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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질 아블로, 위대한 유산

안녕, 패션에 관한 글을 쓰는 객원 필자 이예은이다. 버질 아블로가 세상을 떠났다. 오프화이트의 창립자이자 루이 비통 남성 컬렉션의 아트디렉터인 버질...
안녕, 패션에 관한 글을 쓰는 객원 필자 이예은이다. 버질 아블로가 세상을 떠났다.…

2021. 12. 08

안녕, 패션에 관한 글을 쓰는 객원 필자 이예은이다. 버질 아블로가 세상을 떠났다. 오프화이트의 창립자이자 루이 비통 남성 컬렉션의 아트디렉터인 버질 아블로는 2021년 11월 28일 일요일,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019년에 희귀암 판정을 받았지만, 철저히 비밀리에 투병 생활을 이어왔던 터라 갑작스러운 소식에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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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질 아블로는 유럽계 백인 디자이너들이 점령한 럭셔리 업계에서 LVMH (루이 비통 모에 헤네시 그룹) 사상 최초의 흑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다. 2009년 펜디 인턴을 거쳐 2018년 루이 비통 디자이너로 최정점에 오르기까지 버질 아블로가 현대 패션계에 끼친 영향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오늘은 그가 세계 패션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보려고 한다.


[1]
칸예 웨스트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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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질은 아프리카 가나 출신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미국 대학에서 패션과는 무관한 토목공학과 건축학을 전공했다. 한마디로 패션 디자이너로서 비전형적인 코스를 밟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시카고에서 자라면서 힙합을 듣고, 마이클 조던을 좋아하고, 스니커즈와 나이키, 그래피티, 스케이트 보드 문화를 동경하며 자랐는데 이 취향은 그의 미학을 완성하는 근본이 된다. 스트릿웨어 컬쳐에 빠지게 되면서 마침내 프린팅 기계를 이용한 자신만의 프린트 티셔츠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가수 칸예 웨스트(현재는 ‘Ye’로 개명한)를 만나 칸예 웨스트의 머천다이즈, 앨범, 투어 굿즈, 무대 세트 등의 디자인을 담당하면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다.

1400_Virgil-Abloh-by-Alessio-Segala (1)©Louis vuitton

그리고 2009년, 럭셔리 패션에 대한 탐구욕이 커진 칸예 웨스트와 함께 LVMH 산하 이탈리안 럭셔리 브랜드 펜디에서 인턴십을 시작한다. 그때 당시 한 달 월급은 500달러. 하지만 그곳에서도 스트릿웨어를 기반으로 한 버질의 미학은 꿋꿋했다. 가죽으로 된 조거 팬츠를 디자인했다가 디자인팀에게 거절당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명품 브랜드에서 스트릿 스타일의 제품이 나오는데 흔한 일이지만, 당시 명품 브랜드의 디자인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그건 마치 나이키에서 한복을 만드는 것과 같은 언밸런스함이긴 했다. 그러나 그 인턴십 과정에서 버질은 당시 펜디의 CEO였던 마이클 버크의 눈에 띄게 되었다. 여기까지 보면 마치 럭셔리 업계에 성공적인 첫발을 내딛는 듯 하지만, 인턴십을 마친 후 함께 찾은 파리 패션위크에서 흑인으로서 철저한 아웃사이더로 취급 당하게 된다. 콧대 높은 유럽의 하이 패션 업계의 높은 벽을 실감한 것이다.

1400_4.02.12©GQ style, Gueorgui Pinkhassov

이후 2010년엔 칸예의 크리에이티브 디자인 팀 DOND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어, 매튜 윌리엄스(현 지방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제리 로렌조(현 피어오브갓 창립자), 사무엘 로스(현 어 콜드 월 창립자) 등과 함께 칸예 웨스트의 음악과 활동에 관련한 전반적인 비주얼을 주도한다.

2012년엔 당시 지방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현재 버버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리카르도 티시와 함께 ‘Watch the Throne’으로 54회 그래미 어워즈 베스트 레코딩 패키지 후보에 오르며 점차 세상에 버질 아블로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2]
레디메이드 패션, 파이렉스 비전 런칭

virgil-abloh-biggest-career-moments©Complex Original, Peggy Khammanotham

버질이 패션 분야에 존재감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2011년 뉴욕에서 스트릿웨어 브랜드 파이렉스 비전(Pyrex Vision)을 런칭하면서 부터였다. 파이렉스에서 버질은 기성 럭비 플란넬 셔츠에 그가 존경하는 마이클 조던의 백넘버 23과 파이렉스 로고를 함께 찍어 판매했다. 인기 없는 40달러짜리 폴로 랄프로렌 셔츠를 대량으로 사들여 거기에 약간의 커스텀만한 뒤, 500달러가 넘는 가격으로 뻥튀기해 판매하는 신개념의 장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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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질 아블로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디자이너라고 정의하지 않았다. 그의 방식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사물에 새로운 개념을 더하는 현대 미술의 한 장르인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맥락을 같이한다. 실제로 그도 자신의 디자인 철학은 기존의 것에서 3%정도만 바꾸고 뒤틀어 재밌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라 밝힌 바 있다.

과거 화장실 변기로 만든 마르셀 뒤샹의 작품이 예술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되었던 것처럼, 원래 있던 셔츠보다 수십 배 비싸진 파이렉스의 제품은 많은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수많은 셀러브리티가 입으면서 브랜드는 점차 유명해졌다. 파이렉스의 셔츠가 전세계적인 유행템이 되고 브랜드의 주가는 점점 올라갔지만 버질은 박수 칠 때 떠났다.  브랜드보다는 프로젝트에 가까웠던 파이렉스 비전을 1년 만에 접은 거다.


[3]
오프화이트 런칭

1400_chiara-capirani-off-white-ss17-campaign-nss-magazine-cover©NSS Magazine, Piotr Niepsuj

버질은 2012년 F/W 발렌시아 컬렉션에 등장한 볼드한 레터링이 박힌 스크린 프린트 티셔츠를 보고 스트릿웨어 무드가 럭셔리 패션계에 들이닥칠 분위기를 감지한다. 스트릿웨어 브랜드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그래픽 티셔츠가 럭셔리 브랜드 레이블 아래 만들어지고, 수많은 셀러브리티들이 그 티셔츠를 입는 것을 목격하자 스트릿웨어가 하이패션을 넘보기 시작했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몇 개의 프로젝트를 통해 패션에 관한 실험을 마친 버질은 2013년, 파이렉스 같은 정통 아메리칸 스트릿웨어가 아닌 이탈리아 밀라노를 베이스로 하는 고급 스트릿웨어 디자이너 브랜드, ‘오프화이트’를 런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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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화이트는 스트릿 패션에 하이엔드를 접목시켰다. 비싸고 질 좋은 스니커즈를 만들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스트릿웨어와 럭셔리 패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마치 공사장 표지판을 연상하게 하는 노란색과 검은색이 교차된 패턴과 화살표, 대각선 줄무늬, 케이블 타이를 브랜드 상징으로 내세운 오프화이트는 디자이너의 화려한 인맥에 힘 입어 빠르게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그 결과 브랜드 런칭 1년 만에 럭셔리 패션 업계에 큰 영향력이 있는 시상식, 2015년 LVMH 프라이즈의 후보에 오르며 하이엔드 레이블 디자이너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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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화이트는 에비앙, 이케아, 맥도날드, 바이레도 등 글로벌 기업과 협업하면서 마니아 사이에서만 머물러있던 스트릿웨어 스타일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그 중에서도 전설이라 불리는 2017년 나이키와 THE TEN 스니커즈 협업은 브랜드와 버질에게 큰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이때도 버질은 새로운 디자인을 보다는, 기존에 이미 나이키 스니커즈가 가지고 있던 모양과 요소에 자신의 감각을 더해 조금씩 편집하고 재배치하여 만들었다. 하지만 이 스니커즈가 큰 인기를 끌면서 한정판 열풍의 주역이 되었고, 이는 브랜드 인지도를 엄청나게 올리는 계기가 됐다.

운동화 리셀 시장에서 프리미엄 잔뜩 붙은 스니커즈의 말도 안 되는 가격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다면? 버질은 그 판을 키운 주요 인물 중 하나로, 원망을 피해가긴 어려울 것이다.


[4]
게임 체인저 버질 아블로, 그리고 루이 비통


[버질아블로의 루이 비통 2019 S/S 데뷔쇼]

나이키와의 협업과 오프 화이트의 성공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버질 아블로는 펜디 인턴시절부터 그의 떡잎을 알아본 전 펜디의 CEO이자 현 루이 비통 CEO 마이클 버크의 제안으로 2018년 루이 비통 남성 컬렉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다. 그는 루이 비통 2019 S/S 남성복 데뷔쇼에서 세상의 모든 색깔을 포용하는 듯한 무지개 런웨이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무지개처럼 화려한 형형색깔의 옷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루이 비통이 찾아왔다는 선포였고, 동시에 럭셔리 업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 것이라는 예고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스트릿웨어 브랜드처럼 변해버린 루이 비통을 낯설어 하는 이도 있었지만 신선한 변화임은 분명했다. 버질 아블로는 이렇게 2010년대 격변하는 패션씬 속, 베트멍과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 후드바이에어와 헬무트 랭의 셰인 올리버 더불어 스트릿웨어를 럭셔리 시장에 끌어왔고, 서브 컬쳐와 하이패션의 경계를 허물었다.

2012년엔, 발렌시아가를 이끌던 니콜라스 제스키에르의 컬렉션을 보고 스트릿웨어 디자이너가 럭셔리 업계에 진출할 가능성을 넘봤던 버질 아블로는 그로부터 6년 후, 루이 비통 여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제스키에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루이 비통 남성복 라인의 수장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수십 개의 명품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 LVMH 그룹 역사상 최초의 흑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다. 패션 비전공자이자 미국 출신의 흑인 디자이너가 메인스트림의 정점인 루이 비통에서 이름을 알렸다는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그의 이런 성공은 더 이상 개인적 성취의 영역이 아닌,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공표와도 같았다.

1400_4.14.47[루이 비통 데뷔쇼 후 “You can do it too,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문구와 함께 인스타그램 포스트를 올렸다.]

9년 전, 파리 패션 위크를 참석했을 때 그곳에 속하지 못한채 철저한 아웃사이더라고 느끼던 흑인 디자이너는 루이 비통 데뷔 컬렉션 피날레에서 절친 칸예 웨스트와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160년 루이 비통 역사상 가장 ‘컬러풀’했던 런웨이가 끝난 이후였다. 앞서 설명한 전후 사정을 모른다면 다 큰 성인이 뭐가 그렇게 슬펐을까 싶겠지만, 그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헤쳐나간 고난과 성장 서사를 생각하면, 괜히 나도 두 사람 사이에 껴 같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싶어진다.

“다양성은 마케팅 수단이 아니라, 현대적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의 핵심이다”. 버질 아블로는 다양성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피부색, 그리고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 나이키와 협업해 흑인 테니스 선수 세레나 윌리엄스의 유니폼을 디자인하고, 2017년 이민자 프랑스 축구팀 멜팅 패시스의 유니폼 제작하는 등 지속적으로 유색인종 커뮤니티와 교류해왔다. 또한 예술의 힘이 미래 세대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고 깊이 믿었던 그는 자신의 첫 루이 비통 쇼에 3,000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초대하고, 2020년엔 흑인 패션 학도들을 위해 장학금 기금을 시작하는 등 교육과 인재 양성에도 힘쓰며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기 위해 힘썼다.

버질 아블로 2010년대 격변하는 패션씬의 중심에 있었던 가장 동시대적이고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였다. 전통적인 패션 산업의 경계를 허물고, 서브 컬쳐였던 스트릿 문화를 주류 문화로 끌어올렸고, 패션 디자인계에 새로운 현대 미술적인 개념을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창의적인 인재들이 인정받고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럭셔리 패션계의 높은 벽을 낮췄다. 이렇게 버질의 존재와 성공은 수많은 이들의 영감이 되었고, 나 역시 그가 보여주는 과감함과 진취성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앞으로 다양한 형태로 펼쳐질 비전을 늘 기대했다.

버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생전 그가 좋은 사람임을 증명하듯이 디자이너, 브랜드, 에디터, 연예인, 수많은 패션계 동료들의 추모글이 쏟아졌다. 그의 죽음 이틀 후 마이애미 항구에선 열린 버질이 참여한 마지막 루이 비통 쇼이자 버질을 추모하는 <Virgil was here 버질 아블로는 이 곳에 있었다> 열렸고, 리더 없이 런웨이에 오른 루이 비통 남성복 디자이너팀은 눈물을 훔쳤다.

사실 너무 일찍이 생을 마감한 그에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무궁무진했던 그의 재능이, 아깝고 안타깝다는 말밖엔. 하지만 짧은 생 동안 버질이 남긴 유산과 그 이름은 현재도, 앞으로도 수많은 이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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