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아직 늦지 않았다! 막차 타야 할 전시 5

지금 꼭 가야할 전시 추천
지금 꼭 가야할 전시 추천

2023. 05. 10

안녕! 오랜만에 나타난 객원 필자 전종현이야. 오랫동안 에디터H에게 제발 글 좀 쓰라는 핍박만 받던 차, 이렇게 업데이트를 하게 되어 감격의 눈물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네. 나는 얼마 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다녀왔어. 새로운 인풋이 가져오는 감동이 마음에 차올라서 이제 위험한 침대 밖 세계를 탐험하겠다고 다짐했지. 그동안 보러 가야지, 보러 가야지 노래를 부르며 맹하게 외면하던 전시 리스트를 확인해 봤는데. 어머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다니!! 이제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전시가 훌렁 날아갈 상황이 온 거야. 그러나 아직 막차는 남아 있다구. 후후. 막차로 전시 볼 때의 기쁨과 만족이 또 존재하잖아. 내가 찜해놓은 전시 다섯 곳을 공유할게. 종료 일자까지 위급한 순서대로 나열해 봤어.


[1]
울리 지그 중국현대미술 컬렉션전
송은, 
~5/20

He Xiangyu, The Death of Marat, 2011, Fiberglass silica gel, 36 × 183 × 85 cm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 Photo: CJY ART STUDIO.
Ai Weiwei, Safety Jackets Zipped the Other Way, 2020, 5 Life jackets, Dimensions variable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 Photo: CJY ART STUDIO.
Zhu Jiuyang, The Declaration of the Blind, 2015, Video, 27’ 12”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 Photo: CJY ART STUDIO.

요즈음 생긴 전시 공간 중 가장 간지나는 곳을 꼽아보라면 늘 빠지지 않는 곳이 바로 청담동 SSG 푸드마켓 건너편에 있는 ‘송은’이야. 까다롭고 실력 좋기로 유명한 스위스의 유명 건축회사 헤르조그 & 드 뫼롱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설계한 건물이거든. 송은문화재단의 본진인 이곳은 2021년 가을 개관 이후 여러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해외 컬렉션 전시를 열지 않아서 개인적으로 의아했어. 그러다 올해 갑자기 짜잔! 하고 나타난 전시가 바로 《울리 지그 중국현대미술 컬렉션전》이야. 개인적으로 울리 지그(Uli Sigg)의 빅팬이라서 그의 방한 소식을 알고 인터뷰하려고 연락도 넣고 그랬는데, 내 게으른 성정 때문에 결국 인터뷰를 못했… 근데 울리 지그가 누구길래 내 가슴을 이렇게 설레게 했을까? 한 마디로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 현대 미술 컬렉터야.

Li Zhanyang, Uli Sigg’s Head, 2007, Fiberglass, 54 × 23 × 26 cm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 Photo: CJY ART STUDIO.
Ju Ting, Untitled 062119, 2019, Acrylic on board, 220 × 241 × 13 cm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 Photo: CJY ART STUDIO.

Han Mengyun, The Pavilion of Three Mirrors, 2021, Bespoke metal sheets and metal arches, Dimensions variable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 Photo: CJY ART STUDIO.

언론인으로 일하다가 1977년 엘리베이터 회사인 쉰들러로 이직한 그는 1979년 중국에 가게 돼. 중국 최초의 외국 합작법인을 설립하기 위해서였어.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광풍에서 막 벗어나 덩샤오핑의 경제 개방 정책을 시작할 때였지. 오랜 기간 억눌려 있던 예술가들은 혼돈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고 있었고, 그런 면모가 아주 다양하게 분출됐어. 원래 미술에 별 관심이 없던 지그는 중국의 현대 미술이 변모하는 양상을 지켜보면서 일종의 책임감을 갖게 됐어. 갤러리나 딜러 등 예술 생태계가 없는 상황에서 여러 작가의 수많은 작품들이 여기저기로 사라지지 않도록 자기가 모아 후세에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이를 위해 그는 약 10년간 1000명이 넘는 작가들을 직접 만나며 중국 현대 미술을 공부하고 국가기관이 고민해야 하는 아카이브의 기준을 체계적으로 세웠어. 그리고 1990년대부터 차근차근 빈구석 없이 아카이브를 채우기 시작했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중국, 북한 몽골 주재 스위스 대사로 재직한 것도 큰 힘이 됐어.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중국 현대 미술이 세계를 뒤흔들 때 그의 컬렉션은 뮤지엄급 역량을 지니게 되었어. 중국 현대 미술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작품 중 대부분을 그가 가지고 있었거든.

Yan Lei, Ecstasy, 2019, Steel acrylic, t=10, Ø 198 cm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 Photo: CJY ART STUDIO.
(Left) Cao Yu, The Thing in the Chest, 2020, C-Print, 160 × 179 cm
(Right) Cao Yu, Fountain, 2015, Single Channel HD video, color/silence, 11’ 10”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 Photo: CJY ART STUDIO.
9 Pei-Li Pei Li, Art Should Be Beautiful, Artist Should Be Beautiful, 2016, Sculpture, video, bones, 40 × 40 × 20 cm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 Photo: CJY ART STUDIO.

세계 최고의 중국 현대 미술 컬렉터로 꼽히던 그는 지난 2012년 엄청난 결정을 내렸어. 컬렉션의 대부분인 1510점을 홍콩에 생기는 시각예술 뮤지엄인 M+에 기증한 거야. 수많은 곳에서 엄청난 돈을 제시했지만 그는 ‘기증하기 위해 모았다’는 말을 남기며 중국 본토와 가장 가까운 홍콩에 작품을 넘겼어. 그 후 남은 300점에 최근 10년간 모은 300점을 더한 600점의 프라이빗 컬렉션에서 총 47점이 송은으로 날라오게 된 거지!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면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어. 역사의 한 장을 마주하는 느낌이 드니까.

(Left) Ji Dachun, Kill Kill, 2004, Mixed media on canvas, 140 × 140 cm
(Right) Shan Fan, Malerei Der Langsamkeit, 78 Std. 36 M. 51 S., 2020, Oil on canvas, 160 × 400 × 2 cm (4 parts, 160 × 100 cm each)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 Photo: CJY ART STUDIO.
Tsang Kin-Wah, The Second Seal – Every Being That Opposes Progress Should Be Food for You, 2009, Digital video and sound installation, 6’ 30”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 Photo: CJY ART STUDIO.

전시는 다양한 재료와 방식으로 만든 평면 작업과 여성과 환경을 주제로 삼은 작업, 벽면을 가득 채운 붉은색 키네틱 타이포그래피 작업, 떨어져 죽은 시체 작업(…) 등으로 공간을 단단하게 채우고 있어. 지그를 모델로 한 초상화와 조소 작업에는 희대의 컬렉터에 대한 존중이 뚝뚝 묻어나. 울리 지그라는 이름만으로도, 그리고 스위스의 유명 큐레이터가 세심하게 짠 구성 때문이라도, 쉬는 날 시간 내어 들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전시야. 추천!

  • 월 – 토 11:00 – 18:30, 일요일 & 공휴일 휴관
  •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441, 송은
  • 무료 관람

[2]
사이먼 후지와라 : WHOSEUM OF WHO?
갤러리현대, ~5/21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사이먼 후지와라, 〈Who’s Whorinal (Golden Days)〉, 2022, UV 프린트, 목탄, 색종이 콜라주, 96 × 68 cm,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사이먼 후지와라, 〈Who’s Nude Beach Panic?〉, 2023, 캔버스에 목탄, 파스텔, 70 × 100 × 2.5 cm,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우리에게 갤러리 집합소로 익숙한 경복궁 옆의 터줏대감 갤러리현대에서 요즘 핫한 일본계 영국 미술가 사이먼 후지와라(Simon Fujiwara)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어. 사이먼 후지와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예술가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델슐레 예술대학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했어(슈테델슐레는 양혜규 작가가 졸업하고 현재 교수로 재직 중인 곳으로 유명해). 그는 자기의 건축적 감각을 이용해 인스톨레이션을 중심으로 한 진지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2010년대부터 국제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어. 2010년 아트바젤 발루아즈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니까(우리나라 강서경 작가가 2018년 이 상을 받으면서 화제가 됐었지).

사이먼 후지와라, 〈Who’s Whobist Femme Hysteria?〉, 2023, 캔버스에 목탄, 파스텔, 120 × 100 × 2.5 cm,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05 사이먼 후지와라, 〈Who La La (Body Positive)〉, 2023, 캔버스에 목탄, 파스텔, 125 × 190 × 2.5 cm,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06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그러던 그가 요즘 완전히 다른 결의 작업으로 세계를 종횡무진하고 있다는 사실. 바로 자신이 창조한 만화 캐릭터인 ‘후(Who)’ 덕분이야. 후는 새하얀 털과 황금빛 심장, 엄청나게 긴 혀를 가진 곰돌이야. 후지와라가 팬데믹으로 인한 봉쇄를 겪으면서 이해할 수 없고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반응에서 태어났다고 해. 이 캐릭터는 인종, 성별 등의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고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오만 곳을 다 쑤시고 다녀. 이 곰돌이를 다룬 연작 〈Who the Bær〉가 2021년 밀라노에 있는 폰다지오네 프라다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처음 공개된 후 국제적으로 호평을 받으면서 이젠 ‘후니버스’라는 세계관으로 확장했어. 콜라주부터 회화, 조각, 실물 크기의 설치 작업,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심지어 ‘후티크’라는 컬래버레이션 상품까지 나오고 있다니까. 한 마디로 팬데믹이 낳은 곰돌이 IP가 후지와라를 스타 아티스트로 만드는 셈인데, 밀라노에서도 후지와라 개인전을 열고 있더라고. 하지만 게으른 나는 가지 못했…그래서 이번 갤러리현대 전시가 다급하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해.

사이먼 후지와라, 〈Nymphéas de Who (Sunset Monogram)〉, 2023, 캔버스에 파스텔, 190 × 190 × 2.5 cm,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08 사이먼 후지와라, 〈Who King Body Free?〉, 2023, 캔버스에 아크릴릭, 목탄, 파스텔, 140 × 140 × 2.7 cm,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이번 전시 콘셉트는 20세기 서양 미술의 걸작을 곰돌이 후가 재구성한 작품들이 소장된 ‘후지엄 오브 후(Whoseum of Who)’의 컬렉션을 보여주는 거야. 모네, 뒤샹, 피카소, 마티스, 워홀, 바스키아 등 우리에게 익숙한 거장의 대표 작품에 나타나는 남성, 여성, 동물, 사물을 변형하고 변신시키며 후의 입맛대로 자유롭게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팝아트를 보는 듯한 경쾌함이 느껴져. 물론 그 저변에는 철학적인 투쟁이 존재하지만. 귀여운 곰돌이가 여기저기 출연하는 모습을 보면 일단 눈길이 가고 매력이 철철 넘치는 걸 어뜨케(역시 21세기는 IP의 시대일까?). 특히 이번 전시에는 팝업 스토어 개념으로 후티크도 열려. 노트북, 가방, 스티커, 포스터, 머그, 티셔츠 등을 파는데 소장 욕구를 꽤나 자극한다는. (흑흑 귀여워) 티셔츠 사이즈가 XL도 있다고 해서 강하게 혹하는 중이야. 이 전시도 강하게 추천을 박아볼게.

2ver10 후티크 전경,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11-side
후티크 티셔츠와 가방,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 화 – 일 10:00 – 18:00, 월요일 휴관
  • 서울 종로구 삼청로14, 갤러리현대
  • 무료 관람

[3]
그 너머_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
성곡미술관, ~5/21 (6/4까지 연장)

3ver1 사진: Ahina 정효섭
3ver2 원계홍, 〈수색역〉, 1979, 캔버스에 유채, 45.5 × 53.2 cm ©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박성훈
3ver3 원계홍,〈골목(까치집)〉, 1979, 캔버스에 유채, 45 × 53 cm ©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안태연

이번 전시는 소개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어. 왜냐면 입장료가 있거든. 근데 입장료가 5000원이야. 커피 한 잔 값으로 전시도 보고 날씨 좋으면 밖에 있는 조각 정원에서 쉴 수도 있으니까 이 정도는 우리 그냥 감내하자. 전시관도 먹고 살아야지. 《그 너머_ 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은 이름부터 무거워 보이는데, 사실 느낌만 그렇지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화가를 다루고 있어. 세속을 등진 채 평생 작업에만 매진했던 원계홍이란 예술가를 기리는 전시야. 이 전시의 매력 포인트는 뭘까? 일단 RM이 다녀갔어. 좋은 전시는 빼놓지 않고 다니는 그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전시니까 아미들 출동해도 괜찮아! 그리고 전시를 치르기까지의 스토리가 아주 복잡다단해. 이 얘기만 들어도 궁금해서 보러 가고 싶어질 정도라니까.

3ver4 원계홍, 〈홍은동 유진상가 뒷골목〉, 1979, 캔버스에 유채, 46 × 53 cm ©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안태연
3ver5 원계홍, 〈장충동 1가 뒷골목〉, 1980, 캔버스에 유채, 60 × 80.6 cm ©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주명덕
3ver6 원계홍, 〈골목〉, 1979, 캔버스에 유채, 50 × 60.7 cm ©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박성훈

1923년 원계홍 화백이 태어났어요. 그는 1940년대에 도쿄로 건너가서 경제학을 배웠는데 사실 그림 배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땡땡이를 쳤어요. 귀국 후 그는 자신만의 아틀리에에서 미술 이론을 독학하면서 정물, 주변 풍경, 서울의 골목길을 그렸답니다. 특히 1970년대 작업한 골목 풍경화는 본격적인 개발 전의 서울 모습을 단순하고 기하학적 구성으로 명료하게 담아내면서도 특유의 우수를 머금고 있었어요. 열심히 그림에만 전념하던 원 화백은 완벽주의자라서 작품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기도 하고 마음에 들기 전에는 남에게 보여주기를 꺼릴 정도였는데요. 1978년 55세가 되어야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에 올랐다고 생각해서 첫 개인전을 열고 이후 두 번째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대외활동을 하려다가 57세인 1980년 심장마비로 급사했어요. 흑흑.

3ver7 1979년 10월 제2회 개인전에서의 원계홍, 사진: 주명덕
3ver8 원계홍, 〈회현동〉, 1979, 캔버스에 유채, 80 × 65 cm ©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박성훈
3ver9 원계홍, 〈장미〉, 1977, 캔버스에 유채, 32.4 × 23.8 cm ©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주명덕

이런 경우, 대개 금세 잊히기 마련이잖아. 그런데 드라마에서 볼 법한 일이 생겼어(원래 현실이 더 드라마인 거 알지?). 주인공은 두 남자야. 김태섭 전 서울장신대 학장과 윤영주 우드앤브릭 회장이지. 먼저 윤 회장은 1984년 공창화랑에서 열린 원 화백 유작전에 갔다가 작품을 보고서 며칠 연속으로 계속 가는 마력을 느꼈다고 해. ‘이런 분 작품은 함부로 흩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원 화백의 부인을 찾아갔어. 먼저 작품 몇 점을 샀고, 유작전이 끝난 후에는 작품을 다 구입해서 미술관을 만들고 싶다는 제안을 했는데 부인은 남편의 흔적이 모두 떠나가는 걸 꺼려서 찬성하다 철회하는 일을 반복했어. 그러다 서로 연락이 끊기고 윤 회장이 크라운제과 대표를 맡으면서 신경을 쓰지 못했지. 그 뒤로도 윤 회장은 화랑이나 미술 경매에 원계홍 화백의 그림이 나오면 있는 대로 사들였다고 해. 하지만 정말 대박은 김 전 학장이야. 1989년에 이사 갈 집을 찾다가 원 화백이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던 집을 복덕방에게 소개받았어. 그때도 원 화백 부인이 계속 살고 있었는데 문간방에 작품을 가득 쌓아놨던 거야. “집보다 그림이 훨씬 좋다”고 말하니까 부인이 기쁜 마음에 더 구경하라고 봉투에 작품 사진을 가득 담아 줬대. 사진을 보면 볼수록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 김 전 학장은 결국 큰 아파트로 옮기는 계획을 포기하고 그 집과 그림 200여 점을 함께 사들여서 지금 30년 넘게 거주하고 있어.

3ver10 원계홍, 〈정물〉, 1975, 캔버스에 유채, 31.3 × 40.5 cm © 원계홍기념사업회
3ver11 원계홍, 〈꽃(글라디올러스)〉, 1974, 캔버스에 유채, 58.3 × 44 cm ©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주명덕
3ver12 원계홍, 〈성북동 골목풍경〉, 1978, 캔버스에 유채, 45.5 × 53 cm ©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박성훈
3ver13 원계홍, 〈골목(양동)〉, 1979, 캔버스에 유채, 60.6 × 50 cm ©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안태연

이렇게 원계홍 화백에 매료된 두 사람은 각자 컬렉팅을 하고 있었는데, 2007년쯤 블로그 글을 통해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됐고 그 후로 계속 교류하다가 이번 전시를 성사했다고 해. 요즘처럼 미술품을 재테크 수단으로 활용하는 시대에 보기 드문 훈훈한 광경이지. 나도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전시 후기를 보면서, 그림이 참 세련됐고, 정서를 건드리는 멋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눈은 다들 똑같나 봐. 온라인에서 호평이 줄을 잇고 있으니까.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원계홍 화백의 작업을 대규모 전시로 볼 수 있을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 꼭 놓치지 말아!

  • 화요일~일요일 10:00 – 18:00, 월요일 휴관
  •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 성곡미술관
  • 관람료: 5,000원

[4]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리움미술관, ~5/28

4ver1 리움미술관 제공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술관은 어디일까? 여러 미술관이 후보에 들겠지만 절대 빠지지 않는 한 곳이 있다면 바로 리움미술관일 거야. 리움은 삼성 패밀리가 모은 최상급의 고미술품, 현대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늘 블록버스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거대한 기획전시를 열어왔어. 사실 기획 전시는 굉장히 힘든 일이야. 방향성도 잘 잡아야 하고, 제대로 준비하고 해외에 있는 작품까지 대여하려면 2년 정도는 기본으로 준비해야 하거든. 그런 면에서 지금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은 리움미술관이 정말 온 힘을 다해서 준비했다는 게 너무나도 잘 보이는 전시야. 2004년 개관한 이래 도자기만을 주제로 기획한 첫 특별전이라 그런가. 도자기 중에서도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백자 중에 명품이란 명품은 모조리 끌어모았어. 어느 정도냐면 국보 18점, 보물 41점 등 국가지정문화재에 속하는 백자 59점 중 절반이 넘는 31점이 전시에 출현해. 국보 10점과 보물 21점이야. 여기에 일본 소재 백자 34점까지 빌려와서 총 185점에 달하는 백자를 선보여. 미술관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전시’라는 슬로건을 붙인 게 백번 이해가 갈 정도야.

4ver2 4ver3 4ver4 리움미술관 제공

전시는 방대한 조선백자를 총 4부로 나누어 보여줘. 1부는 전시의 하이라이트야. 그 이름도 ‘절정, 조선백자’. 국가지정문화재 31점에다가 이에 맞먹는 아름다움을 지닌 백자 11점을 더해서 총 42점의 명품 백자를 한 공간에 모아놨어. 도자기를 360도로 돌면서 자세히 감상할 수 있도록 사방을 유리로 제작한 쇼케이스에 모시고, 작품을 고정하는 지지대로 간소화했어. 어느 정도냐면 전문가들도 지금까지 못 본 모습을 발견할 정도래. 원래 박물관에는 잘 보이는 부분 위주로 진열하곤 하니까 전체 조망이 잘 안 되잖아. 요즘 각광받는 360도 쇼케이스를 42점 모두에 적용한 풍경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라워. 미쳤다, 소리가 절로 나와. 사진이 이 정도인데 실제 가면 어떤 느낌일까, 완전 소름. 최고 명품만 모아놓아서 여기에 담긴 스토리도 어마어마한데 이걸 다 설명하면 에디터H가 내 멱살을 잡을 거야. 이번에 짧게 쓰기로 약속했는데, 이미 지금 망한 것 같으니 조금만 말해볼까…

4ver5 백자청화철채동채 초충난국문 병, 조선, 18세기, 리움미술관 제공
4ver6 백자청화 매죽문 호, 조선, 15세기, 리움미술관 제공
4ver7 백자 개호, 조선, 15세기, 리움미술관 제공

‘백자청화철채동채 초충난국문 병’이라고 있어. 유려한 술병 모양인데, 여기에는 우리나라 백자에서 흔치 않은 온갖 기교가 총망라돼 있지. ‘초충난국문’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국화와 난초, 벌과 나비들이 노는 모습을 표현했는데 이 무늬를 살짝 양각으로 처리했어. 그리고 난초는 청화, 국화는 진사, 국화 줄기와 잎은 철사, 벌과 나비는 철사 또는 진사로 채색했지. 백자에서 쓰이는 여러 안료를 모두 사용하면서 양각의 기교까지 부린 흔치 않은 예야. 이게 또 간송 전형필 선생이랑 연관이 있어. 1936년 경매에서 간송 선생이 1만 4,580원에 낙찰받았거든. 당시 백자로는 최고가를 찍었대. 우리에게 익숙한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68호)에는 2만 원을 지불했거든. 서울 시내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요즘 북촌 기와집 한 채 가격에 대입해 보면 정말 엄청난 가치야. 또 ‘백자청화 매죽문 호’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청화백자 중에서도 그림의 회화적 묘미가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한 최고의 명품인데 개인 소장이라서 언제 어디서 또 볼 수 있을지 몰라. 개인적으로는 순백자인 ‘백자 개호’가 마음에 쏙 들어. 티 없이 고운 백설의 기운에 품격 있는 형태가 끝내주는데 또 개인 소장이야!!

4ver8 백자청화 보상화당초문 잔받침, 조선, 15세기, 리움미술관 제공
4ver9 백자청화 송하호작문 호, 조선, 18세기 말~19세기 초, 리움미술관 제공
4ver10 백자철화 초화문 호, 조선, 17세기 후반, 리움미술관 제공

이런 명품들이 즐비한 1부를 지나면 안료에 따라 2부 청화백자, 3부 철화·동화백자, 4부 순백자가 이어져. 금보다 귀한 코발트를 썼던 청화백자는 특유의 위엄과 품격을 보여주고, 코발트 수급이 어려운 상황에서 등장한 철화백자와 동화백자는 마치 현대미술에서 볼 법한 자유로운 문양과 그림으로 상상력을 자극해. 순백자는 청초한 흰색을 응축한 모습이 매력적이고. 1부에서 도자기 하나당 5분씩 보면 210분이야. 그래서 가볍게 갔다가 충격받고 N차 관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 우리는 이제 시간이 없으니까 체력 충전해서 전시의 엑기스를 뽑아먹도록 하자. 강력 추천이야. 아, 맞다. 내가 예매하려고 하니까 마지막 1주일은 예매 불가로 뜨던데, 홍보 담당하는 분에게 물어보니까 예매 주기가 2주래. 혹시 이 글을 볼 때 마지막 1주일이 예매 안 되면 조금 더 늦게 해봐. 그럼 열릴 거야!!

4ver11 백자동화 연화문 팔각병, 조선, 18세기, 리움미술관 제공
4ver12 백자 호, 조선, 16세기, 리움미술관 제공
4ver13 리움미술관 제공
  • 화 – 일 10:00 – 18:00, 월요일 휴관
  •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리움미술관
  • 무료 관람 (예약 필수)

[5]
다시, 자연에게 보내는 편지
문화역서울284, ~6/4

5ver1 KCDF 제공

아, 이제 마지막이다. 내가 보고 싶던 전시들이라서 그런지 말이 엄청 길어지네. 이번 원고도 또 1만자 넘길 것 같아…이번에는 좋은 전시 많이 하기로 유명한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리는 전시야. 6월 4일까지니까 시간이 넉넉히 남았지만, 늘 바쁘게 살다 보면 잊어버리잖아. 내 리스트에 올린 전시니까 이참에 함께 소개할게. 그리고 이번 전시가 또 역대급으로 커. 여덟 가지 주제 아래 작품 수가 300여 점이야. 그럼, 뭐다? 좋으면 또 가야 하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근데 뭐길래 이렇게 성대하게 할까? 문화역서울284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에서 운영하는 곳이야. 플래그십 전시장이라고나 할까. KCDF는 지난 2012년부터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매년 한국공예전을 열었어. 늘 평이 좋았는데, 작년이 10주년이었던 거 있지. 이를 기념해서 2022년 밀라노 한국공예전 《다시, 땅의 기초로부터》를 재구성하고 이와 주제를 맞춰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돌아가려는 자연에 가까운 공예들을 한국적인 미학의 틀로 소개하는 게 이번 전시의 목적이야. 공예부터 설치, 미디어 등 총 89인(팀)이 참여했어.

5ver2 5ver3 5ver4 KCDF 제공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오는 중앙홀에는 인간이 자연에 전하는 메시지이자 전시 주제가 담긴 메인 조형물이 있어. 보기만 해도 설치가 쩌는데, 탄성이 나올 정도지. 문화역서울284가 옛 서울역 건물이다 보니 공간 자체가 가지는 힘이 굉장히 강력해. 특히 중앙홀은 사방이 다 열려있어서 웬만한 작품으로는 주의를 끌기 쉽지 않아. 그런데 돌을 비추는 거대한 디스플레이 아래쪽에는 낮은 목가구들을 배치하고 색과 조명을 잘 맞춘 덕분인지 오히려 주변 공간과 상생하는 느낌이 들어. 욕심을 버려서 균형을 찾았다고나 할까. 3등 대합실에는 작년 밀라노 한국공예전을 재구성했는데 웅장한 천장과 대비되게 흙에 자연스레 맞닿는 작품들이 땅의 기초라는 주제와 조화롭게 이어져. 나머지 1층에 자리한 1, 2등 대합실과 부인대합실, 역장실, 귀빈실에는 다양한 재료와 물성으로 만든 공예품과 주얼리 및 오브제를 큐레이션했고, 2층에는 신진 작가의 미디어 작품과 유리 공예품을 놓았어.

5ver5 5ver6 5ver7 KCDF 제공

공예가 주제이지만 꼭 전통 공예만 있는 건 아니고, 아트 영역에 속할 수 있는 현대 공예와 다양한 표현 양식의 가구, 오브제 등이 함께 있어서 보는데 지겹지 않을 것 같아. 미디어 작품도 함께 어우러져 있으니 쓱 보기만 해도 다양한 영감이 떠오를 것 같은 전시야! 난 개인적으로 공예를 좋아하기 때문에 꼭 가봐야겠다고 찜해두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오다가다 생각나면 휙 들어가서 전시에 풍덩 빠져봐. 문화역서울284는 일단 장소만으로도 먹고 들어가는 게 있으니 서울 길가에서 느끼지 못하는 독특한 감성을 한껏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

5ver8 5ver9 5ver10 KCDF 제공
  • 화 – 일 11:00 – 19:00, 월요일 휴관
  • 서울 중구 통일로 1, 문화역서울284
  • 무료 관람

아, 너무 길었다. TMI 병을 고쳐야 하는데, 이번에도 실패네. 이제 막차 놓치지 말고 내가 찜한 전시에 꼭 가봐. 가서 좋았으면 의견도 남겨주고! 전시 기획하는 사람들은 관람자 평가에 굉장히 목말라해. 그래서 좋다는 소리 한 마디면 모든 피로가 씻겨나가는 기분이 들 거야. 그러니까 좋은 전시를 보면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랑해 봐! 다음에 또 찾아올게. 안녕~

About Author
전종현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 디자인, 건축, 예술 관련 글을 기고한다. '중소기업을 전전하며 손기술로 먹고산다'는 사주 아저씨의 말을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