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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코와 담배, 와인과 헌책, 카츠와 커피

의외의 조합에 외쳐보는 '오히려 좋아'
의외의 조합에 외쳐보는 '오히려 좋아'

2023. 06. 13

안녕. 난 욕심 많은 객원 필자 김정현이다. 다른 말로 가성비무새, 일석이조 마니아 필자라고 불러도 반박할 수가 없다. 카페이자 패션 편집숍, 서점 겸 위스키 바처럼 한 번에 두 가지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공간에 관심이 가는 건 성향상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봐도 되겠지?

그런 내 레이더에 새롭게 포착된 장소들이 있다. 타코와 담배, 와인과 헌책, 카츠와 커피라는 의외의 조합으로 ‘오히려 좋아!’를 연발하게 만드는 서울 플레이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상업 공간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 좀 더 재밌는 곳 어디 없을까 찾는 분들이라면 주목해 주시길.


[1]
‘타코와 담배’
올디스 타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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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인 분위기의 장소에 놀러 가는 게 해외여행을 대체할 수는 없다. 백날 도쿄처럼 파리처럼 꾸며봐야 여긴 서울이고 한국이고 앞뒤 좌우로 코리안들만 가득하니까. 다만 평소와 다른 생경한 장면은 고만고만한 일상의 틈에 잠들어 있던 감각을 활짝 열어줄 수 있다. 잠깐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도 익숙한 생활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나온 기분. 을지로 한복판에 미국 서부의 타코 집을 옮겨놓은 듯한 올디스 타코가 반가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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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뜬금없이 타코와 담배를 같이? 그 뜬금없음에 힌트가 있다. 카페나 바에서 담배를 파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슈퍼나 편의점이 아닌 식음료 공간에서 담배를 파는 장면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가. 올디스 타코는 안 그래도 이국적인 음식인 타코를 담배와 같이 판매함으로써 한층 생소하고, 그래서 재미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타코를 맛보는 힙스터들 사이로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이 들어와 ‘말보로 하나 주쇼!’ 외치는 풍경이라니. 인쇄소를 비롯한 근처 직장인들이 담배 사러 왔다가 자연스레 비리아 타코로 식사까지 해결하고 가는 일석이조 런치 코스도 가능하다.


©올디스 타코. 사진=@hyunwoobareun

타코의 원조 멕시코에 비해 다양한 소스를 화끈하게 첨가하는 미국 스타일을 참고해, 마장동에서 공수한 양질의 한우를 넣어 한국인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타코를 제공한다. 아주 얇게 슬라이스한 업진살에 수제 살사 소스를 넣은 ‘올디스 타코’와 차돌양지에 비리아 소스와 안쵸 칠리를 넣은 ’비리아 타코’, ‘메가 밤 스낵’과 ‘타코 라이스’까지. 특히 메가 밤 스낵은 미국 도리토스에 업진살과 체더치즈, 토마토, 양파, 고수, 할라페뇨, 각종 소스가 들어간 참으로 독특한 메뉴다. (미국의 ‘Walking Taco’, 멕시코의 ’Dorilocos’에서 착안했다.)

* 참고로 취재일에 메뉴 사진을 직접 촬영하려 했으나 폭발적인 인기에 따른 조기 재료 소진으로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다. 올디스 타코 측의 하이 퀄리티 오피셜 사진으로 대체한다.

아메리칸 바이브 그리고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 이 모든 게 주인장의 취향이다. 90년대 LA에 처음 가본 뒤로 꾸준히 동경해 온 미국 문화와 분위기, 손때 묻은 빈티지 바이브를 사랑하는 주인장의 취향을 듬뿍 담은 이 작은 타코 가게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내부는 협소하고 좌석은 별로 없지만 이 불편함 또한 ‘스탠딩 타코’라는 새로운 경험으로 대체해 보자. 야외 테이블뿐만 아니라 플라스틱 의자, 오토바이 시트, 자동차 트렁크까지 내 타코를 올려놓는 자리가 곧 테이블이라는 기분으로.

올디스 타코

  • 주소 서울 중구 충무로4길 3
  • 영업시간 월-목 16:00-01:00 금-일 14:00-01:00
  • @oldiestaco

[2]
‘와인과 헌책’
헌술방

요즘은 죄다 빠르게 생겨난다. 빠르게 생겨난다는 건 빠르게 사라질 확률도 높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소비하고 경험하는 물건과 공간과 이야기 중에는 반짝 유행이 지나가면 그 빛을 잃어버리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반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되려 세월을 따라 거듭 가치를 더해가는 것들도 있지. 투박한 티크 우드,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든 지갑, 군더더기 없이 단아한 형상의 백자처럼. ‘오래된 시간을 팔아보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성북동 헌술방의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와인과 헌책이다.

성곽 인근 고즈넉한 동네에 위치한 붉은 벽돌 건물. 40년 동안 국시집이었던 자리는 지난해 9월, 보틀숍 겸 와인바로 새로 태어났다. 지하에서는 와인과 헌책을 팔고, 1-3층에서는 와인을 비롯한 주류와 디저트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작은 보틀숍이 나온다. 나무 진열장과 테이블에 정갈하게 배치된 수십 종의 와인과 헌책. 헌책을 판다고 하길래 빈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책이 빼곡하게 쌓여 있는 오래된 책방 느낌일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섬세히 고른 술과 책들을 잘 보존하고 관리한 전시관의 인상에 가깝다. 여기만의 독특한 룰은 와인 한 병을 사야 헌책 한 권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긴 시간 숙성을 거쳐 향미의 깊이를 더하는 와인과 출간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겹겹의 추억을 간직해 온 헌책을 세트로 구매하는 일이라니. 뭐든지 금방 잊히고 대체되는 소비 생활 속에서도 쉽게 휘발되지 않는 경험일 테다.

머무는 내내 꼭 한 번 부모님을 모시고 오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차분하면서도 정감 가는 공간 분위기가 한때 자주 드나들었을 옛 다방을 떠올리게 해줄 것 같아서. 불후의 명곡 ‘낭만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도라지 위스키에서 영감을 얻어 배도라지 청과 라이 위스키로 만든 달콤씁쓸한 칵테일 ‘최백호 패션드’와 한양도성 성곽길을 떠올리며 스모키한 아드벡을 베이스로 아몬티야도 셰리, 드라이 셰리를 넣은 하이볼 ‘정든 성곽에서’는, 술은 약해도 낭만은 빠지지 않는 두 분에게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 줄 것이다.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옆 테이블에 앉아, 메뉴 주문은 꼭 벽걸이 전화기로 할 테다.

와인 한 병 사러 지하 보틀숍에만 잠깐 들렀더라도 꼭 웰컴 드링크를 요청해 보자. 다정한 직원이 계피물에 탄 모카 골드 커피믹스 한 잔을 대접해 준다. 아아, 낭만 그 잡채여.

헌술방

  • 주소 서울 성북구 창경궁로43길 11
  • 영업시간 월-목 16:00-01:00 금-일 14:00-01:00
  • @heonsulbang

[3]
‘카츠와 커피’
커츠

도넛에 커피? 뒤도 안 돌아보고 인정. 전통 약밥에 커피? 갸우뚱하지만 10초만 고민해 보고 인정. 근데 돈카츠에 커피…? 이건 진짜 모르겠다. 기름에 튀긴 돼지고기랑 그윽한 커피를 같이 먹는다니 이 무슨 해괴한 조합인가. ‘먹는 거로 장난 좀 안 쳤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나는 하마터면 커츠 사장님들 앞에서 무릎을 꿇을 뻔했다. 미식의 ‘ㅁ’도 모르면서 편견만 가득했던 소인을 용서하소서.

일단 카츠 얘기부터. 내가 먹은 로스 카츠는 그 자체로 특별한 음식은 아니다. 여기저기 많이 다녀본 건 아니지만 돈카츠 좀 튀긴다는 식당에 갈 때마다 맛있게 먹고 나온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커츠는 좀 다르다. 머리털 나고 먹은 등심 돈카츠 중 압도적 1등이라 표현하면 느낌이 올까? 튀김 1.5 : 고기 8.5 정도로 추정되는 황금 비율을 보고서 먹기도 전에 설렜는데, 한 입 크게 씹자마자 터져 나오는 육즙과 혀 위로 부드럽게 요동치는 살코기는 기나긴 대기시간으로 굳어버린 마음마저 녹여버렸다. 앞으로는 등심에 한해 프리미엄으로 취급되는 한돈 교배종 ‘YBD 원육’을 사용한다고 하니, 히레 카츠(안심)를 먹기 위해 재방문할 때 반드시 동행을 데려와 새로운 로스 카츠도 맛을 봐야겠다.

카츠만으로도 감동인데 거기에 향긋한 필터 커피까지 곁들일 수 있다. 양질의 일식 카츠와 스페셜티 필터 커피를 한 상 차림으로 먹을 수 있는 식당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카츠부 남사장님과 함께 커피부를 책임지는 여사장님이 다년간의 바리스타 경력을 살려 완벽한 입가심을 위한 커피를 제공한다. 3가지 이상의 라인업을 갖춘 필터 커피 외에도 ‘바닐라빈 라떼’는 테이크아웃하는 손님도 적지 않은 사장님 피셜 대표 메뉴라고. 카츠와 커피의 궁합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해 어떻게 두 개를 같이 할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했는데… 답은 간단하다. 둘이 각자 하던 걸 하나로 합친 거. 잘하는 걸 합쳤을 뿐인데 1+1=2는 무슨, 1+1=5의 결과를 내버린 셈이 됐다. 합쳐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커츠

  • 주소 서울 마포구 독막로28길 58 1층 좌측
  • 영업일 인스타그램 계정 참고
  • 영업시간 11:30-15:30, 17:00-20:00
  • @coffee_and_katsu
About Author
김정현

라이프스타일 잡지부터 토크 프로그램까지, 분야 안 가리는 프리랜스 콘텐츠 에디터. 멋있는 사람과 흥미로운 콘텐츠를 소개할 때 제일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