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음악평론가 차우진이야. 확실히 최근 몇 년간 8~90년대의 감수성이 화제였다. 간식, 장난감 외에 패션, 음악, 디자인, 공간에 이르는 명백한 흐름들. 그런데 생각해보면, 2000년 초반부터 지금까지 8~90년대의 유산은 재발견되고 있다. 레트로든 뉴트로든 200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경향이란 얘기다. 대중음악, 나아가 팝 컬쳐 전반에 걸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단 한 번 살펴봐도 좋을 것 같다.
본격 ‘레트로’ TMI
2005년, 쿨이 공식 해체한 뒤 미디어에는 ‘90년대의 종말’이란 상징적인 헤드라인이 등장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뒤인 2007년부터 GMF(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의 성공, 김동률의 귀환, 유희열의 방송 활동 등이 주목받으면서 ‘90년대의 귀환’ 같은 레토릭이 출현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10년도 안 된 시점부터 ‘90년대 한국 대중문화’는 미디어에서 역사적 성과이자 일종의 감수성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익숙한 칩튠(80년대 비디오 게임의 BGM으로 쓰이던 8비트 사운드를 활용한 비트)이 메인스트림에서 주목받은 게 2007~2010년 사이의 일이었는데, 이런 ‘레트로 사운드’는 사실 2004년 소니에서 ‘21세기의 워크맨’을 목표로 출시한 PSP와도 관련이 적지 않다. 당시 PSP는 모바일 게임기였지만, 실제로는 (지금의 스마트폰처럼) 모바일 컴퓨터였다. 이 휴대성 좋은 고성능 게임기는 게임 마니아층에서나 공유되던 에뮬레이터(8비트 게임을 32비트 환경에서 구동시키는 소프트웨어)를 대중적인 소프트웨어로 확산시켰다. 한편 같은 시기에 싸이월드를 중심으로 올림푸스 펜 EE3나 로모 카메라 같은 필름 카메라, 미니룸의 도트(dot) 디자인에서 파생된 아트웍 등이 유행하면서 당시 ‘젊은이’들은 20세기 대중문화를 인터넷 커뮤니티의 하위문화로 향유하기 시작했다.
Kanye West – Love Lockdown
2007~2008년, 원더걸스는 “Tell me”, “So hot”, “Nobody”의 연속 히트로 ‘복고풍’이란 말을 유행시켰다. 2008년 말에는 카니예 웨스트가 롤랜드의 TR-808 드럼머신을 본격적으로 활용한 4집 <808s & Heartbreak>를 발표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한국에서 바이닐(LP) 시장의 가능성을 증명한 레코드페어는 2011년에 처음 열렸고, 그해 11월에는 1호 브랜드로 ‘프라이탁’을 선정한 <매거진 B>가 창간했다. 과거지향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주제로 삼은 <킨포크> 매거진이 미국에서 등장한 것도 2011년이었다.
2012년에는 80년대 아케이드 게임을 소재로 삼은 디즈니의 <주먹왕 랄프>가 개봉해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라이온 킹>, <라푼젤>, <알라딘>에 이어 역대 총 매출 4위, 개봉 첫 주 역대 최고 매출을 기록했다(이 기록은 <겨울왕국>으로 깨졌다). 그해, 일민 미술관에서는 20세기의 한국의 광고 역사를 다룬 [광고와 미술, 대중]이 미술 전시로서는 이례적인 성공으로 화제가 되었다.
Quicksilver(1986)
[8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픽시 문화를 다룬 영화 <퀵실버>(1986)의 한 장면. 케빈 베이컨이 주연을 맡았다]
2007~2012년 무렵에 ‘복고’는 라이프스타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픽시 자전거, 크래프트 맥주, 필름 카메라, 드립 커피 같은 ‘20세기의 유산’ 뿐 아니라 베를린, 포틀랜드, 제주도 같은 지역이 ‘힙’하면서도 ‘대안’적인 가치로 여겨졌다.
2014년에는 홍대 앞에 <즐거운 작당>이라는 만화방이 오픈해 ‘21세기 만화방’의 유행을 이끌었고, 같은 해 마포구 도화동에서는 프릳츠 커피가 오래된 2층 주택을 개조한 매장으로 오픈했다.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가 번역 출판된 것도 바로 2014년이다. 그 다음 해인 2015년에는 을지로 ‘신도시’가 오픈했고, <킨포크 코리아>가 론칭했다. 2016년에는 뮤직비디오, 영화, 드라마, 유튜브 콘텐츠의 촬영 장소로 유명한 롤캣 롤러장이 인천에서 문을 열었는데, 한국에서 ‘레트로’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히치하이커 – 11
2014년, 히치하이커의 “11”, 2015년 혁오의 “와리가리”, 키쓰 에이프의 “잊지마”, 프라이머리의 “Island”(w/오혁)의 뮤직비디오와 함께 ‘베이퍼웨이브’라는, 8~90년대의 신스 사운드와 그래픽 요소들을 대범하게 활용하는 인터넷 밈(meme)이 알려졌고 이후 시티팝이 유행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6년 빅뱅의 “에라 모르겠다”는 메인스트림에서 처음으로 성수동, 연희동, 왕십리, 마장동, 숭인동 골목과 상점을 뮤직비디오에 담았다. 현재 이 장소들은 ‘레트로의 성지’이자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 중 일부가 되었다.
Post Malone/Swae Lee – Sunflower
2017년, 나이키는 에어맥스 20주년을 기념해 뽈록이 스우시(Jewel Swoosh)가 부착된 에어 맥스1을 재출시했고 2018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은 6년 전 <주먹왕 랄프>와 비슷하지만 다른 태도로(그러니까 작가가 아닌 팬의 마음으로) 80년대의 서브컬쳐를 다뤘다. 같은 해에 개봉한 <스파이더 맨: 뉴 유니버스>는 종이 만화책의 질감을 디지털로 재현하는 신선하고 참신한 방식을 제시했다.
양준일 – 리베카
2018~9년에는 시티팝이 대량 소비되면서 네이버의 ‘디깅 클럽 서울’ 프로젝트로 90년대 언더그라운드 가요들이 재조명되었고, 2019년에는 유튜브의 SBS KPOP CLASSIC 채널에서 24시간 스트리밍 기술 점검을 위해 송출한 90년대 <SBS 인기가요> 스트리밍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온라인 탑골공원’으로 불리는 일도 생겼다. 이 과정에서 “레베카”의 양준일은 일종의 신드롬이 되었다.
‘레트로’에 대해 평론가처럼 말하자면…
디지털은 사실상 방대한 콘텐츠 자료실이다. 고속 통신망과 모바일 환경은 이 거대한 가상 자료실에 누구나 접속할 수 있게 했다. 일상적 접속 상태야말로 디지털 인프라의 핵심이고, 과거에 대한 대규모의 접속 없이 ‘레트로’라는 현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레트로’는 90년대 혹은 2000년 이후 태어난 세대에게 낯설면서도 매력적인 감각의 향연이다. 디지털 콘텐츠 소비가 공간에 대한 향유로 확장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때 가상보다 실제가 더 가치있다고 구분짓기보다는, 어느 쪽이든 ‘분위기’가 매우 중요하다는 걸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긍정하는 쪽이다. 이 ‘느낌적인 느낌’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정신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렇다면 ‘레트로’는 ‘실제’와 ‘실제 같은 것’이 대결하고 충돌하는 동안 파생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어느 때보다 과거와 현재가 강하게 밀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보다 현실’감’이 더 큰 가치를 가지는 시대랄까. 나는 이 미지의 감각이 현재의 ‘레트로’를 지탱하는 동력이라고 본다.
이때 우리는 “레트로는 왜 유행일까?”라는 질문 대신 “레트로가 유행처럼 보이는 이유가 뭘까?”라고 물을 수 있다. ‘레트로’라는 현상을 몇 개의 키워드로 분석하기보다는, 스스로가 그 감각을 어떻게 받아들이면서 갖고 노는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거부하고 회피하는지 살피는 게 좀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질문의 방향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결과적으로 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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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진
음악/콘텐츠 산업에 대한 뉴스레터 '차우진의 TMI.FM'을 발행하고 있다. 팬덤에 대한 책 [마음의 비즈니스], 티빙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을 제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