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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그녀의 맥북 프로

있지, 물건이 삶을 바꿀 순 없을 거야. 그래도 어떤 순간을 바꿀 순 있다고 생각해. 열 네 살 때 처음 샀던...
있지, 물건이 삶을 바꿀 순 없을 거야. 그래도 어떤 순간을 바꿀 순…

2017. 01. 09

있지, 물건이 삶을 바꿀 순 없을 거야. 그래도 어떤 순간을 바꿀 순 있다고 생각해. 열 네 살 때 처음 샀던 휴대폰이 생각나. 얄팍한 플라스틱 커버가 ‘착, 착’ 소리를 내며 닫히는 플립형 기기였지. 녹색 조명이 들어오던 흑백 LCD에 40자의 문자를 꾹꾹 눌러 담으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매달 남은 문자 수에 벌벌 떨면서 시답잖은 얘길 나누곤 했어. 지금은 누구랑 그렇게 문자를 보냈는지 기억도 안 나. 하지만 019로 시작하던 번호는 지금도 여전히 외우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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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리뷰를 하는 이유는 말이야, 잘 고른 물건이 우리 일상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해준다고 믿기 때문이야. 돈 버는 건 늘 더럽고 치사한데, 돈 쓰는 일은 왜 이렇게 쉽고 달콤할까?

그런 뜻에서 오늘 리뷰의 주인공은 새로운 맥북 프로. 터치바와 터치ID를 품은 13인치 모델이야. 꽤 비싼 애니까 모두들 정신 바짝 차리고. 이제 올해 첫 리뷰 시작할게. 반말은 건방지니까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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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치 맥북 프로의 몸무게는? 시작부터 무례한 질문에 답하자면 1.37kg. 기존 13인치 맥북 에어가 1.35kg이니 고작 20g 정도 더 무거운 셈이다. 물론 성능의 차이는 20g 수준이 아니지만. 두께는 14.9mm. 칼 같은 알루미늄 바디 덕에 더 얇아 보인다. 에어만큼 가벼운 프로가 나타났다는 건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는 일이다. 견고하던 라인업이 혼란스러워졌으니까. 너무 무거워서 살 수 없다고 힘들게 외면해온 맥북 프로가 이렇게나 가벼워졌으니, 갈아타고 싶어지잖아? 맥 유저들은 궁지에 몰렸다. 방어는 셀프다. 언제나처럼 애플은 우리 지갑 사정 같은 거 염려해주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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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점등이 끝난 사과 로고 때문에 상심이 큰 것 같다. 애플이 맥북의 대대적인 다이어트를 위해 사과 로고를 금속 처리 하면서, 사과가 빛나던 시대는 끝났다. 사과가 빛나지 않으면 맥북이 아니라며 볼멘 소리를 하는 사람도 많다.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이 디자인도 좋아한다. 과거를 잠시 잊고 스페이스 그레이의 영롱한 빛깔을 그 자체로 탐닉해보자. 거울처럼 반지르르하게 빛나는 새로운 사과는 꽤 예쁘다. 손끝만 닿아도 더러워져서 자꾸만 닦아주고 싶다. 가끔 이 로고에 얼굴을 비쳐본다. 눈 화장이 번졌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좋다. 시간이 지나면 이 디자인도 새로운 클래식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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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과에 빛이 들어오지 않는 것 정도는 아주 사소한 변화다. 진짜 생소한 것들은 지금부터다. 새로운 맥북 프로엔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좌우 측면을 샅샅이 살펴보자. HDMI 포트, SD 카드 슬롯, USB-A 포트… 맥북 프로의 확장성을 지지하던 수많은 구멍이 자취를 감췄다.

애플이 모든 것을 버리고 대신(?) 준 선물은 네 개의 USB-C 포트뿐이다. 지금 막 맥북 프로를 구입한 USB-C 뉴비 여러분. 차갑고 냉혹한 C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아주 높은 확률로 여러분이 가진 대부분의 기기와 케이블은 USB-A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새로운 맥북에 외장 하드나 SD 리더, 심지어 아이폰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수수료를 내야 한다. USB-C를 USB-A로 변환하는 어댑터나 다른 포트를 지원하는 허브를 구입해야 한다는 얘기다. 반년 동안 2016 맥북을 사용하며 이 불친절한 상황에 익숙해진 나는 이미 그 모든 액세서리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내 맥북의 경우엔 USB-C 포트도 하나뿐이라 전원 공급과 액세서리 연결 중 택일해야 하는 새침함도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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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은 어댑터에 라이트닝을 연결한 모습, 하단은 C to 라이트닝 케이블로 연결한 모습]

당장 USB-C 포트밖에 없는 맥북을 쓰는 것은 무척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애플이 오로지 액세서리를 팔아먹겠다는 각오로 이런 난리를 만들었다는 음모론엔 반론하고 싶다. USB-C는 눈앞의 미래다. 애플의 전유물도 아니고 말이다. 당연히 다른 제조사도 시도하고 있다. 다만 기존 사용자 환경을 크게 뒤집어야 하는 터라 조심스러운 가운데 배짱 두둑한(우리 눈치 덜 보는) 애플이 좀 더 과감하게 나섰을 뿐이다.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우린 이제 맥북을 쓰지 않는 사람에게 USB-C 충전기를 빌려 쓸 수 있다. 애플의 독자적인 규격이 아니기 때문에, 서드파티 브랜드에서 여분의 충전기를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도 있다. 맥 세이프를 쓸 때보단 경제적이고 자유로워졌다. 덜 안전할 순 있겠지만. 새로운 USB-C 포트가 썬더볼트3라는 것도 매력적인 요소다.

물론, 아무리 말해봐야 아이폰을 충전하기 위해 어댑터를 맞물려야하는 상황은 반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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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플레이는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을 것 같다. 정말 좋다. 기존보다 67% 밝아졌다는데, 대낮에 야외에서 쓰는 경우가 아니면 눈이 시려서 80% 이하 밝기로 사용한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화면이다. 아이맥과 아이폰7에 적용됐던 P3 색영역을 맥북 프로도 지원한다. 초록과 빨간색을 더 세밀하게 표현한다. 말 안해주면 눈치챌 수 없는 미묘한 변화지만, 딱히 눈치채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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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맥북 사용자들에겐 분명하게 와 닿을 변화가 스피커라고 생각한다. 키보드 양옆에 스피커홀이 있어서 그 부분이 스피커라고 착각할 수 있는데, 실제 스피커는 더 아래에 있다. 소리는 하단의 통풍구로 나온다. 스피커인 척 위장하고 있는 그 구멍은 내부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팬을 통해 분산시켜서 ‘뿜뿜’ 뿜어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아날로그적인 아이디어인데 결과는 훌륭하다. 맥북 전체가 소리를 뿜어내는 것처럼 고른 사운드다. 자체 스피커라고는 믿을 수 없는 파워풀한 볼륨에 놀랐다. 보기 좋고, 듣기도 좋으니 드라마 보기에 넘나 완벽한 기기인 것. 그래서 어제 일 안 하고 넷플릭스로 셜록 정주행했다. 사진 속의 드라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블랙 미러’인데 스토리도 영상미도 뛰어나다. 추천한다. 미드 리뷰 아니다. 맥북 리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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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은 글쟁이에겐 제일 중요한 게 키보드다. 하루종일 손 끝으로 이 까만 버튼을 두드려서 먹고 사니까. 지금도 리뷰를 맥북 프로로 작성하고 있는데, 호불호가 갈릴 것이라 생각한다. 2011 맥북 에어, 2016 맥북, 2016 맥북 프로를 나란히 두고 타이핑해보았다. 솔직히 구형 맥북 에어가 가장 손맛이 좋다. 물렁하고 안정감이 떨어지긴 하지만, 키보드가 떨어지는 깊이가 충분하기 때문에 손끝에 오는 피드백도 정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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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12인치 맥북의 1.31cm라는 비현실적인 두께를 위해 ‘나비식 메커니즘’을 적용했다. 키의 높이가 아주 낮고, 안정적으로 반응하는 키보드다. 최소한의 높이로 최대한의 키감을 제공하는 게 나비식 메커니즘의 목적이다. 새로운 맥북 프로에도 나비식 키보드가 들어갔다. 눌리는 깊이는 기존과 같지만, 훨씬 요란하게 반응한다. 더 많이 눌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손맛을 살리기 위해 ‘MSG’를 첨가한 모양인데, 꽤 경쾌하다. 내 취향엔 잘 맞는다. 다만 아주 소란스럽다. 한번 누를 때마다 “나 눌렸어요! 호잇!” 하면서 타다닥, 소리를 낸다. 도서관에선 비추, 스타벅스에선 추천.

11인치 맥북 에어를 쓰고 있는 에디터M의 평가는 이렇다 “내 맥북 에어가 눅눅해진 바게트라면, 이건 비스코티 같아. 바삭바삭.”

참고로 키보드 소재도 조금 달라졌다. 코팅이 달라진 것 같은데 새롭게 추가된 ‘터치바’와 조금이라도 더 비슷한 질감을 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곡률도 조금 달라져서 키캡 안쪽이 전보다 살짝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 예민한 편은 아닌데, 앱등이라 그런지 바로 알아차렸다. 이런 내가 자랑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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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진짜 커. 너무 커.” 맥북 프로를 처음 보면 트랙패드의 광활함에 놀란다. 진짜 크다. 언제 만져도 손끝이 유리 구슬처럼 굴러가게 만드는 매끄러운 트랙패드다. 너무 커서 트랙패드에 양손이 다 닿는 경우가 많다. 팜 리젝션에도 신경을 썼는지, 오른손으로 트랙패드를 조작하는 동안 왼손이 얹어져 있어도 오작동은 없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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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패드가 넓으니 포토샵 쓸 때 참 편하다. 화면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커서를 이동하기 위해 끊어 가던 경험은 끝났다. 기존 맥북과 트랙패드 크기를 비교해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개인적인 썰을 하나 풀자면 나는 원래 트랙패드 ‘보조 클릭’ 동작을 ‘하단 오른쪽 모서리 클릭하기’ 설정으로 사용하는데, 맥북 프로에서는 하단 오른쪽의 범위가 너무 넓어서 자꾸 잘못 클릭 되더라. 결국 ’두 손가락으로 클릭’으로 설정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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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맥북 프로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터치바? 트랙패드? 프로세서 성능? 아니다. 다 틀렸다. 이 제품에서 한 가지 기능에만 혁신상을 줘야 한다면 단연 터치ID다. 아이폰 시리즈가 3D터치부터 듀얼 카메라까지 갖은 신기능을 선보여도, 가장 훌륭하고 중독성 쩌는 변화는 터치ID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제 터치ID가 없는 맥북을 쓸 때도 검지를 갖다 대고 싶어진다. 너무 편하다. 왜 이제야 적용해줬는지 화날 정도다. 내 지문을 가져가.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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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바에 대한 얘기가 너무 뒤에 편성(?)돼 있어서 의아한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주 신비로운 도구다. 디스플레이의 확장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키보드의 확장에 가깝다. 맥북 프로의 터치바는 별도의 프로세서와 독자적인 OS를 품은 독립 기관이다. 맥북 안에 옵션 가구가 빌트인된 상황이라고 보는 게 맞겠다.

물론 실제 사용환경에서는 전혀 독립성을 띠지 않는다. 맥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업에 예민하고 빠르게 반응한다. 나를 과보호하는 남친처럼 시시각각 쫓아다니며 친절을 베푼다. 이렇게 잘했으니까 만져달라고, 만져달라고, 보채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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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기를 띄우면 수식 버튼이 뜨고, 캘린더를 띄우면 날짜와 시간 설정 버튼이 뜬다. 하다못해 전화가 왔을 땐 수신과 거절 버튼을 표시해준다. 퀵 타임 플레이어를 쓰거나 사파리에서 유튜브 등을 이용해 영상을 플레이하면 터치바에 영상 타임라인 컨트롤 바가 생긴다. 이 부분을 부드럽게 터치해 영상 플레이를 조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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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텍스트 편집기를 쓰고 있는 터라, 터치바 위에 문자 도구 모음이 떠올라 있다. 글자 색을 바꾸거나 볼드 처리하고, 정렬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이모지를 삽입하는 것도 쉽다. 왼쪽 약지를 살짝 움직이면 바로 터치할 수 있는 위치에 ‘이모지 버튼’이 떠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기능 키가 사라진 것에 대해 염려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한 달 동안 한 번도 쓸 일이 없었다. 필요하다면 fn 키를 가볍게 누르면 바로 표시된다.

이런 친절함에도 불구하고 터치바에 적응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의식하지 않으면 클릭질로 이미 해당 조작을 끝내버린 뒤고, 자주 쓰는 프로그램에선 단축키를 외우고 있는 터라 미처 터치바까지 눈길을 주지 못한다. 작업창이 바뀔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버튼을 선보이는데 잘 받아주지 못하는 건 미안한 일이다. 상대를 바람 맞힌 죄책감이 든다. 네 과잉친절이 나를 자꾸 나쁜 여자로 만든다.

물론 잘 쓰는 기능도 있다. 일단 터치바 오른쪽에 표시되는 4개의 즐겨찾기 모음을 본인의 사용 환경에 맞게 새로 설정하길 권한다. 나는 기본 설정에서 시리를 없애고 미션 컨트롤 버튼을 들여놨다. 이건 너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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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건 파이널 컷 프로 X와의 소름끼치는 궁합이다. 이거 하나로도 터치바의 존재 이유가 충분해 보인다. 전체화면으로 영상을 보며 편집본 전체 타임라인을 훑어볼 수 있으며, 커서를 살짝 움직여 터치바를 터치하는 동작 만으로 컷 분할과 다듬기가 가능하다.

참으로 유려하게 이루어지는 조작들이 많은데, 글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터치바 설정 방식이 그중 가장 드라마틱하다. 디스플레이 속 아이콘을 드래그해서 터치바에 갖다넣는 사용자 경험은 그 둘이 연결되어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킨다. 애플은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거짓말에 너무나 능통하구나.

터치바의 사용 경험에 대한 것들은 아무리 말로 설명해봐야 와닿지 않을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영상으로 보여드릴 수 있도록 분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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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는 아쉽다. 최대 10시간이라고 애플은 말했지만, 내 사용패턴에선 6시간을 넘기기 어려웠다. 내 탓이니? 어쨌든 결론은 분명하다. 이 제품을 쓰며 일상이 조금 더 행복했다. 더디던 작업이 빨라졌고, 부산스런 키보드 덕에 글 쓰는 것도 더 즐거웠다. 4K 30프레임 영상을 편집을 매끄럽게 해내고, 순식간에 렌더링하는 속도만 봐도 그렇다. 처음엔 무겁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본래 쓰던 맥북으로 돌아가기 싫을 정도다.

여태까지 가장 가볍고 강력하며, 생소한 맥북 프로다. 불편한 것과 부러운 것을 모두 합쳐놨다. 올해 첫 리뷰에 걸맞은 제품이었지. 설레서인지 말이 길었다. 그래도 혹시 할 말이 더 생기면 또 돌아오겠다.

PHOTO BY. KUDO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