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에디터B다. 트로트 뮤지션이 마블스튜디오에 입사한 건지 요즘 마블은 계속 사랑에 대해 말한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말하는 가장 큰 가치도 사랑이었다. 완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느끼는 사랑과 상실이 시나리오의 갈등이자 동력이었다. <토르: 러브 앤 썬더>(이하 ‘러브 앤 썬더’) 역시 그렇다. 또 비슷한 얘기를 한다는 점에서 실망감을 느꼈다.
매드몬스터가 말했듯 이 세상에는 ‘미and움’이 너무 많고 더 많은 ‘사and랑’이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새로움이 없다는 점에서는 김이 샐 수밖에 없다. <러브 앤 썬더>는 마블에게 기대하는 유쾌함, 위트, 액션은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 슬슬 지겹다는 느낌이 든다.
*주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음.
줄거리부터 짧게 설명해보겠다. 한 아버지가 사막에서 죽어가는 딸을 힘없이 지켜보고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고르(크리스찬 베일). 부녀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그들이 믿는 종교는 절망적인 상황에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딸을 잃은 고르는 우연히 그가 믿는 라푸 신을 만나게 되지만, 신은 신봉자들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 순간 우주의 모든 신을 죽일 목적으로 만들어진 ‘저주의 검’ 네크로소드가 고르를 선택하고, 고르는 신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토르: 러브 앤 썬더의 메인 빌러 ‘고르’]
한편 토르(크리스 햄스워스)는 무기력한 상태다. 엄마, 아빠, 동생, 친구 등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며 친한 동료와도 벽을 두고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헤어진 연인 제인 포스터(나탈리 포트만)를 만나게 되는데, 제인 포스터는 암 투병을 하다가 묠니르의 선택을 받은 후 히어로 ‘마이티 토르’가 되었다. 토르는 마이티 토르와 함께 신 도살자 고르를 막기 위해서 팀을 꾸린다.
[토르와 함께 제인 포스터, 발키리, 코르그가 함께 팀을 꾸린다]
<러브 앤 썬더>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첫 번째는 사랑이고, 두 번째는 신이다. 사랑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가 얘기하고 일단 신에 대해 살짝 떠들어보자. 영화에는 온갖 신이 등장한다. 이집트 신, 북유럽 신, 그리스 신, 심지어는 만두 신도 있다. 그리고 토르를 제외한 모든 신은 이기적으로 그려진다.
토르와 친구들은 신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신이 모여 있는 회의에 참석하게 되는데, 회의 모습이 가관이다. 그들은 인간 세상의 시련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쓸 생각이 없고, 오직 어떻게 ‘광란의 파티’를 보낼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 회의를 주관하는 제우스(러셀 크로우)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멋있게 보이고 싶은 욕심만 있을 뿐 토르를 도와줄 생각이 없다. 고르가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감정을 토르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배신감의 크기에는 큰 차이가 있겠지만)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도 그랬듯이 비슷한 위기에서 히어로와 빌런은 극복 방법이 다르다. 완다가 사랑을 얻지 못해서 흑화될 때, 닥터 스트레인지는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세상을 구하는 쪽을 선택했다. <러브 앤 썬더>도 그렇다. 토르와 고르 둘 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신에게 배신 당했지만, 세상을 파괴하기보다는 구하는 쪽을 선택한다.
자, 이제 두 번째 키워드 ‘사랑’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자. 바로 위에서 나는 ‘토르가 세상을 구하는 쪽을 선택했다’라고 썼는데, 여기서 ‘세상’을 사랑이란 단어로 대체할 수도 있다.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고르는 마침내 목표를 달성할 뻔한다. 단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게 되었고,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신을 죽여달라’는 말만 하면 그 옆에 있는 토르뿐만 아니라 모든 신이 죽게 된다. 하지만 그는 우주를 파괴하는 소원을 빌지 않고, 죽었던 딸을 살리는 소원을 빈다. 고르가 그런 선택을 하도록 만든 건 토르의 말과 행동이다. 토르는 죽기 전에는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고 싶다며 암으로 죽어가는 제인에게로 간다. 그리고 고르에게 말한다. “사랑을 선택해.” 토르가 사랑을 선택하는 걸 직접 보여줌으로서 고르 마음 속에 있던 선한 마음을 툭 건드린 것이다.
<러브 앤 썬더>는 선택에 대한 영화다. 주요 인물들은 갈림길에서 중요한 선택을 한다. 고르의 마지막 선택뿐만 아니라, 제인 포스터의 선택도 그렇다.
제인은 암 환자로 힘든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데, 묠니르의 부름을 받고 뉴 아스가스드 땅에 도착해 묠니르를 손에 쥐게 된다. 묠니르를 손에 쥐니 죽어가던 제인에게는 힘이 샘솟는다. 그것으로 병이 나을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묠니르에 의존하면서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힘은 잃어갔기 때문이다. 결국 토르는 고르와의 마지막 싸움이 힘겨울 것으로 예상되면서도 제인에게 더이상 묠니르를 들지 말고 치료에 전념하라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인은 얌전히 치료를 받는 것을 선택할 것 같지만 결국 다시 묠니르를 들고 토르를 돕기 위해 전장으로 간다. 치료보다는 우주를 구하는 걸 선택한 거다.
나는 <러브 앤 썬더>를 보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책이 떠올랐다(제목만 알고 읽지는 않았다). 색의 유무가 캐릭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네크로소드를 쥔 고르에게는 색이 없다. 그는 회색과 검은색 그사이에 존재한다. 덕분에 MCU에서 본 적 없는 액션씬이 나온다. 영화 후반부에서 흑백 전투씬이 나오는데 그 장면은 내가 생각하는 <러브 앤 썬더>의 가장 멋진 장면이다.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N차 관람을 할 용의가 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마지막 전투에 버금가는 명장면이다. 더불어, 크리스찬 베일이 맡은 고르는 마블의 역대급 빌런이다. 배우의 연기는 물론이고, 서늘하고 공포스러운 캐릭터 디자인과 입체적인 서사, 네크로소드를 휘두르는 액션까지 완벽하다. 모든 색과 빛을 빨아들이는 전장에서 드문드문 빛나는 스톰브레이커와 묠니르가 꽤 아름답다.
“마음 둘 곳 없을 뗀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보라고.” 영화 초반 토르에게 하는 스타로드(크리스 프랫)의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눈을 보라고 한 이유는 눈에 진심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색을 빼앗기고 흑화된 고르의 눈도 마지막까지 빛나고 있었던 걸 보면 고르가 왜 마지막에 사랑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다. 네크로소드가 슬픔과 증오를 증폭시켰지만 딸에 대한 그리움까지는 빼앗지 못했던 게 아닐까.
아쉬운 점을 몇 개 말하긴 했지만 역시 마블은 마블이다. 기본 이상의 재미를 준다. 때리고 부수는 액션씬부터 다양한 히어로의 케미 그리고 점점 넓어지는 세계관의 확장. 전작인 <토르: 라그나로크>에 비교하자면 오히려 심심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전작을 봤다면 <러브 앤 썬더>도 역시 충분히 재밌게 볼 수 있을 거다. 제우스, 헤라클레스 등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한판 붙게 될 다음 시리즈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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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