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뉴스레터니 뭐니 한답시고 타지에서 고생하다 연말을 맞아 친정인 디에디트에 들린 평론가 차우진이다. 아무리 험하고 바쁜 일상이 들이닥쳐도 디에디트에 캐럴 특집은 써야 해서 왔어. 억지로 잡혀 온 건, 아니야… 응…
얼마 전 상수동에서 성수동으로 이사를 했어. 점 하나 바뀐 동네로 이사하면서 하필(?) 디에디트 사무실과 무척 가까워졌는데, 한밤중에 담배 사러 나간 길에 문득 고개 들어 환하게 불 켜진 디에디트 사무실을 보고는 남몰래 응원 구호를 외치곤 해.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요… (오열)
이사한 집 앞에, 옆에, 뒤에 ‘리터럴리’ 공장이 있더라고. 매일 메뉴가 바뀌는 5천 원짜리 점심을 파는 함바집이 있고, 그 옆에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편집샵이 있고, 그 주위엔 또 다닥다닥 붙은 자동차 공업사와 카페가 뒤섞여 있지. 이렇게 괴상한 동네를 짬짬이 돌아다니면서 그동안 내가 홍대 앞 관광지에서 얼마나 시끌벅적한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깨달아. 근데 올해 크리스마스는, 리터럴리 공장들 혹은 도무지 사라질 것 같지 않은 바이러스 때문에라도 조용하고 한적하게 보내겠구나, 생각하게 돼.
덕분에 올해 크리스마스도 계속 차분할 예정, 동시에 많은 사람이 이곳저곳에서 여러모로 고군분투하고 있겠지. 응원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골랐어. 어디 나가지 말자는 얘기야.
크리스마스라고 부화뇌동 말라는
인디 포크 메리 크리스마스
Andrea von Kampen – What Child Is This
안드레아 폰 캄펜은 네브라스카에서 활동하는 포크 싱어송라이터. 한없이 경건해지는 매가리 없는 목소리가 취저인데, 쨍한 추운 날에 매우 잘 어울리는 음색 너머로 따뜻한 여운을 남기는 기타 연주가 인상적이야.
Beta Radio – I Heard the Bells
10년을 함께 하고 있는 인디 포크 듀오, 베타 라디오는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섬세하고 우직하게 멜로디를 만들어. 애잔하게 흐르는 어쿠스틱 기타 너머로 어우러지는 보컬 하모니와 깨끗하게 울려 퍼지는 전자음이 말 그대로 영롱해.
The Sweeplings – God Rest Ye Merry Gentlemen
워싱턴과 앨라배마에서 자란 남녀가 만나 결성한 스위플링스. 2010년대에 활동하며 <헝거 게임> OST에도 참여했던 혼성팀 시빌 워가 떠오르는 부드러운 하모니와 대중적인 멜로디로 가득한 인디 포크 송을 들려주는 아티스트야.
SYML – Christmas Lights
2019년에 데뷔한 브라이언 페넬의 솔로 프로젝트. ‘SYML’은 웨일스어로 ‘SIMPLE’이란 뜻인데, 그만큼 단순하고 담백한 음악을 선보이는 게 특징. 미드 <틴 울프>, <쉐도우헌터> 같은 작품에 음악이 삽입되며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어.
The Ballroom Thieves – [anywhere but] Home for the Holidays
볼룸 씨브스는 향수로 가득한 사운드를 선보이는데, 따뜻하면서도 추억으로 가득한 어떤 풍경을 그려내는 데 능숙해. 애수 어린 포크와 뜨겁게 타오르는 록 비트를 넘나들면서 특유의 개성과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아티스트야. 한겨울 호숫가처럼 나즈막이 아름답고 날카로운 사운드 스케이프.
달콤쌉싸름한 80년대
시티-팝 크리스마스
Sugiyama Kiyotaka – Last Holy Night
스기야마 키요타카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오메가 트라이브와 함께 활동한 싱어송라이터. 시티팝 앨범들을 구하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이름이기도 한데, “Last Holy Night”은 솔로로 전향한 1986년에 발매된 싱글로 오리콘 차트 2위까지 올랐어. 선글라스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
Kurahashi Ruiko – December 24
1981년에 데뷔한 쿠라하시 루이코는 사연 많을 것 같은 중저음의 고급진 목소리가 특징. 크리스마스이브를 굳이 ‘디셈버 트웬티 포’라고 하는 부분이 킬 포인트. 왠지 쓸쓸함이 두 배가 되는 기분이야. 2005년에 일본에서 <채옥의 검>이란 제목으로 방송된 MBC 드라마 <다모>의 주제곡인 “비가”(김범수)를 일본어로 번안해 발표하기도 했어.
Anri – CHRISTMAS CALENDAR
1986년 안리의 10번째 앨범 <Trouble in Paradise>의 수록곡. 있을 리 없는 80년대 재즈 바에서의 추억을 자극하는 안리의 목소리가 돋보이는 크리스마스 송야. “바텐더, 늘 마시던 걸로…” “에?”
12월 25일? 별다를 것 없는 토요일인데 왜요?
NIKI – Split
인도네시아 싱어송라이터 니키의 신곡.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OST에 참여하면서 글로벌하게 알려졌어. 처음부터 끝까지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는 홀리데이의 쓸쓸함이 지배하는 노래인데, 뮤직비디오는 삼성의 갤럭시로 촬영됐어.
Mazzy Star – Flowers in December (Live on 2 Meter Sessions)
1990년대 드림팝 팬들의 심금을 울렸던 명곡. 12월이 되면 꼭 듣게 되는, 그러니까 옛날 사람의 옛날 노래. 1996년에 발표되었고 이 비디오는 네덜란드의 음악 프로그램 <2 Meter Sessies>의 스튜디오 라이브 영상이야. 수십편의 90년대 청춘 드라마에 삽입된 ‘Fade Into You’가 제일 유명하지만 이 노래 또한 한 번 들으면 쉽게 잊기 어려운 겨울 노래야. 세속적인 세계에서 순수를 찾아 헤매는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호프 산도발. 최근까지도 활동하고 있어.
이이언 –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를 가장 극단적으로 커버한 이이언의 버전. 커버의 이미지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증오마저 느껴질 만큼 섬뜩해. “I just want you here tonight / Holding on to me so tight / What more can I do”라는 가사의 러블리한 뉘앙스만 슬쩍 바꾸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버전(호러?)이 되어버리는 마법.
Abigail Osborn – Two Christmases
지망생이라고 불러도 좋고 아마추어 싱어송라이터라고 불러도 좋을 거야. 정식 데뷔했다기엔 다소 애매한, 올해 싱글 두 개를 발표한 아비가일 오스본의 노래. 그저 단정하고 향수 어린 목소리 때문에 선곡했어.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의 가볍지만 복잡한 혼란과 우울을 담아내고 있어. 최근의 베드룸 아티스트들처럼 급성장한 스타가 될 수도, 잠깐 주목받고 완전히 사라지는 싱어송라이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러한 긴장 또한 이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이지 않을까.
그래도 어딘가 희망은 있겠지요, 크리스마스인데?
Kodaline – This Must Be Christmas
어지간하면 희망적이고 따뜻하며 긍정적인 노래를 부르는 코다라인다운 노래. 크리스마스에 실직당한(?) 11번째 엘프의 오해를 산타가 직접 찾아와 풀어주는 줄거리의 뮤직비디오도 꽤 사랑스러워.
George Michael – December Song (I Dreamed Of Christmas)
조지 마이클이 2009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발표한 곡으로, 오랜 파트너인 데이비드 오스틴이 작곡했어. 이 노래는 원래 스파이스 걸스에게 갈 뻔했는데, 조지 마이클이 그냥 자신이 부르기로 결정했다는 비하인드가 있어. 웸 시절의 ‘White Christmas’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곡이지만 파스텔 톤의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처럼 따뜻한 노래야. 애니메이션의 다소 우울한 소년은 조지 마이클의 소년 시절 모습을 재현한 것이라고 해.
Coldplay – Christmas Lights
21세기의 월드 클래스 희망 전도사 같은 콜드플레이가 10년 전에 부른 크리스마스 송. 크리스마스 교본처럼 희망적이고 따뜻해.
Liam Gallagher – All You’re Dreaming Of
리암 갤러거가 작년에 발표한 곡이야. 코로나 바이러스가 절정에 달했던 때 “무슨 꿈을 꾸나요? 세상이 최악일 때 거기에 있을 그런 사랑인가요?”라며 정색한 채 부르는 노래. 구석구석 모든 부분에서 존 레논이 떠오르는 아름답고 쓸쓸한 음악이야.
정승환 – 눈사람
2018년, 아이유가 쓰고 정승환이 불렀어. 홋카이도의 풍광처럼 풋풋하고 쨍한 감각. 눈이 시릴 만큼 눈을 실컷 볼 수 있어서 좋은 뮤직비디오. 차가운 공기 속 입김, 여리여리하게 읊조리는 음색, 희미하게 퍼져나가는 비브라토, 그러다 불현듯 허공을 향해 솟아오르는 새 떼 같은 감정들이 쏟아지며 막연한 마음이 조금씩 뭉쳐지고 단단해지는 인상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에 위로받았다고 고백하는 건 그래서 자연스러워. 개인적으로도 지난 수년간, 또한 앞으로도 차가운 바람이 불고 이불 밖에 냉기가 부유하는 계절이 올 때마다 떠오를 겨울 노래.
About Author
차우진
음악/콘텐츠 산업에 대한 뉴스레터 '차우진의 TMI.FM'을 발행하고 있다. 팬덤에 대한 책 [마음의 비즈니스], 티빙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을 제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