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겨울잠을 위한 취미활동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2022. 12. 20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도 만들어 보내고 있다.)

연말이 되면 눈과 손이 바쁘다.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는 ‘올해의 책’ 리스트를 장바구니로 옮기고 나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내 개인적인 리스트를 꼽아보는 것도 빠뜨릴 수 없는 행복이다. 올해 나온 책 중 가장 재밌게 읽은 소설은 장강명의 <재수사>, 비소설은 마이클 레비턴의 <라이어 라이어 라이어>다. 모두 디에디트에 소개한 책이다.


[1]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1>

“대학에 가면 다 좋아진다고… 믿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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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지 작가가 <며느라기>로 SNS를 뒤흔든 건 2017년이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6년 전, 그는 이미 대한민국 창작만화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때 그 수상작이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다. 단편이었던 만화를 확장해 새롭게 장편 연재를 시작했다. 저자가 그만큼 오랫동안 품어온 이야기다. <며느라기>, <GONE> 이후 새 작품을 기다려온 팬 입장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배경은 고등학교다. 주인공은 반장 이아랑과 그의 친구들. 저자는 아랑이처럼 말 잘 듣는 학생이었다. 선생님이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는. 그래서인지 학교 배경의 다른 만화, 드라마와 달리 로맨스나 학교폭력 같은 ‘대형사고’는 벌어지지 않는다. 대신 시도 때도 없이 과속방지턱이 나타나 자꾸만 신경을 긁는다. 우리도 안다. 고민 없는 고등학생은 없다.

2학년이 된 아랑, 연두, 하은은 친한 친구지만 각자 말 못 할 고민을 품고 있다. 반장이 된 아랑은 일하느라 바쁜 엄마가 야속하다. 연두는 친구들이 자기를 모범생으로 보는 게 싫다. 하은은 열심히 하는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 밖으로 꺼내놓을 수만 있다면 별것 없는 고민들인데 꺼낼 수가 없다. 속마음 말풍선이 자주 등장할수록 고민은 안에서 곪는다.

돌아보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다. 약한 내가 드러날까 봐, 약한 니가 상처받을까 봐. 못난 날 인정하기 싫어서, 못난 널 용서할 여유가 없어서. 책장을 넘기다 손을 베이듯 친구들의 악의 없는 말 한마디에 여린 마음이 자꾸 베이곤 했다. 저자는 이 만화를 가능한 길게 그려서 “독자들이 아랑, 연두, 하은과 친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읽다 보면 그 시절의 나와도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1> 수신지 | 귤프레스 | 2022.10.28 | 15,000원

[2]
<도토리 문화센터 1>

“모든 일에 제자리를 찾아주려고 애를 쓰면 사람이 미쳐버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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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화다. 웬만하면 장르가 겹치지 않도록 다섯 권을 고르는데 이번 달은 어쩔 수 없었다. <며느라기>, <어쿠스틱 라이프> 작가의 후속 작품이 나왔는데 어떻게 둘 중 하나만 고를 수가… <도토리 문화센터>는 10년 넘게 일상툰을 연재해온 난다 작가의 픽션이라 특히 더 궁금했다.

“취미는 인간을 아둔하게 만들 뿐입니다.” 유마트 총괄사업부 부장 고두리는 반취미주의자다. 그런 그가 도토리 문화센터에 잠입한다. 돈 안 되는 문화센터를 허물고 신개념 쇼핑센터 ‘The 유레카’를 세우려는 사장의 큰 그림 때문이다. 그러나 쇼핑센터 부지를 소유한 몇 명이 땅을 팔지 않아 프로젝트가 홀드된 상태. 고부장에게 막중한 미션이 주어진다. ‘높은 가격을 제시해도 좀처럼 설득되지 않는 네 사람을 공략하라!’ 첫 번째 타깃은 사군자 교실의 고인물 정중순. 고부장은 티 나지 않게 그에게 접근하는데…

뭔가 음모와 비밀이 가득할 것 같은 스토리에서 <재벌집 막내아들>을 떠올렸다면 착각이다. <어쿠스틱 라이프>를 볼 때처럼 보는 내내 흐뭇하고 따뜻하다. 첫째는 변함없이 귀여운 난다 작가 특유의 그림체 덕분이요, 둘째는 다양한 인물들의 예쁜 마음 못난 마음을 넓은 품으로 안아주는 시선 덕분이다. 한 발 더 가까이 가면, 한마디 더 들어보면 비로소 각자의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만큼 인생은 더 재밌어진다.

고부장의 타깃 리스트엔 아직 세 명이 더 남았다. 수예교실 강사 지옥길, 갱년기 극복 교실 수강생 모미란, 행적이 묘연해진 시 쓰기 교실 수강생 송수지. 고부장은 미션을 완수할 수 있을까. 아님 이 사람들을 만나 미션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새롭게 이해하게 될까.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 <도토리 문화센터 1> 난다 | 문학동네 | 2022.11.18 | 16,000원

[3]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독자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이거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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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한다. 삐딱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난 영화를 빨리감기로 본 적이 없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2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해야 할 일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 단 2시간 만이라도 심심하고 싶을 때 영화를 본다. 빨리감기는 심심할 시간을 뺏는다. 심심할 시간을 뺏는 놈은 스마트폰 하나로도 충분하다.

시간을 뺏기기 싫은 건, 영화를 빨리감기로 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2시간을 뺏기기 싫어 대신 10분 요약 영상을 본다. 영화를 이해하는 데 시간을 뺏기기 싫어 해석본을 미리 찾아 읽거나 아예 이해하기 쉬운 영화만 본다. 대사 없는 일상적인 장면은 스킵한다. 심심할 시간이 필요한 나나, 빨리감기로 시간을 아끼는 사람들이나 결국 문제는 똑같다. 시간이 없다.

이쯤에서 하나 더 고백한다. 나도 영화 볼 때 빼고는 기를 쓰고 시간을 아낀다. 드라마나 예능은 하이라이트 클립 몇 개만 챙겨본다. 아는 척하기엔 그걸로 충분하다. 응원하는 야구팀이 있어도 결과를 확인한 후 이긴 경기 득점장면만 다시 본다. 패배가 가져다주는 스트레스가 내 시간을 지배할 수 없도록. 팟캐스트는 1.25배속으로 듣는다. 톤이 높아지고 말이 랩처럼 들려도 금방 익숙해진다. 어쩌면, 영화는 딱 하나 남은 ‘빨리감기 청정구역’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이렇게 시간이 없을까, 하고 생각할 시간도 없다. 그냥 그렇게 산다. 저자의 말처럼 이것이 ‘트렌드’라면 거스를 수 없다. 트렌드를 거스르는 데에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니까. 조만간 나도 영화를 빨리감기로 볼 것이고, ‘심심한’이라는 형용사는 사라질 것이다.

  • <영화를 빨리감기로 보는 사람들> 이나다 도요시 | 현대지성 | 2022.11.10 | 15,500원

[4]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그림자 개는 시간과 마음의 연결이 약해진 사람들에게 나타나 산책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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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는 멀티버스다. 채널마다 각자의 세계가 있다. 한 사람이 세계를 몇 개씩 만들기도 한다. 알고리즘은 다양한 세계로 나를 데려다 놓고, 가만히 앉아서 다양한 세계를 간접 경험할 수 있다. 훌륭하다. 하나 아쉬움이 있다면, 나랑 안 맞는다는 거. 유튜브의 MBTI는 E로 시작할 것 같다. 볼수록 기가 빨린다.

소설도 멀티버스다. 소설마다 각각의 세계가 있다. 소설을 읽으면 소설가가 만든 세계를 간접 경험할 수 있다. 소설의 MBTI는 I로 시작할 것 같다. 시끄러웠던 마음이 볼수록 편안해진다. 하나 아쉬움이 있다면,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거. 그럼에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를 빨리감기로 보는’ 세계에서, 난 맛있는 동네 떡볶이집이 오래오래 장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읽는다.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는 박솔뫼 작가가 만든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동면을 한다. 동물들의 동면은 ‘겨울잠’이지만 인간들은 계절과 상관없이 “신체적 정신적 회복이 필요할 때” 동면할 수 있다. 동면하려면 가이드를 구해야 한다. 잘 자고 있는지 수시로 들여다봐 줄 사람이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시온, 태식, 태인, 허은 등은 동면이 인연이 되어 만난 사람들이다. 이들의 관계는 나와 주변 사람들의 관계와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비슷하다. 박솔뫼 작가가 만든 세계 또한 내가 사는 세계와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비슷하다. 이 문장은 특히 더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그와 함께 서울의 한국의 겨울은 점점 혹독해졌으므로 대부분의 사람은 회복이 필요하게 되었다.”

  •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박솔뫼 | 스위밍꿀 | 2022.10.30 | 12,000원

[5]
<라이프 인사이드>

“교도소가 무서운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돌덩이로 만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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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도 하나의 세계다. 근데 이제 우리가 잘 모르는… 저자 앤디 웨스트는 교도소를 잘 안다. 아버지와 삼촌, 형이 모두 오랫동안 교도소 생활을 했다. 물론 그도 교도소 내부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아버지, 삼촌, 형만큼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 중에, 그가 아는 것도 있다. 가족들을 여러 차례 교도소에 보낼 때의 절망감, 자신은 교도소 밖에 있다는 걸 깨달을 때의 죄의식. “나도 언젠간 그들처럼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갇힐 거야.”

그는 절망감과 죄의식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을 만나 철학 강의를 한다. 강의라기보다는 대화다. 묻고, 듣는다. 재소자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답을 내놓고, 되묻기도 한다. 저자는 관찰하고 기록한다. 이 책은 강의록이라기보다 대화록이다.

그가 교실에서 던지는 질문은 독자에게도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굴러떨어질 걸 알면서도 돌덩이를 밀어올리는 시시포스의 태도는 순응일까 반항일까? 강 한가운데에서 개구리 등에 올라탄 전갈은 왜 같이 빠져죽을 걸 알면서 개구리 머리에 독침을 쏠까? 기대했다 실망하는 게 더 괴로울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왜 희망을 가질까?

저자에 따르면, 교도소에서 가장 반항적인 행동은 폭력도 단식도 아니다. 바로 철학적 대화다. 교도소는 그들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재소자들은 이름이기 전에 숫자이고, 이동하는 게 아니라 배송(shipped)되고, 식사시간은 먹이시간(feeding time)이라 불린다. 철학 강의를 참관하던 교도관이 새삼 놀란 이유다. “재소자들이 하는 말들이 너무 흥미로워요.” 저자의 철학 강의는 재소자뿐 아니라 교도소 전체를 바꾼다.

  • <라이프 인사이드> 앤디 웨스트 | 어크로스 | 2022.11.4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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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