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객원 에디터 김은아다. 청량한 라거보다 구수한 에일이 생각날 때, 짜릿한 산미의 화이트 와인보다 오크향 은은한 레드 와인이 끌릴 때 깨닫는다. 아, 가을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 장바구니에 이런 와인들을 채워넣는다.
오 봉 클리마 산타 바바라 피노누아, 4만 원대
알면 알수록 깊어지는 것이 피노누아의 세계라던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피노누아의 테이스팅 노트에는 참으로 다채로운 단어가 등장한다. 딸기, 라즈베리(오케이, 여기까지는 무난함), 계피, 홍차, 카라멜(음, 알 것 같음), 젖은 낙엽, 흙, 가죽, 그리고… 담배? 급기야 내가 지금 와인에 대한 설명을 읽고 있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사실 이 폭넓은 스펙트럼이 바로 피노누아의 장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향긋하게 피어나면서 다른 느낌을 보여준다는 뜻이니까. 동시에 여리여리함과 묵직함을 함께 느껴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여름과 겨울의 길목 사이에 입는 트렌치코트 같은 와인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오봉클리마는 초보자에게 피노누아의 세계를 열어주기에 좋은 와인. 밝은 붉은빛의 와인을 한모금 마시면 딸기와 라즈베리의 경쾌함, 정향의 스파이시함, 바닐라의 부드러움과 아니스꽃의 향긋함이 차례로 밀려온다. 복합미란 이런 걸까? 낯선 단어가 머릿 속에서 선명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켄달 잭슨 빈트너스 리저브 샤르도네, 3만 원대
덕후라면 공감할 것이다. ‘최애’는 아이디와 비밀번호에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나는 종종 아이디를 만들 때 ‘블랑’을 넣곤 한다. 침이 고일듯 새큼한 산미의 소비뇽 블랑이 내 최애 와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찬바람이 한 줄기 불어오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눈을 돌리게 된다. 은은한 오크향과 바닐라가 우아하게 어우러지는 샤르도네로.
날아갈 듯 가녀린 샤르도네, 찰나의 숙성으로 푸릇푸릇한 샤르도네, 꿀처럼 끈적한 샤르도네… 샤르도네의 세계도 천차만별이지만 ‘가장 미국다운 샤르도네’를 찾는다면 이만한 와인이 없다. 생산자인 잭슨 패밀리는 파격적인 혁신(직접 포도 농사를 짓지 않고, 다른 농장의 포도를 구입해 와인을 만드는 등)으로 미국 와인계에서 굴지의 자리에 올랐는데, 사실 한국에서 이 와인이 알려진 건 다른 사람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평소에 즐겨 마시는 건 기본이고, 이리저리 선물한 덕분에 ‘오바마 와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덕분에 한동안 와인 보틀에는 그의 얼굴이 그려진 스티커가 붙기도 했다. 혹시 오바마도 아이디에 ‘KJ’를 넣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데일리로 마시기에 조금 부담스럽다면, 같은 생산자의 엔트리 와인인 켄달 잭슨 ‘아방(Avant)’ 샤르도네(1만 원대)로 시작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투핸즈 날리 듀즈 쉬라즈, 4만 원대
‘작년에는 이 무거운 걸 어떻게 입고 다녔지?’ 생각했던 코트가 몸에 착 감기는 계절. 가볍고 산뜻한 것에만 반응하던 입맛도 조금씩 묵직한 맛에 끌리기 시작한다. 그럴 때는 꽤나 의젓한 무게감을 갖춘 호주 쉬라즈를 골라보자. 오늘의 픽은 투핸즈의 날리 듀즈. 투핸즈는 호주의 대표적인 와인생산자로 꼽히지만,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지는 이제 겨우 20년이 좀 지났다. 몇 백 년 전통을 가진 와이너리, 대를 물려 받은 생산자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와인업계에서는 어린이와도 같은 나이. 그렇지만 그 짧은 시간에 와인 애호가들은 물론이고 내로라하는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니 오히려 실력이 남다르다는 반증 아닐까? 참고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이들을 향해 “남반구 최고의 와인메이커”라는 극찬을 날렸다고.
날리 듀즈는 다른 와인들과 다르게 검은색의 묵직한 병에 담겨있는데, 맛도 색도 꼭 그렇다. 짙은 보랏빛을 띄는 와인은 블루베리와 블랙베리처럼 검은 과실향에 후추와 감초의 진한 아로마를 느낄 수 있다. 12개월 동안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숙성한 덕분에 다크 초콜릿의 묵직함까지 탄탄하게 받쳐준다. 숯향이 밴 스테이크나 양갈비처럼 무거운 육류요리에 곁들이면 조화롭다. 그래서 가을밤 캠핑과도 꼭 어울리는 와인.
칼 뢰벤 알테 레벤 리슬링, 4만 원대
리슬링은 봄과 참 잘 어울린다. 화사한 꽃과 상큼한 시트러스향이 어우러져, 꼭 꽃이 만개하는 봄날의 공기를 마시는 듯한 기분이 드니까. 그런데 리슬링이 숙성을 만나면, 가을을 위한 와인이 된다. 복숭아나 멜론이 잘 익었을 때 느껴지는 농익은 맛과 꿀의 달콤함이 수확의 계절과 어울리는 풍요로운 느낌을 주는 덕분이다.
리슬링으로 유명한 산지로는 프랑스 알자스, 오스트리아와 함께 독일의 모젤이 꼽힌다. 칼 뢰벤은 독일 모젤에 위치한 와이너리인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리슬링 포도밭을 소유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 밭의 존함은 ‘막시민 헤렌베르그’로, 이곳의 포도나무는 수령이 130세에 이른다고. 모젤에서 가장 좋은 리슬링 나무를 옮겨 심은 곳이 이 밭이란다. 알테 레벤 리슬링은 이 어르신 밭의 포도로 만든 와인은 아니지만, 이렇게나 리슬링에 진심인 생산자가 만든 만큼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한다. 보통 리슬링은 아주 짧은 숙성을 거치지만, 이 와인은 100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숙성하는 것도 특별한 점. 그 기간 덕분에 잘 익은 살구와 파인애플의 달콤함과 함께 리슬링 특유의 페트롤향을 느낄 수 있다. 한 것도 없는데 왜 벌써 연말이지… 하는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는 풍요로운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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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일로 여행하고, 취미로 술을 씁니다. 여행 매거진 SRT매거진 기자, 술 전문 뉴스레터 뉴술레터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