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는 ‘과거의 오늘’이라는 기능이 있다. 말 그대로다. 1년 전일 수도 있고, 5년 전일 수도 있는 과거의 오늘 게시한 글과 사진을 리마인드 시켜주는 기능이다. 이따금 확인해보면 재밌다. 잊고 있던 과거의 인연이 생각날 때도 있고, 과거의 내가 왜 저따위 감성글을 써놓았는지 해킹을 의심하게 만들 때도 있다. 그리고 알게 된다. 과거의 오늘과 진짜 오늘 사이에 생각보다 많은 게 바뀌었다는걸. 사실 스스로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엇비슷하게 닮아있건만 점처럼 작은 하루가 새까맣게 모이면 왜 모든 게 달라지는지. 알 수 없다.
분명 맥북 프로 16인치에 대한 글을 읽으러 들어오셨을 텐데, 왜 인생에 대한 넋두리만 늘어놓는지 궁금하실 것 같다. 나의 결론은 인생이 어떻게 변해가는지에 대한 단서를 가장 명확한 곳에서 찾기로 했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내가 매일같이 쓰고 있는 물건, 노트북처럼.
앞서 언급한 ‘과거의 오늘’ 기능 덕분에 2017년 첫 리뷰의 주인공이 맥북 프로였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3년 전의 나는 터치바와 터치ID를 처음 경험하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심지어 내 인생 첫 맥북 프로였다. 그 전까지는 저전력 모바일 프로세서를 탑재한 12인치 모델을 쓰다 건너갔으니 얼마나 많은 게 바뀌었겠는가. 하루하루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모든 속도가 빨라졌다. 노트북을 사용할 때의 사소한 습관마저 바뀌었다. 그렇게 쓰는 게 더 편했던 게 아니라, 노트북 성능이 받쳐주지 않아 생긴 습관이었다.
3년이 지나 2020년의 첫 리뷰는 맥북 프로 16인치가 됐다. 이번엔 내 일상이 어떻게 바뀔까.
[왼쪽이 맥북 프로 13, 오른쪽이 새로운 맥북 프로 16]
16인치 모델은 기존의 15인치 모델을 단종시키고 나온 뉴페이스다. 하지만 겉모습만 봐서는 달라진 걸 한눈에 눈치채기 어렵다. 특히 기존에 15인치 맥북 프로가 아니라 13인치를 쓰던 내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15인치 모델과 나란히 두면 그제야 차이가 보인다. 화면을 키우면서도 제품 자체의 크기는 유지하기 위해 좌우 베젤을 훨씬 줄였다. 화면 비율이 높아진 만큼 몰입감도 더 좋다. 물론 LCD의 구조적인 문제로 상단 베젤은 완전히 줄이진 못했다. 15인치 맥북과 비교했을 때 가로 세로로 길이도 차이가 나지만 무게도 살짝 늘어났다. 숫자만 봤을 땐 변화가 크지 않지만 확실히 휴대성에서 압박이 느껴진다.
[왼쪽이 새로운 16인치 맥북 프로, 오른쪽은 이번에 단종된 15인치 맥북 프로]
화면이 더 커지면서 픽셀수가 늘어난 걸 제외하면 디스플레이 스펙은 전작과 거의 동일하다. 최대 500니트의 밝기와 P3 와이드 컬러 색영역을 지원한다.
이젠 자세한 스펙과 옵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보자. 맥북을 사면서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느끼는 압박이 “이건 빼박이다”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빼도 박도 못한다. 처음 구매할 때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채워 넣은 옵션이 영원히 간단 얘기다. 메모리고 스토리지고 그래픽이고 전부. 그러다 보니 고민이 깊어진다. 심지어 프로 모델을 고를 정도로 고사양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겠다. 이런 여러분의 깊은 고민을 헤아리기 위해 나는 풀옵션 모델을 사용하고 있다. 직접 써보고 어떤 게 진짜 필요한 옵션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자, 이제 16인치 맥북 프로를 구입하려는 분들의 고민을 시작부터 시뮬레이션해보자. 먼저 기본형과 고급형 중에 선택할 수 있다. 여기부터 고통스럽다. 프로세서와 그래픽 카드, 코어수도 다르지만 저장 공간도 크게 차이가 난다. 시작 가격은 각각 319만원, 369만원. 차이가 무려 50만 원이라 종용하기 어렵지만 기왕 16인치의 세계로 왔는데, 50만 원 더 쓰시길 추천드린다. 기본형은 SSD 저장공간이 512GB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어차피 일정 금액 이상 추가되어야 할 몸이다. 319만원의 가격을 액면 그대로 믿어선 안된다. 다른 건 몰라도 몇 년 간 맥북 프로를 쓰며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다. 프로 모델은 무조건 1TB부터 시작해야 한다. 특히 영상에 손을 댈 거라면 그 밑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내가 2016년형 맥북 프로 512GB로 시작해서 2018년형 맥북 프로 2TB로 옮긴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고급형을 선택했다면 프로세서, 메모리, 그래픽, 저장 장치의 네 가지 옵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모든 옵션을 최고치로 올리면 369만 원이 순식간에 770만 원까지 치솟는다. 신중해야 한다. 어떤 작업을 하느냐에 따라 선택지는 다양하게 갈릴 것이다. 하지만 또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 하나는 메모리는 32GB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49만 원이 올라간다. 애플의 메모리 옵션은 정말 더럽고 치사하도록 비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메모리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64GB면 더 좋다. 기존에는 16GB로도 충분했는데, 막상 64GB 메모리로 방을 넓히고 나니 메모리를 운용하는 스케일이 달라진다. 결과로 가는 모든 과정이 빨라진다. 공부로 치면 항상 미리미리 예습하는 느낌. 나중에 후회하면 이미 늦는다. 올리고 시작하자.
동영상 편집이나 3D 작업, 대용량 이미지 처리 등이 주를 이룬다면 그래픽 옵션도 슬며시 손을 대보자. 8GB 메모리의 AMD 라데온 프로 5500M을 선택하면 12만 2,500원이 추가된다. 기본으로 들어간 8코어 인텔 코어 i9의 성능이 뛰어나기 때문에 프로세서 클록을 올리는 건 사용자의 작업 환경을 고려해 선택하면 되겠다.
[썬더볼트 단자를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저장 장치는 1TB 이상이라면 약간의 모자람은 사용자의 부지런함으로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썬더볼트3 포트가 4개나 달렸으니 외부 저장 장치를 활용해도 좋고, 클라우드 서비스나 NAS도 있으니까. 물론 자금 사정이 허락한다면 올리자. 내부 저장 장치만큼 빠른 건 없으니까.
사실 신형 맥북 프로 16인치에는 구형(?) 프로세서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스캔들에 시달리고 있다. 사실이다. 전작에도 들어간 인텔의 9세대 프로세서가 똑같이 쓰였다. 컴퓨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세서가 업그레이드되지 않았으니 약간은 김 새는 일이다.
삼성전자의 신형 노트북인 플렉스나 이온에는 10세대 인텔 프로세서가 떡하니 들어갔던데 왜 애플만 이러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다. 맥북 프로 시리즈에 들어가는 프로세서는 인텔에서도 ‘H 시리즈’라고 부르는 고성능 라인인데, 현재 10세대 프로세서는 저전력 프로세서 밖에 출시되지 않았다. 인텔과 협업하는 이상, 불가피하게 재활용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는 거다. 이러나 저러나 김새는 건 똑같지만.
그래서 애플은 면피를 위해 열관리 아키텍쳐를 완전히 다시 설계했다. 내부의 발열 팬 블레이드도 훨씬 커지고, 공기 순환도 개선했다는 설명이다.
사실 i9을 탑재한 기존 맥북 프로 15인치를 사용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정말 발열이 어마머마하다. 비행기 이륙하는 것 같은 소리를 안고 작업해야하는 것이 숙명이었다. 16인치 맥북 프로에서는 확실히 열관리가 탁월해졌다. 영상 트랙패드 좌우의 작업 공간에서 손바닥에 전해지는 열기부터가 다르다. 효과적으로 발열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퍼포먼스 향상에 도움이 됨은 물론이다.
동영상 작업만큼이나 사진 작업도 많이 하는 편인데, 맥북 프로 13인치를 쓸 때만해도 사진 촬영에 기본이 RAW+jpg였다. 보정 작업은 관용도가 높은 RAW 파일로 하더라도, 촬영 후 결과물을 확인할 땐 용량이 1/10로 작은 jpg로 열어보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젠 RAW 파일도 미리보기로 읽어내는데 크게 딜레이가 없다. 라이트룸에 몇 백 장의 RAW을 불러내서 바로 골라내고 작업한다. 더이상 미리보기용 jpg 파일까지 저장해두는 비효율성은 필요없게 되겠다.
단순히 성능 외에도 예상 못한 부분에서 많은 변화를 꾀했다. 내장 마이크를 완전히 다시 만들어서 조용한 공간만 확보 된다면 팟캐스트 용으로도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의 퀄리티를 내준다.
개인적으론 스피커에서 압도당했다. 노트북 스피커에서 이 정도 입체감과 출력을 느끼다니. 돌비 애트모스를 지원하는 콘텐츠를 맥북 프로 16인치로 감상한다면 과장 조금 보태서 4D 영화관에 있는 기분이 들 정도다. 훌륭하다. 소리가 좌우로 이동할 때의 공간감이 뚜렷해서 화면앞에 앉아있으면 소리가 나를 둥글게 둘러싸는 것만 같다.
좌우에 3개씩 내부에 총 6개의 스피커가 들어있는데, 저음 표현력도 상당한 스피커라 진동이 염려될 수 있다. 다행히 사용해보니 팜레스트 영역에서 진동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부에 우퍼 두 개를 달아서 서로의 진동을 캔슬링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더라.
키보드는 적응 중이다. 처음엔 좋았다. 일단 정숙하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줬다. 애플은 그간 가위식 키보드를 대체할 차세대 키보드로서 나비식 매커니즘을 줄기차게 밀어왔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아이돌 그룹 중에서 소속사가 주구장창 밀어주는 애 수준으로. 근데 이상하게 인기가 없는 거다. 다들 가위식 키보드의 야트막한 키 트래블과 딸깍거리며 반응하는 소란스러움을 싫어했다. 모르겠다. 설문조사를 한 건 아니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다 그랬다.
[키 높이가 거의 없는 나비식 키보드]
나의 경우엔 나비식 키보드가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본래 맥북 12인치를 공개하며 극단적으로 얇은 노트북 바디를 위해 최소한의 높이로 설계한 게 바로 나비식 키보드다. 키 높이를 낮추기 위해 가위 처럼 X자로 교차하던 눌리는 깊이가 야트막하기 때문에 물렁거리는 느낌 없이 안정적이지만, 흔히 말하는 손 맛이 부족하다. 게다가 촉감 피드백을 소리로 대체하다보니 1세대 나비식 키보드는 유난히 시끄러웠다. 눌리지도 않는데 짤깍 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달까.
[나만 좋아하고 다들 싫어하는 나비식 키보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비식 키보드의 단단함이 좋았다. 키 트래블이 야트막하기 때문에 깊게 눌리지도 않고, 깊게 누를 필요도 없었다. 마치 디지털 가상 키보드처럼 손끝을 대고 살짝살짝 힘을 주면 되기 때문에 손가락에 느껴지는 피로감이 적었다. 물렁한 느낌 없이 안정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좋았다. 하루 종일 글을 쓰는 직업이기 때문에 키보드에 대한 취향이 더 확실했던 것 같다.
[다시 살아난 손맛, 새로운 가위식 키보드다]
나비식 키보드는 3세대까지 업그레이드를 거듭하며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에 맥북 프로 16에서는 가위식 키보드가 컴백했다. 가위식 키보드를 그리워하는 사용자들의 입김도 작용했을 것이고, 나비식 키보드의 내구성 이슈도 한몫했을 것이다. 신제품에 들어간 가위식 키보드는 애플의 블루투스 키보드인 매직 키보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부드럽고 푹신하게 눌리고 쿠션이 받쳐주는 것처럼 조용하게 반응하는 키보드다. 현재까지는 평가가 매우 좋다. 나도 마음에 들었다. 근데 며칠 쓰다보니 손가락이 조금 뻐근하다는 느낌이다. 아직은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해서인지 1mm의 키트래블이 손가락 하이킹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적게 움직이고 싶어하다니, 나라는 게으름뱅이. 손가락도 운동 부족인거 인정한다. 여튼 적응중이고, 잘 만든 키보드라는데는 이견이 없다.
덧붙이자면, 개발자들의 호소로 물리 esc 버튼이 돌아왔다. 터치바 좌측에 esc 버튼만 이질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방향키 역시 눈으로 보고 누르지 않으면 좌우 구분이 어렵다는 피드백을 받아 ‘ㅗ’모양으로 재설계했다. 좌우 방향키 상단에 여백이 생겨 손으로 더듬어서도 식별이 쉽게 하기 위함인데, 그 바람에 키가 너무 작아져서 나는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진다. 키보드의 한글 각인과 영문 각인의 위치가 바뀐 것도 특징이다. 원래 영문키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었는데, 시선이 가기 편한 좌측 하단에 한글을 넣어서 보기에 편해졌다.
쓰면 쓸수록 과연 프로를 위한 제품이다. 옵션을 선택하기 따라서는 데스크톱마저 대신할 수 있을 퍼포먼스다. 모두에게 필요한 제품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바꿔줄 만한 제품이란 얘기이기도 하다. 과연 나는 이 제품이 필요할 정도의 프로인가 하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 얼리어답터로서는 그저 즐거울 따름. 맥북 프로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에 더 준비해보겠다. 올해 첫 제품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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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