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 받은 책에 대해 쓴다. (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도 만들어 보내고 있다.)
[1]
<어느 날 멀쩡하던 행거가 무너졌다>
“한정된 것을 알차게 쓰기 위해서. 잘 비운 자리에 잘 채우기 위해서.”
책을 고른 이유는 단순하다. 실제로 며칠 전 멀쩡하던 우리집 행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금 민망하고, 막막했다. 사태 수습에 3시간가량이 소모됐다. 재발을 막기 위해 버릴 옷을 좀 추려냈다. 못 보던 옷이 많았다. 몰라보게 변한 옷들도 꽤 됐다. 옷이 너무 많았다. 왜 이렇게 많지? 옷 고를 줄 모르는 사람은 버릴 줄도 모른다. 교복이나 군복 입을 때가 차라리 속 편했다. 행거 무너지는 게 두려워서 학교나 군대로 돌아갈 수야 없지만, 그땐 훨씬 단순했던 것 같다. 옷 말고도 많은 것들이.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건 행거만이 아니었다. 책장으로 모자라 방 여기저기 쌓여 있는 책,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숲속 미로가 되어버린 냉장고, 쓸모를 찾지 못한 채 방치된 크고 작은 잡동사니까지. ‘이대로 괜찮을까?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만 하며 며칠이 또 흘러갔다.
그러다 이 책을 발견했다. 먼저 읽은 사람들의 후기가 궁금해 트위터에서 ‘행거가 무너졌다’를 검색했는데, 책 얘기보다 생생한 하소연이 훨씬 많았다. “아씨 갑자기 행거가 무너졌다. 어떡하지?”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1)이 책 제목을 참 잘 지었구나. 2)우리집 행거만 무너진 게 아니구나. 미니멀리즘 열풍이 분 게 벌써 몇 년 전인데, 여전히 행거는 이곳저곳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저자 역시 행거가 무너졌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유명한 미니멀리스트처럼 싹 다 비워 방을 새하얗게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그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 책에는 ‘꽉 찬 행거’와 ‘새하얗게 비워진 방’ 사이에서 나만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저자는 여전히 균형을 찾는 중이다. “인생도, 취향도, 내 마음도 늘 변하니까.”
- <어느 날 멀쩡하던 행거가 무너졌다> 이혜림 | 라곰 | 15,800원
[2]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앞으로의 방향성을 모르겠는,
이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시간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1974년 어느 날. 약물중독자들과의 연이은 면담은 전문 상담사들조차 지치게 만들었다. 정신적 에너지가 완전히 소모된 상담사들은 극단적인 무기력을 호소했다. 독일 태생의 심리학자 허버트 프로이덴버거는 이를 ‘번아웃(burnout)’이라 불렀다.
1967년 어느 날. 영국의 한 자선기관에서 고등학교 졸업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졸업 후 곧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1년 정도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하는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갭이어(gap year)’였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 우리는 번아웃도 갭이어도 몰랐다. 일하다 지쳐 무기력해지면 그것도 내 탓, 어쩌다 이력서에 공백이 생기면 그것도 내 탓. ‘번아웃’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나만 죽을 것처럼 힘든 게 아니었구나.” 일과 일 사이에 ‘갭이어’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잠시 멈췄다 가도 되겠구나.”
이 책은 번아웃과 갭이어를 통과하고 있는 8명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중 1명은 저자다. 일이 전부였고 일로 행복했던 저자의 ‘일하는 마음’에 어느 날 갑자기 겨울이 왔다. 무서웠다. 그래서 7명을 찾아가 묻는다. 당신의 겨울은 어땠냐고, 겨울은 언제쯤 끝이 나냐고, 막상 봄이 오면 어떤 마음이냐고. 그들이 들려주는 7개의 겨울 이야기는 번아웃에 시달리는 사람에겐 위로가 되고, 갭이어를 준비하는 사람에겐 용기가 된다. ‘번아웃’과 ‘갭이어’가 그랬듯, 어떤 말은 존재만으로 세상에 도움이 된다. 이 책의 제목도 그렇다.
-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김진영 | 자기만의방 | 14,500원
[3]
<시간을 찾아드립니다>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는 ‘시간이 돈’이라는 고정관념을 뒤집어야 한다. 시간은 돈이 아니다. 돈이 시간이다.”
번아웃에 시달리면서도 선뜻 갭이어를 선택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돈이다. 매달 통장에 꽂히던 월급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겁이 덜컥 난다. 계속 회사를 다니면 벌게 될 돈을 계산해본다. 회사를 그만두면 그만큼을 잃는 느낌이라 갭이어는 없던 일이 된다. 이 계산에서 빠진 게 있다. 시간이다. 회사를 그만둔 후에 내가 얻게 될 시간을 계산해보자. 억지로 회사를 계속 다니면 그만큼을 잃는다는 건데, 그럼에도 대부분은 돈 대신 시간을 포기한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돈 vs 시간’의 대결에서 우리가 습관적으로 돈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고작 3,000원 싸게 책을 사겠다고 알라딘 중고매장 사이트를 수시로 검색하는 나로서는 몹시 찔리는 얘기다. 내 시간을 너무 헐값에 판 셈이니까. 오래전부터 ‘시간과 돈의 맞교환’에 주목해온 저자는 제안한다. 내 시간의 가격을 매겨보고, 제값을 못 받고 있다면 그 시간은 남에게 거저 주지 말고 움켜쥐라고. 어떻게?
저자는 ‘시간 조달하기’를 제안한다. 쉽게 말해 ‘돈으로 시간을 사라’는 것이다. 돈으로 산다고 하니 ‘플렉스’ 같은 걸 떠올릴 분들을 위해 내 사례를 말씀드리겠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다짐했다. 앞으로는 몇천 원 저렴한 ‘헌책’을 사는 데 내 시간을 쓰지 않겠다. 몇천 원 더 내는 대신 그 시간을 아껴서 가치 있는 일에 쓰겠다.
이렇게 다짐하고 나니 책임감이 생긴다. ‘돈 대신 시간이 주어지면 나는 그 시간을 잘 쓸 수 있나?’ 잘 쓸 수도 있고, 못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을 내 뜻대로 써보지 않으면 잘 쓰는 법을 배울 수도 없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 헐값에 팔릴 것이다. 앞서 소개한 책 제목을 다시 한번 쓴다. “(시간만 있다면)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
- <시간을 찾아드립니다> 애슐리 윌런스 | 안진이 | 15,800원
[4]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점심이 없던 그 날들에 내가 얼마나 자주 불안에 휩싸였는지,
얼마나 몸을 학대하듯 살았는지,
허겁지겁 입에 넣던 순대의 맛이 어땠는지 기억한다.”
방송국 PD로 일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 가뭄에 콩 나듯 채용공고가 나왔고, 몇 명 뽑지도 않았다. 매번 서류에서 떨어졌지만, 언제 필기시험을 보게 될지 모르니 준비는 필요했다. 필기시험 중 하나는 ‘작문’이었다. 주제를 하나 던져주면 그와 관련된 글을 한 편 완성하는 시험이었다. 뭘 평가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준비는 필요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작문 스터디를 시작했다. 제시어를 하나 정해서 1시간 동안 글을 쓰고, 다 쓴 후 돌려보며 좋은 점과 고칠 점들을 얘기하는 방식이었다. 난 작문 스터디가 참 재밌었다. 시간 안에 글을 완성하는 뿌듯함도 있었고, 같은 제시어로 저마다 다른 글을 만들어내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결국 PD는 되지 못했지만, 이후 글 쓰고 다듬는 직업을 갖게 된 데에는 작문 스터디에서 받았던 좋은 느낌이 꽤 큰 영향을 미쳤다.
요즘 서점엔 여러 사람이 같이 쓴 책이 많다. ‘작문 스터디’ 때처럼 글 잘 쓰는 사람들에게 같은 제시어를 주고, 받은 글을 묶어 출간하는 것이다. 작가들은 원고 청탁이 늘어나서 좋고, 독자들은 또 다른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어 좋다. 이 책에도 잘 쓰는 10명의 글이 실렸다. 제시어는 점심이다.
‘점심’은 좋은 제시어다. 요리조리 변주해볼 여지가 많다. 혼자 먹거나, 여럿이 먹거나, 거르거나. 대충 때우거나, 야무지게 차려 먹거나. 오전과 오후 사이 애매한 시간을 소재로 작가들은 ‘점심’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을 써 내려간다.
-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정지돈 외 9명 | 한겨레출판 | 14,000원
[5]
<그들의 이해관계>
“다행이라니. 누구에게 다행이라는 뜻이었을까요.”
임현의 단편집 <그들의 이해관계>에는 불행이 가득하다. 갑작스런 불행과 마주한 인물들은, 뭐가 문제였는지 그 원인을 찾아 나서지만 그럴수록 더 혼란스러워진다. 표제작에서 ‘나’의 애인이었던 해주는 우울에 시달리다 기분전환을 위해 여행을 떠났는데, 타고 가던 버스 사고로 죽었다. 이 불행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울에 빠진 해주? 해주를 달래주지 못한 ‘나’? 사고를 막지 못한 버스 기사? 아님 때마침 그 기사와 교대한 또 다른 버스 기사?
다른 작품에서도 불행한 일이 계속 벌어진다. 치료받던 어머니의 상황이 악화되어 연명치료 중단 동의서를 써야 했던 오종구(‘나쁜 사마리안’). 잠시 한눈판 사이 아들의 교통사고를 막지 못한 해원(‘해원’). 물건을 훔쳤다는 오해를 받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경비로 일하던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 ‘나’의 아버지(‘목견’). 누구 탓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당신 탓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자꾸만 내 탓처럼 느껴지는 불행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 물론 정답은 없고, 소설도 답을 주려 하지 않는다. 읽는 사람의 생각이 많아질 뿐.
임현의 소설은 집요하다. 보통 불행이 닥치면 다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잊기 힘들더라도 외면하고 싶다. 소설 속 인물들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임현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고 자꾸만 묻는다. 이 불행의 원인은 무엇인가.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왔으니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그럴 때 우린 보통 누구 탓을 하나. 불편하고 답이 없는 문제를 파고들어 줘서 감사하다.
- <그들의 이해관계> 임현 | 문학동네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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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