼼꼼히 담겨 있다.

한편 이 책은 실패담이기도 하다. 토론대회에서 배운 것을 가족과의 대화에 그대로 써먹으려다 오히려 갈등이 커지기도 했으니까. “사적 논쟁은 공식 토론에 비해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전자는 삶이었고 후자는 게임이었다.” 토론대회 밖에 삶이 있고, 토론 위에 대화가 있다는 걸 저자는 잊지 않는다. <디베이터>가 다른 자기계발서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 <디베이터> 서보현(지은이), 정혜윤(옮긴이) | 문학동네 | 2만 원

[5]
<각각의 계절>

“무슨 관계든 끊어. 우리가 어떻게든 관계를 끊고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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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책 장르가 점점 늘고 있다. 추리소설과 만화로 시작해 에세이의 맛을 알게 됐고, 인터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짧게 엿보는 것, 경영서를 쓴 CEO의 책임감을 함께 느끼는 것, 역사서에 녹아 있는 스토리텔링을 즐기는 것 모두 다른 재미를 준다. 영화도 드라마도 예능도 스포츠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역시 책만큼 재밌는 게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방금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앱을 지웠다. 한 15번 째다.)

책장의 넓은 칸을 차지한 또 하나의 장르는 국내 단편소설이다. 굳이 ‘국내’로 콕 집어 말한 이유는, 해외 걸작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한국어 말맛 때문이다. 또 왜 ‘단편’이냐면, 장편소설은 스토리 전개에 말맛이 가려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소설이 말맛을 위해 쓰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각각의 계절> 같은 소설을 읽다 보면, 내가 한국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번역 없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각각의 계절>을 쓴 권여선 작가의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만 봐도 그렇다. 친구들끼리 놀러 간 펜션에 사슴벌레가 들어왔다. “도대체 그렇게 커다란 사슴벌레가 어디로 들어오는 거예요?” 펜션 주인은 대답한다. “어디로든 들어와.” 이 ‘사슴벌레식 문답’은 소설 안에서 여러 번 다양하게 해석된다. 어떤 식으로든 가능하다는 의연함, 이미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냉소, 돌이키고 싶지만 그럴 도리가 없다는 무력감. 학창 시절의 재밌는 에피소드였던 대화 한 토막이 여러 번 변주되며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다시 정의하는 이 소설을, 대체 어떻게 번역하겠는가.

  • <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은이) | 문학동네 | 1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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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