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도박을 즐기는(?) 영화평론가 김철홍이다. 물론 실제로 도박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일의 특성상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를 일반 관객보다 먼저 본 뒤 평가를 내릴 때가 많은데, 한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게 될지 말지 미리 판단을 내리는 행위가 어떨 때는 도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내린 평가를 세상에 던진 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얼마나 비슷한지 그 결과를 기다린다. 파친코 같다. 나의 평가는 구슬이고, 난 그 구슬이 사람들의 마음에 골인하게 되는 순간 ‘잭팟’을 외치기 때문이다.
3월 25일, Apple TV+가 약 1000억 원의 제작비를 들였다고 알려진 초대형 프로젝트 <파친코>가 일부 공개(3화)되었다. <파친코>는 한국계 미국인인 이민진 작가가 2017년 발표한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다. 미국 회사의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미국 콘텐츠’지만, 원작 작가를 비롯한 주요 제작진들이 한국인, 혹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각본 및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수 휴를 비롯하여 각 4화씩의 연출을 맡은 두 명의 감독 코고나다와 저스틴 전 모두 한국계 미국인이다. 말하자면 드라마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연출과 각본을 맡은 사람이 모두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파친코>가 Apple TV+의 미래를 상당히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타이밍에 공개된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물론 애플 입장에선 1000억 원이 그렇게 큰 돈(?)이 아니라,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러나 얼마 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코다>의 배급권 구입에 애플이 지불한 금액이 2500만 달러(한화 약 300억)였던 것을 생각하면, 1000억 원은 분명 허투루 베팅하기 어려운 금액인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Apple TV+가 서비스를 시작한지 벌써 2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아마존의 프라임 비디오에 비해 임팩트 있는 작품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파친코>와 관련한 애플의 선택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은 이유이다. 그들은 왜 한국인들이 만든 한국 이야기에 1000억 원을 태운 것일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파친코의 레버를 당기게 한 것일까.
<파친코>는 일제 강점기 시대가 조선인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그려낸 작품이다. 현재 3화까지 공개된 스토리는 대략 이러하다. 먼저 1910년대 일제 강점기 시절 태어난 선자(김민하)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있다. 하숙집을 하는 부모님 밑에서 유년기를 보내는 선자는 힘든 상황에서도 쉽게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런 선자는 어느 날 자수성가한 사업가 한수(이민호)를 만나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진행되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때는 1989년,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시기에 재임했던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사망한 해에 뉴욕 금융가에서 일하고 있던 솔로몬(진하)이 업무차 고향인 일본을 찾는다. 솔로몬은 한국인 지주를 설득해 계약을 성사시켜야 하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자 할머니 선자(윤여정)에게 도움을 청한다.
원작 소설은 4대에 걸친 가족의 일화가 연대기 순으로 진행된다. 선자 부모님의 결혼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선자의 유년시절을 거쳐 선자가 자신의 가정을 꾸리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이후 선자가 낳은 두 아들에 관한 에피소드를 거쳐 손자인 솔로몬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반면 드라마 <파친코>는 두 개의 시간대를 규칙 없이 뒤섞는 구성을 취한다. 소설이 ‘4대’라는 상당히 긴 기간을 다루고 있는 만큼, 극중 다소 긴장감이 떨어질 수 있는 구간들을 상호 보완하기 위한 영리한 전략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드라마는 책에 비해 조금 더 ‘영화적인’ 각색이 들어갔다. 각본가 수 휴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파친코> 제작 초기에 영화 <대부2>를 상당 부분 참조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대부2>가 현재와 과거를 교차 편집함으로써 호평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파친코>의 이러한 선택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특히 시즌1은 청소년기의 선자와 노년 선자의 이야기가 극의 중심을 이루는데, 같은 인물을 연기하는 윤여정 배우와 김민하 배우의 얼굴이 교차되어 겹쳐지는 순간을 보는 것이 드라마의 주요 관전 포인트 중 하나이다. 어린 선자가 과거에 내린 선택들이 나비효과가 되어 고스란히 할머니 선자의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 선자를 연기한 윤여정 배우는 늘 그랬듯, 그 모든 선택의 역사를 잠깐의 표정만으로도 표현해내는데 성공한다. 감독 코고나다는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윤 배우의 퍼포먼스에 대하여 “그의 얼굴은 한국 역사가 담긴 지도책 같다.”라는 소감을 남겼는데, 그만큼 윤 배우가 맡은 선자라는 캐릭터는 <미나리>의 ‘순자’에 이어, 또 한 번 전 세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으로 예상된다.
윤여정 배우는 TV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하여 <파친코> 캐스팅 관련 에피소드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당시 애플은 모든 한국인 배우에게 오디션을 요구하였는데, 윤여정 배우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고 한다. 윤 배우는 처음엔 오디션을 거절하였지만, 시나리오를 읽고 선자라는 캐릭터에 매료되어 다시 한 번 제작진에게 연락해 꼭 이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은 마음을 밝혔고, 그렇게 출연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오랜 경력을 가진 윤 배우가 적극적인 구애를 할 정도로 선자라는 캐릭터와 <파친코>의 이야기가 매력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화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윤여정 배우의 베팅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시즌1의 세 개의 에피소드만 보고 단정 짓기는 이르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가 버젓이 세상에 나와 버렸다는 것이고, 이미 전 세계의 호응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파친코>의 호평은 어떤 측면에서 <미나리>에 대한 호평과도 면이 닿는 부분이 있다. <미나리>가 미국 이민자의 정착 과정을 주요 줄거리로 다뤄 공감을 얻었던 것처럼, <파친코> 역시 이방인인 재일 한국인의 이야기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한다. 미국 기업 애플이 이민자의 후손들에게 1000억 원짜리 프로젝트를 맡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선자를 보며 자신들의 할머니를 떠올렸을 확률이 높다. 다시 한 번, 이를 연기한 사람이 작년 미국을 울렸던 <미나리>의 순자를 연기한 윤여정 배우라는 사실이 참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후속 시즌 제작까지 확정 발표한 <파친코>는, 앞으로 선자네 가족을 비롯한 재일 한국인들이 무슨 사연으로 ‘파친코’ 사업의 큰 손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선자는 그 과정에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일본은 어떤 방식으로 선자에게 고난을 내릴 것이고, 선자는 그 역경을 어떻게 극복할까. 나는 그 사연이 너무 궁금해서 당분간 이 파친코 앞에서 일어나지 않을 셈이다. 당신은 나와 함께 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소설 파친코의 인상적인 구절 하나를 소개한다. ‘인생이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과 같다.’ 베팅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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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홍
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에서 최우수상 수상. 영화 글과 평론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