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아가씨> 이후 돌아오지 않는 박찬욱을 기다리는 에디터B다. 박찬욱이 아이폰으로 단편 영화를 찍었다. 제목은 <일장춘몽>. 미셸 공드리, 데이미언 셔젤 등 아이폰으로 영화를 찍는 작업은 예전부터 있었다. 심지어는 이번 프로젝트 ‘아이폰 13 Pro로 찍다’의 주인공 박찬욱도 2011년에 이미 <파란만장>이라는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과연 이번에는 박찬욱이 얼마나 놀라운 영화를 선보일까. 두괄식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연 훌륭한 단편 영화를 만들어냈다. 영화에 대한 얘기는 이따 하고 일단 아이폰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부터 살펴보자.
영화는 저조도 환경에서 시작한다. 달빛만 존재하는 어두운 밤, 장의사(유해진)가 무덤을 파고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은 한밤중으로 대부분 어두운 환경에서 촬영됐다. 덕분에 아이폰 13 Pro의 카메라 성능을 두 눈으로 똑똑이 확인할 수 있다. ‘아이폰이 이 정도로 야간 촬영에 강하구나…’ 몇 년째 갤럭시 시리즈만 쓰고 있는 나는 아이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스마트폰으로 찍었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화면이 깔끔했다. 자글거리는 노이즈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는 시네마틱 모드가 자주 사용된다. 시네마틱 모드는 얕은 피사계 심도 효과로 동영상을 촬영하는 모드다. 쉽게 말해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배경을 날리는 아웃포커스 효과를 주는 거다. <일장춘몽>에서는 인물을 찍을 때 시네마틱 모드를 자주 사용했는데, 영화에서는 포커스를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미학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게 아니다. 감독이 포커스를 깊게 하느냐 얕게 하느냐에 따라 관객이 능동적/수동적 태도로 관람하기 때문이다. 감독이 의도한 포커스에 따라 관객의 시선이 따라가기 때문에, 시네마틱 모드가 존재한다는 건 연출자가 자신의 의도를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영화 <시민 케인>에서 보여준 딥포커스(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것)가 관객을 능동적인 주체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라면, 반대로 시네마틱 모드는 감독의 의도를 담을 수 있게 된 기능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기능이다.
11년 전만 해도 박찬욱은 <파란만장>(2011)에서는 심도를 표현하기가 힘들어서 DSLR 렌즈를 별도로 부착해서 연출을 했다. 그리고 이제는 별도의 장비 없이 아이폰 13 Pro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 그동안 아이폰 카메라가 많이도 발전했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시네마틱 모드뿐만 아니라 아이폰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기능을 활용하는 장면도 많았다. 예를 들어, 방수 성능을 활용해서 수중 장면을 넣기도 했고, 어지러워하는 인물의 시점을 광각 모드로 흔들거리며 찍어서 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했다. 아이폰을 쓰는 사람이라면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연출했을지 유추해보는 것도 재밌을 거다.
[초광각 모드를 활용해서 인물의 어지러운 상태를 극대화했다]
자, 아이폰에 대한 얘기는 여기까지. <일장춘몽>은 아이폰 성능을 보여주기 위한 프로젝트이지만 영화만 놓고 평가하더라도 정말 잘 만들었다.
일단 라인업이 신선하다. 박찬욱 연출에 유해진, 김옥빈, 박정민이라니, 이런 조화를 어디서도 본 적 없다. 그리고 영화의 중심에 있는 인물, 유해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유의 너스레로 코믹한 분위기를 이끈다. 기자간담회에서 박찬욱 감독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예전부터 유해진이라는 배우를 좋게 봤고 같이 작업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일장춘몽>의 장의사 캐릭터는 시작부터 유해진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유해진의 매력이 100% 묻어나더라.
줄거리를 짧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장의사는 마을을 구해준 검객 ‘흰담비'(김옥빈)를 위해 남의 무덤 속에 있는 관을 꺼내 훔치는데, 그 관의 혼령(박정민)이 깨어나 장의사를 죽이려 한다. 장의사는 가뭄과 전란으로 쓸만한 나무가 없어서 관을 훔치게 된 것이라 안타까운 사정을 털어놓고, 그 얘기를 들은 검객은 눈물을 흘리며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자신의 관을 가져간다. 그때 관에 있던 흰담비의 영혼이 깨어나고 두 사람은 관을 차지하기 위해 결투를 벌인다. 그리고 갑자기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며 영혼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줄거리만 들으면 이게 무슨 황당한 전개인가 싶지만,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황당함보다는 놀라움을 느끼게 될 거다. 일단 <올드보이>, <박쥐>, <아가씨>에서 봤던 분위기와는 180도 다른 코믹함이 전반에 깔려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장르를 단순히 ‘코미디’라고만 단정 지어 말할 순 없다.
무덤을 파며 시작하는 오프닝에서는 호러인가 싶다가, 두 검객의 대결을 보면 액션인가 싶다가, 두 검객의 눈에서 하트가 뿅! 하는 장면에서는 로맨틱 코미디 같다가, 영화 후반으로 가면 마당극이나 같은 느낌을 내기 때문이다(저승사자가 소리꾼 역할을 하며 상황을 설명해주는 게 딱 마당극 같다). 이 영화는 도대체 장르가 뭐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장르를 품고 있다. 그리고 유해진은 한국의 구성진 가락을 대사로 살리기 위해서 박자감을 주면서 대사를 소화했다고 한다. 그러니 대사를 뱉는 유해진의 연기도 주의 깊게 봐주면 좋겠다.
내가 가장 매력을 느꼈던 부분은 영화의 메시지다. 영화의 메시지는 장의사의 이 한 마디가 함축하고 있다. 관을 양보하고 서로 떠나겠다고 아웅다웅하는 두 검객에게 하는 말이다.
“이 살도, 요 살도 다 썩어질 거.
결국엔 뼉다구만 남을 텐디. 여기 같이 써도 넉넉하겄구만.”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몸 편하게 뉘일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 장의사는 가진 것이 없어서 죽은 사람의 관을 도둑질하고, 죽은 검객 두 명은 서로의 관을 빼앗기 위해 죽어서까지 싸운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하는 요즘 세태가 20분짜리 단편 영화에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서로의 관을 빼앗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땅장사꾼 때문이다. 뱀의 혀를 가진 땅장사꾼이 논과 밭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 놀이를 하다가 결국 모든 땅을 빼앗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프로세스,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 박찬욱은 무협 로맨스의 탈을 쓴 사회 풍자적인 단편 영화를 만들어버렸다(그리고 엔딩은 좁은 땅에서 그만 싸우고 사랑하며 살라는 내용). 아이폰으로 찍은 영화가 얼마나 대단한가 구경하려고 봤더니, 결론은 역시는 역시, 박찬욱은 박찬욱. 영화가 몇분 짜리든, 무엇으로 찍었든, 내공은 어디 가질 않는다.
[눈이 시릴 듯한 화려한 색감의 미장센도 <일장춘몽>의 매력이다]
아이폰으로 찍었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영화만으로도 재미있는 영화다. 그러니 가까운 극장…이 아닌 지금 바로 유튜브에서 감상해보자. 링크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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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