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덜 짜증나는 하루를 위한 책 5

베스트셀러 보다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시리즈
베스트셀러 보다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시리즈

2023. 05. 24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도 만들어 보내고 있다).

이사를 했다. 짐이랄 게 별로 없건만, 책 때문에 고생했다. 본격적으로 책장 정리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쉬며 <책 정리하는 법>이란 책을 읽었다. 정리를 시작하려면 일단 버려야 한다. 꽤 버렸고, 좀 더 버려야 한다. 그렇게 고생하고도 새로 나온 책에 자꾸 관심이 간다. 이번에도 다섯 권을 골랐다.


[1]
<트러스트>

“500억 달러어치의 지폐는 지구 주위를 거의 195번 돌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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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에 위치한 소전서림(素磚書林)은 ‘흰 벽돌로 둘러싸인 책의 숲’이다. 입장료가 꽤 비싸지만, 최상급의 독서 환경을 제공한다. 이름처럼 책숲이 울창하다. 널찍한 내부에 편안한 의자도 많아서 책 읽다 졸리면 잠시 눈 붙이기도 좋다. 고민만 하다 작년 가을에 큰 맘 먹고 1년치 회원권을 끊었다. 종종 찾아가서 읽다 졸고, 졸다 읽으며 쉬고 온다.

소전서림에서 ‘이 달의 소설 선발대’를 뽑는다기에 바로 지원 버튼을 눌렀다. 선발대의 임무는 매월 신간 장편소설을 읽고 ‘미래의 고전’이 될 작품을 미리 발견하는 것. 지원서 문항도 이 임무와 관련이 있었다. “미래의 고전이 될 거라 생각하는 작품을 하나 꼽고, 30자 서평을 남겨주세요.” 고전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재밌고, 형식이 참신하고, 시간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고, 오히려 의미가 더 풍부해져야 할 텐데? 최근에 읽은 <트러스트>가 떠올랐다.

배경은 1929년 전후의 월스트리트. 대공황을 기회로 큰 돈을 번 자산가 뒤에 숨겨진 비밀이 하나씩 밝혀진다. 초반 50쪽까지는 살짝 지루하고 딱딱한 느낌이 있지만, 이 고비를 넘어서면서 이야기가 힘을 받기 시작한다. 장편소설, 자서전, 회고록, 일기 등 4명이 쓴 4개의 글로 구성되어 있는데 3부 격인 ‘회고록’부터는 뒷이야기가 궁금해 멈추기가 힘들다.

이 책을 미래의 고전으로 떠올린 가장 큰 이유는 주제다. <트러스트>는 결국 돈과 사랑 이야기다. 돈과 사랑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 ‘베니스의 상인’은 고리대금업자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과 목숨을 맞바꿨다. 욕망을 살살 간지럽히는 돈과 사랑 앞에서 인간은 숭고함 혹은 밑바닥을 드러내고, 작가들의 먹잇감이 된다. (TMI. 소설 선발대로 뽑혔다!)

  • <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지은이), 강동혁(옮긴이) | 문학동네 | 1만 7,000원

[2]
<셔터를 올리며>

“너, 이거 한 그릇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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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뒤에 실린 추천사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앞서 소개한 책 <트러스트>와 <셔터를 올리며> 같은 경우, 두 권 모두 장강명 작가가 추천사를 썼다. 그는 <트러스트>가 던진 ‘깊고 지적인 질문’을 짚어낸다. “진실은 우리의 믿음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밖에 놓인 것일까.” <셔터를 올리며>의 추천사는 첫 문장부터 강하다. “소설가로서 심각한 직업적 위기감을 느꼈다.”

소설가 장강명을 떨게 한 <셔터를 올리며>는 한 집안의 ‘장사 연대기’다. 부모님의 구멍가게 ‘정자교슈퍼’부터 현재 운영중인 ‘해방편의점’까지, 봉달호 저자가 거쳐온 가게는 총 아홉 곳. 책의 부제처럼 이 작은 가게들이 봉달호 저자를 키운 셈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 소년의 성장소설이자, 실패를 모르는 비즈니스맨의 창업기이자,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한국사회가 담긴 기록물이다.

이 책에는 세 사람의 주인공이 있다. 저자 봉달호, 우직하고 성실한 그의 어머니, 그리고 아이디어 넘치는 아버지다. 나주에서 농약을 팔아 집을 마련한 부부는 각자의 스타일을 살려 분식집과 갈빗집, 오리탕집을 연거푸 성공시킨다. 반면에 저자는 쓰디쓴 실패를 경험한다. 어머니의 제안으로 함께 연 술집과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중국에서 연 고깃집은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가게는 얼떨결에 흥하기도 하지만, 어이없이 망하기도 한다. 대학가의 ‘소주장학생’과 중국의 ‘하하호호’처럼. 하지만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그는 어느덧 10년차 편의점주가 되었고, 벌써 책도 네 권이나 펴냈다. 장강명의 추천사를 다시 곱씹어본다. “밥벌이라는 게 뭘까, 가족이란 뭘까, 삶이라는 게 뭘까.”

  • <셔터를 올리며> 봉달호(지은이) | 다산북스 | 1만 6,800원

[3]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중용을 지키면 덜 짜증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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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욕심이 자꾸만 커져 내 방을 집어삼킬 기세다. 책장엔 안 읽은 책이 한가득인데 알라딘 장바구니가 넘쳐난다. 소비 억제를 위해 밀리의서재를 구독 중이다. 책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밀리 앱을 켠다. 눈에 띄는 책을 골라 밀리 앱에 담는다. 터치 몇 번이면 책을 사지 않고도 구매 욕구를 진정시킬 수 있다.

밀리 앱에도 책이 쌓여 장르별로 폴더를 만들었다. 인문사회, 경제경영, 소설, 글쓰기와독서, 그리고 ‘더좋은삶’ 폴더가 있다. 이 폴더엔 시간관리에 대한 책도 있고, 일하는 태도나 건강관리에 대한 책도 있다. 폴더명을 ‘자기계발서’로 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싶은 이유, 일을 더 잘하고 싶은 이유는 ‘발전’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좋은 삶’을 살고 싶어서니까. 더 좋은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된다면야, 철학도 환영이다.

‘더 좋은 삶’에 있어서는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의 저자도 철학자가 아니다. <오피스>, <SNL>, <굿 플레이스> 등 인기 방송을 만든 스타 프로듀서다. 그래서인지 매우 수다스럽고(주석까지 달아가며 농담을 늘어놓는 통에 솔직히 난 좀 지쳤다), 철학 개념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는 인생의 수많은 딜레마를 4개로 압축한다. “뭘 해야 하지? 왜 그렇게 해야 하지? 더 잘할 수는 없을까? 그게 왜 더 나은 행동이지?” 이 4가지 질문의 답을 찾는 것, 그것이 철학이다.

가벼워 보여도 있을 건 다 있다. 수다 속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칸트의 정언명령, 벤담의 공리주의 같은 개념들이 자연스럽게 섞인다. 복잡한 철학 개념을 쉽게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곁에 두고 자주 들춰보고 싶다. 책장 다이어트는 또 실패다.

  •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마이클 슈어(지은이), 염지선(옮긴이) | 김영사 | 1만 8,000원

[4]
<블랙 핸드>

“형사의 이름이 그에게는 일종의 액막이 주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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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형사의 뉴욕 마피아 소탕 실화!” 범죄소설 애호가로서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제목이다. 주인공이 갖은 고생 끝에 나쁜 놈 때려잡는 스토리는 언제나 통쾌하니까. <블랙 핸드>는 1900년대 초 미국 사회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이탈리아계 범죄조직 ‘검은손 협회’에 사실상 홀로 맞선 형사 ‘페트로시노’의 이야기다.

검은손 협회는 비열했다. 자신들처럼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을 주요 타깃으로 삼아 괴롭혔다. 이민자 동네에서 뛰놀던 아이를 납치하거나, 이유없이 가게에 불을 질렀다. 수시로 협박 편지를 보내 24시간 감시받고 있다는 두려움을 극대화했다. 정작 미국 경찰은 이민자 대상 범죄를 해결하는 데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경찰 대부분이 인종차별주의자였다. 1895년 조지프 페트로시노가 이탈리아 출신 최초로 경사 자리에 올랐다. 검은손 협회 입장에서는 안 좋은 소식이었다.

페트로시노는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들의 안전을 사명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사실상 홀로 검은손 협회에 맞선다. 악명높은 검은손 협회도 타고난 그의 힘과 당당함 앞에서는 쩔쩔맨다. 이민자들 입장에서는 구세주가 나타난 셈이다. 한 구두 수선공은 검은손 협회의 협박에 시달릴 때마다 ‘페트로시노…’라고 되뇌며 안정을 되찾을 정도였다. 당시 소시민들에게는 그의 이름이 국가보다 종교보다 훨씬 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범죄조직의 정보를 수집하는 페트로시노처럼, 저자 스테판 탈티 역시 깊숙이 묻혀 있던 자료까지 사정없이 파헤친 모양이다. 집요한 취재는 생생한 문장이 되어 그 시기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 <블랙 핸드> 스테판 탈티(지은이), 허형은(옮긴이) | 문학동네 | 1만 7,000원

[5]
<돈의 말들>

“경기는 점수판만 쳐다보는 선수들이 아니라 시합에 집중하는 선수들이 승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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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출판사는 2017년부터 ‘OO의 말들’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이 시리즈의 저자가 되려면 최소 100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 100권의 책을 읽다 찾은 문장 100개가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절반은 왜 이 문장을 골랐는지, 이 문장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짧게 쓴 쪽글 100개다. 책 100권을 고르고, 그 안에서 문장 100개를 추리고, 걸맞는 글 100편을 쓰는 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겠다. 얇은 책이 맵다.

‘OO의 말들’ 시리즈가 출간된 6년 동안, 여러 단어가 빈칸을 채웠다. 읽기, 쓰기, 태도, 공부, 습관, 여행… 이번엔 돈이다. 김얀 저자는 서른 여덟에 돈 공부를 결심하고 그해에만 100권이 넘는 경제/경영/재테크 책을 읽었다. 그중에서 고르고, 추리고, 썼다. 돈 공부를 시작하고는 싶은데 무슨 책부터 읽어야 할지 막막한 사람에게 딱 좋다. 매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얇다.

저자가 쓴 마지막 100번째 쪽글에 반전이 숨어 있다. “분명한 것은 돈에 관련된 책만 읽어서는 절대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이다. 돈이란 것은 결국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책을 읽으며 접어뒀던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157페이지. “내가 나를 존중하면 타인도 나를 존중하게 된다.” 181페이지. “좋아하는 일이란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자꾸만 생각나는 일이다.” 204페이지. “자신의 힘을 느낄 때, 사람은 쉽사리 겁먹지 않으며 뭔가를 증명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 책에는 얼마든지 다른 제목을 붙일 수 있겠다. <존중의 말들>, <일의 말들>, <용기의 말들>… ‘인생의 말들’이 담겨 있는 이 시리즈를 정주행하고 싶어졌다.

  • <돈의 말들> 김얀(지은이) | 유유 | 1만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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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