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에디터B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공식적으로 해제된 지 10여 일이 지났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여전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9시가 아니라 12시에 헤어지는 모습이 낯설고, 새벽에 택시를 잡으려는 모습이 어색했다. 너무 오래 거리를 두었기 때문인지 늦은 밤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어제는 오랜만에 레스토랑에서 술을 마셨다. 인원수는 7명. 그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 건 2년 만에 처음이었다. 잔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는 친구와 건배를 할 때, 한 사람의 말실수를 여섯 명이 하이에나처럼 물어뜯을 때, 잊었던 감각을 찾는 느낌이었다. 나도 이런 대규모 모임을 좋아했었는데, 왁자지껄한 느낌을 사랑한 적이 있었는데 그동안 너무 잊고 지냈구나. 그렇게 나도 조금씩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적응 중이다.
다시금 봄이 왔고, 술의 계절이 왔으니 그에 걸맞은 훌륭한 마무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술이 한 권의 소설이라면 해장은 작가의 말이다. 작가의 말 없이 소설이 끝나지 않듯, 우리에겐 좋은 해장이 필요하다. 술을 사랑하는 여덟 명의 해장 취향을 모았다.
햄버거 / 디에디트 에디터B / @summer_editor
나는 오래전부터 햄버거로 해장을 했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고 유행해서 따라한 것도 아니다. 저절로 그러하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숙취로 고생하던 어느 날 신선한 바람을 폐에 공급하기 위해 캠퍼스를 좀비처럼 서성였고 그 부근에 롯데리아가 있었다. 데리버거 세트와 팥빙수 하나를 먹었다. 그게 나의 첫 ‘버거 해장’이다. 나는 원체 뜨거운 국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고, 해장 메뉴를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뜨거운 국물이 속을 시원하게 씻어내 준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모르고, 어젯밤 알코올과 안주가 남은 자리에 뜨거운 물을 붓는 건 더부룩함에 불쾌감을 더하는 행위였다. 주당들이 썰을 푸는 콩나물국밥과 복국의 화려한 무용담 같은 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햄버거는 달랐다. 뱃속에 음식물을 넣는다는 건 햄버거도 다를 바 없지만 어쩐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중화시켜준다는 기분이 들었다(비과학적이라 죄송합니다). 알코올 분해에 도움이 된다는 아스파라긴산과 비타민B, 비타민C는 아마도 데리버거에는 1mg도 없었을 것이다. 팥빙수에도 없고, 콜라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숙취엔 햄버거!’를 외친다. 사실 꼭 데리버거만 먹지는 않는다. 눈에 보이는 아무 버거나 먹는다. 사진 속 버거는 홍대의 더리얼치즈버거다.
라면 / 디에디트 에디터H /@editor_ha
나만의 ‘해장 푸드’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에디터B의 의뢰를 받고 잠시 혼란스러웠다. 스무 살이 되던 날부터 술집 문턱이 닳도록 주당의 삶을 고수해 왔건만, 아무리 생각해도 라면… 라면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소주를 마셔도, 와인을 마셔도, 칵테일을 마셔도… 아무리 화려한 안주와 함께해도 종국에는 라면이 그리워지더라. (TMI : 그래서 서울 시내에서 안주로 라면을 파는 와인 바는 전부 꿰고 있다) 체력이 좋던 20대 시절에는 새벽 3~4시쯤 술자리를 파하며 컵라면을 들이켰다. 요즘은 그렇게까지 파이팅이 넘치진 않는다. 술을 거나하게 먹은 날 아침이면 갈등도 없이 주방에서 양푼냄비를 꺼낸다. 라면 1개를 겨우 삶을 수 있는 얄팍한 냄비다. 라면 종류는 크게 중요치 않다. 베스트는 너구리, 차선책으로는 진라면과 안성탕면, 신라면 등이 있다. 물을 약간 모자란듯하게 넣는 게 포인트. 면을 먼저 넣고 조금 끓인 후에 스프를 털어넣는 것이 내 라면 조리 철학이다. 면이 꼬들하게 익어갈 때쯤 잽싸게 불을 끈다. 짭짤하고 얼큰한 라면이 차려진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숙취는 가시고 뜨끈한 포만감만 남는다. 참 신기한 게 밖에서 사 먹는 라면은 이렇게 개운하게 해장이 되질 않는다는 것이다. 술과 대화가 함께 했던 지난밤의 불씨(!)를 삭히기에, 평화로운 내 집만큼 알맞은 장소는 없으니까.
델몬트 콜드 오렌지 / SRT매거진 기자 김은아 / @una3090
햄버거, 짬뽕, 쌀국수로 해장을 한다구요? 거짓말. 당신은 아직 술이 덜 깼군요! 술김에 그냥 먹고 싶은 걸 먹을 핑계를 만들어내는 거라구요. 저도 그러니까… 그러나 진짜 효과 있는 해장법을 찾는다면 하나만 기억하세요, 델몬트 콜드 오렌지. 중요한 건 진정한 해장의 시작은 아침이 아니라 전날 밤부터라는 거. 술자리에서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 들러 콜드 오렌지맛 250ml를 세 개 사세요. 편의점의 기본 구매 단위는 2+1이니까. 하나는 바로 원샷하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어둡니다. 자기 전 오렌지주스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다음 날 두통을 막을 수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 시원해진 오렌지주스를 마시면 정상 출근이 뭐야, 야근도 가능할 정도로 컨디션 회복 완료!
용대리 황태해장국 / 헵매거진 에디터 남필우 / @nampilwoo
“명태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우리의 가곡 <명태>는 들어보셨나요? 동태는 아시나요? 그럼 북어는요?”
명태를 얼리면 동태, 말리면 북어, 여러 차례 얼었다 녹았다 하면 황태가 된다. 모두 명태의 이름들.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는 바람이 많이 불어 황태로 만드는 말리기에 최적화된 곳이라 이 지명의 이름을 따서 ‘용대리 황태해장국’이라는 상호로 간판을 단 음식점이 많다. 나의 20대, 거의 <좋좋소>와 비슷한 회사에서 잦은 회식에 시달리던 그 당시. 과음 다음 날 숙취의 공격에도 기사회생했던 치트키가 바로 용대리 황태해장국이었다. 북엇국보다 조금 더 뽀얀 국물인 황태해장국에 청양고추를 본인의 치사량보다 한 덩어리 더 넣고 소량 후추를 투하 후 밥을 넣었다. 어떤 원리인지 과학적으로 설명이 어렵지만, 뜨거운 국에 뜨거운 밥을 넣었더니 더 뜨거운 국물의 온도가 살짝 내려갔다. (숙취로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그때 밥알을 피해 국물만 후루룩 마시면 바로 땀샘이 긴장을 한다. 여기서 밀당이 필요한데, 황태 건더기를 하나 건져 어금니로 질겅질겅 씹으며 살짝 시간을 벌면 미량의 땀이 배출되면서 외부 공기가 땀샘과 만나 위로를 건넨다. 바로 이때다. 한 번 더 국물을 마시고 이윽고 수저로 밥알과 국물을 같이 떠서 냅다 먹다 보면 이내 땀샘은 GG를 선언하며 이마, 콧잔등, 인중, 목덜미 할 거 없이 수문을 개방! 신문지를 구겨 물에 적신 다음 두개골 속에 넣어 놓아 꽉 막혀 죽는 줄만 같았던 두통에서 해방. 리프레시, 상황 종료! ‘나 살아있다’라는 안도와 함께 또 하루를 살아갔었는데… 요즘은 일 년을 통틀어 맥주 한 캔 마실까 말까 한 알코올 프리한 삶을 사는 내게, 가물가물했던 20대를 돌아보게 만든 싸이월드 같았던 기획. 디에디트 만세.
*편집자 주: 사진 속 음식은 가정식 북엇국으로 용대리 황태해장국은 아니다.
콩나물국밥 / 수수숲 디렉터 김정희 / @soosoo.soop / soosoosoop.com
사진은 콩나물국밥이지만 최애 해장은 두 개다. 뜨끈한 콩나물국밥과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핏 ‘뭐야 나란히 나열하기에 둘은 너무 다른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둘에게도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맑은 물’이라는 거다. 참고로 나는 콩나물국밥에 계란을 풀지 않고 먹는다. 뿌옇지 않은 흡사 콩나물 씻은 물맛 (같기도 하지만 사실 들어갈 양념은 또 다 들어간 것) 같은 그 개운함을 좋아한다. 뜨끈하든 시원하든 맑은 물이 들어가면 요동치던 속은 슬금슬금 가라앉고, 알코올과 안주 향에 절여져 텁텁하던 입안과 식도는 깔끔하게 리셋된다. 그렇다. 리셋된다. 그럼 이제 다시 먹고 마실 준비를 하면 된다. (아이 신나) 정말 본분을 완벽히 다하는 해장이 아닌가.
똠양꿍 / 조향사 전아론 / @ahro_official / ahro.co.kr
사실 해장 메뉴를 고르는 것은 굉장한 심사숙고를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전날 마신 술이 무엇인지, 함께 먹은 음식은 무슨 맛과 향을 가지고 있었는지, 술을 마신 양은 얼만큼인지, 숙취해소제를 먹었는지, 몇 시간이나 잤는지… 등등. 수많은 요소가 해장 메뉴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해장을 다양한 음식으로 하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꽂힌 메뉴가 있다. 다름 아닌 똠양꿍이다. 한국인의 얼(?)을 자극하는 얼큰함 가운데, 자극적인 신맛과 휘몰아치는 향기들…! 레몬그라스, 라임잎, 생강 등의 이국적인 향에 정신을 빼앗기다 보면 어느새 지난 밤의 술 냄새는 잊어버리게 된다. 국물이 가벼워서 후루룩 완샷을 하기에도 좋고, 버섯과 새우 등 기름기 없는 재료들이라 속이 부대끼는 일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한테 열심히 해장 메뉴로 추천을 하고 다니는데, 의외로 똠양꿍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더라. 향의 세계란 발을 디디고 나면 자연스레 넓어지기 마련인데… 하며 작은 목소리로 오늘도 열심히 영업 중이다. 일단 한번 잡솨봐~!!~!
육개장 / 바이브랜드 에디터 김정년 / @avalache____ / buybrand.kr
해장용 육개장의 매력은 무엇일까? 육수? 고명? 아니, 나는 대파라고 생각한다. 국물 한 술 고기 한 점은 나중의 일이다. 나는 큼지막하게 썰린 대파부터 집어 든다. 향신 채소 특유의 알싸한 향미가 제정신이 아닌 두뇌를 깨운다. 꼭꼭 씹어먹으면 어느새 혓바닥에 군침이 고이는데, 밥 한 공기를 매콤한 고깃국물에 투척하면 본격적인 해장이 시작된다. 육대장, 한우궁, 이화수 전통육개장…브랜드는 많은데 어째 맛은 다 비슷하다. 흑막에서 동일한 셰프가 지휘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덕분에 우리는 전국 어느 매장에 들어가더라도 일관성 있는 해장을 마치게 된다. 한 그릇에 8,000원, 비싸봐야 만 원. 사이드 메뉴로 보쌈 수육 한 접시. 기본 반찬으로 오뎅을 무한으로 보급해주는 프랜차이즈 식당의 육개장을 사랑한다.
평양냉면 / 프리랜서 에디터 박인혜 / @inhyehye
날이 갈수록 숙취가 심해진다. 숙취가 무서워 술을 줄이고 있지만 그래도 술 마시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해장으로 달랠 수밖에. 나의 최애 해장 음식은 평양냉면이다. 슴슴하니 시원하고 간이 세지 않아서 아무 생각 없이 먹을 수 있는데, 심지어 맛있다! 평양냉면을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산책을 하고 들어가면 바로 해장 완료, 바로 업무 복귀가 가능하다. 회사에 묶인 노동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야 하니 회사에서 가까운 곳이 제일 좋다. 판교에서 일할 때는 능라도, 종로에서 일할 때는 남포면옥을 갔다. 해장으로는 무조건 회사에서 가까운 곳이어야 한다. 그러다 제주에 있는 회사로 이직한 지금, 갈 곳이 없다. 리얼 해장국집만 넘쳐나는 제주 중문에서 슴슴하니 시원한 평양냉면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길. (아마 안 올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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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