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도 만들어 보내고 있다.)
책 고르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 소개하고 싶은 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이번 달에도 고민 끝에 다섯 권을 골랐다. 단어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포커 플레이어가 들려주는 ‘STOP’ 타이밍 잡기, MBTI가 주제인 단편소설집, 셜록 홈즈를 각색한 그래픽 노블, 어른다움에 대한 45명의 고민까지 꽉꽉 담았다.
[1]
<옥스퍼드 오늘의 단어책>
“언어학자들에게
영어에서 가장 쓰임이 다양한 말을 꼽아 보라고 하면
fuck은 아마 항상 상위권을 차지할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매주 낱말퍼즐을 1개씩 만든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단어 모으기다. 적절한 단어를 발견할 때마다 엑셀 시트에 기록해둔다. 오늘 적어넣은 단어는 다나카다. 예전에 ‘다나까’는 낚시 잘하는 일본인을 의미하는 조크였는데, 이젠 인기 유튜버 이름이 되었다. 그렇게 쌓아둔 단어들을 가로세로로 연결한다. 다나카는 코카인으로, 코카인은 인생네컷으로. 이렇게 단어 20개를 엮으면 퍼즐 하나가 완성된다.
이 책의 저자 수지 덴트도 단어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그는 28년 넘게 옥스퍼드 사전을 만들고 있으며, 영국 퀴즈 쇼에도 28년째 ‘단어 전문가’로 출연 중이다. 그가 매일 소개하는 ‘오늘의 단어’를 보기 위해 113만 명의 트위터리안이 ‘@susie_dent’를 팔로우한다. ‘단어 전문가’ 대선배의 가르침을 얻고자 <옥스퍼드 오늘의 단어책>을 골랐다.
책에는 1월부터 12월까지 날짜별로 총 365개의 단어가 들어 있다. 1월 30일의 단어는 매버릭maverick이다. 영화 <탑건: 매버릭>의 그 매버릭이다. 단어의 유래는 19세기 미국의 대지주 새뮤얼 매버릭이다. 그는 너무 바빠 소를 돌보지 못했는데, 그래서 주인 없이 떠도는 소가 보이면 사람들이 “저기 매버릭 또 한 마리 간다”고 했다. 그후로 매버릭은 ‘사회적 규범에 굴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가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364개 더 있다.
일기 쓰듯 하루에 한 단어씩 읽어도 좋고, 관심 가는 단어부터 읽어도 좋다. 예를 들면 5월 27일의 fuck(삐-)이라든지, 7월 15일의 meme(밈)이라든지, 12월 21일의 cruciverbalist라든지. cruciverbalist는 ‘낱말퍼즐을 푸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1913년 12월 21일은 <뉴욕 월드>라는 신문에 낱말퍼즐이 처음 실린 날이다.
- <옥스퍼드 오늘의 단어책> 수지 덴트(지은이), 고정아(옮긴이) | 윌북 | 19,800원
[2]
<큇 Quit>
“성공은 계속할 수 있는 적절한 일을 선택하고
나머지 일은 포기할 때 거둘 수 있다.”
회사에서 읽긴 좀 민망한 책이다. “자주 그만두는 사람들은 어떻게 성공하는가”라는 부제가 표지에 커다랗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만 읽고 사무실 들어가기 전엔 가방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책의 요지에는 공감한다. 끈기의 미덕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 ‘끊기’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기 쉽다는 것.
물론 끊기는 힘들다. 회사가 힘들고 재미없고 박봉이라도 그만두는 것보다는 참고 다니는 게 훨씬 더 쉽다. 다양한 핑계 뒤에 숨어 결정을 미룰 수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동안 다닌 정이 있어서, 여기만한 데가 없을 것 같아서, 이번 일 마무리 될 때까지만… ‘좀 더 해보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과연 이게 좋아서인지 결정을 미루고 싶어서인지 한 번 더 돌아볼 필요가 있다.
끊기가 중요하다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는 잘 그만둘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책에는 끊기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는 훌륭한 사람들이 제때 그만두지 못해 몰락한 사례가 차고 넘친다. 에베레스트 정상 앞에서 포기하지 못해 목숨을 잃은 사람, 회사의 특정 사업을 접지 못해 큰 손해를 본 사람, 폭락하는 주식을 손절하지 못해 원금이 거의 남지 않은 사람… (그게 나예요)
손절이 어려운 이유는 상황이 변함에 따라 마음도 흔들리기 때문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엔 ‘한번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접죠’였더라도 몇 주 고생하고 나면 마음이 바뀐다. ‘이거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에베레스트도 주식도 똑같다.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기다리면 확 올라줄 것 같은데…’ 그래서 저자는 ‘무조건 중단’ 기준을 미리 세우라고 말한다. “월요일까지 판매량이 200건 이하면 무조건 접는다”, “마이너스 10%가 되면 무조건 판다”와 같은 원칙이다. 원칙대로 이행하는지 감시 및 강제해줄 코치도 필요하다. 원칙을 어기는 것 역시 그만두는 것보다는 쉬우니까.
- <큇 Quit> | 애니 듀크(지은이), 고현석(옮긴이) | 세종 | 21,000원
[3]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그래도 나는 MBTI가 좋아.
누군가를 알고 싶은 마음이라니 기특하고 귀엽잖아.”
MBTI 정도는 밝히고 시작하는 것이 현대인의 매너라고 배웠다. 2023년 2월 현재 내 MBTI는 INTJ다. 잡지 만들던 2016년엔 INFP였고, 스타트업 다니던 2019년엔 ISTJ였고, 작년 추석 가족들이랑 같이 검사했을 땐 ISFJ였는데 오늘 12분을 들여 다시 검사해보니 INTJ가 나왔다. 결국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딱 2개뿐이다. 첫째, 확실히 난 I다. 둘째, 그 외에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이 책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은 MBTI의 확실함과 확실하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다. 누가 MBTI를 물었을 때 “진심으로 나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보다 유튜브 쇼츠 보듯 지나가면서 짧게 파악하고 싶은 마음”으로 여겨 얄미워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누군가를 알고 싶은 마음”으로 여겨 귀여워하는 사람이 있다. 소개팅에서 “INTJ만 아니면 돼요”라고 말하는 상대를 만나 좌절하는 INTJ가 있고, 면접에서 “MBTI가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사실대로 대답했다가 불합격한 INFJ가 있다.
여섯 편 모두 나름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무래도 나랑 MBTI가 같은 사람들이 전면에 등장할 때 몰입해서 읽게 된다. 평소의 나와 비슷한 점이 보이면 반갑고, 뜻밖의 행동을 하면 나도 그랬던가 돌아보게 된다. 내가 가진 4개의 MBTI 중 ISTJ와 ISFJ는 다뤄지지 않아 살짝 아쉬웠는데, 책 뒷날개를 보니 같은 시리즈가 2권, 3권으로 이어질 예정이라 한다. 슬쩍 보니 ISTJ도 ISFJ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이주란 작가의 이름도 있다. 그는 ISFP다. 또 사 읽게 될 것 같다.
-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 정대건, 임현석, 서고운, 이유리, 이서수, 김화진 | 읻다 | 15,000원
[4]
<셜록 홈즈의 머릿속: 검은 마술사의 초대장>
“제가 관심을 가질 사건이라도 있는지, 허드슨 부인?”
유명한 원작을 각색하는 건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원작을 좋아하는 팬들과 원작에 큰 애정이 없는 일반 대중 둘 다 만족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원작을 어설프게 바꿨다가는 “원작을 망쳐놨다”는 팬들의 원성에 시달려야 한다. 그렇다고 원작에 충실하려다 보면 바로 “지루하다”, “새로움이 없다” 같은 반응이 나온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는 ‘유명한 원작’에 해당된다. 원작을 그래픽노블로 각색한 <셜록 홈즈의 머릿속>은 까다로운 일에 도전한 셈이다. 그런데 장강명 작가는 이 책을 추천하며 이렇게 썼다. “와, 이건 셜록 홈즈를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싫어하는 사람조차 사랑할 수밖에 없는 책이잖아.”
그 비결은 제목에 있다. 원작의 매력을 논할 때 ‘셜록 홈즈’의 천재적인 두뇌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그의 ‘머릿속’에 집중한다. 단서를 찾기 위해 발휘하는 묘기 수준의 관찰력과, 100개 넘는 복잡한 정보들을 조합해 진실에 다가가는 추리 과정이 방탈출 카페에 온 것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줄글에 의존했던 코난 도일은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여러분도 잘 아는 드라마 <셜록> 역시 원작을 훌륭히 각색해낸 바 있다. 홈즈의 추리력을 시각화한 영상 편집은 원작 팬과 대중 모두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책은 한 발 더 나아가 독자를 추리에 참여시킨다. 특정 페이지를 불빛에 비춰보라고, 책장을 둥그렇게 말아보라고 지시한다. 홈즈가 왓슨에게 명령하듯. 원작자 코난 도일도, 드라마 각본을 쓴 스티븐 모팻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 <셜록 홈즈의 머릿속: 검은 마술사의 초대장> | 시릴 리에롱, 브누아 다앙(지은이), 최성웅(옮긴이) | 신북스 | 18,000원
[5]
<어른 이후의 어른>
“그게 저를 가장 저 자신처럼 느끼게 만들어준 것 같아요.
가장 어른처럼이 아니라요.”
언제부턴가 ’잘 모르거나 미숙한 초보자’를 가리켜 ‘-린이’라 한다. 주린이는 주식 초보, 헬린이는 헬스 초보. 어린이는 억울하다. 잘 모르거나 미숙하기는 어린이나 어른이나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주린이, 헬린이는 있어도 주른, 헬른이 없는 이유는 어른도 별 거 없다는 걸 다들 인정하기 때문 아닐까.
법적 미성년자를 벗어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나 역시 별 거 없다. 여전히 허니버터칩과 꼬북칩 사이에서 고민하고, 창피할 땐 귀가 빨개지고 눈물이 맺힌다. 10대 때에 비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어른다워야 한다는 압박감만 점점 더 커진다. 어른답다는 게 대체 뭐길래? 밥먹을 때 예능 대신 뉴스 보고, 여행갈 돈 아껴 주택청약 넣고 뭐 그러면 뿅 하고 어른이 되는 건가?
저널리스트 겸 심리치료사라는 그럴 듯한 커리어를 보유한 저자도 같은 고민을 했다. ‘어른이 되고 싶은데, 어른이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어른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어.’ 답을 찾기 위해 10대 학생부터 90대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당신은 어른인가요?” 공통 질문을 시작으로, 상담실에 같이 앉아있는 듯 생생한 인터뷰가 책을 덮을 때까지 이어진다.
45명의 인터뷰이는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른다움을 정의한다. 누구는 “자기 똥오줌은 가릴 줄 아는 것”으로, 누구는 “돌아가신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참고 견디는 것”으로.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어른다움’은 73세 인터뷰이의 말이다. “어른이란 자신이 언제나 더 발전할 수 있고, 인생을 사는 동안 그 길에는 끝이 없다는 걸 아는 능력을 내면에 지닌 사람이에요. (…) ‘어른이 되었다’라고 불리는 궁극적인 상태 같은 건 없다고 봐요. 그건 하나의 과정이고, 운이 좋으면 우린 그 과정을 계속할 수 있죠.”
- <어른 이후의 어른> | 모야 사너(지은이), 서제인(옮긴이) | 엘리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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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