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휴가에도 도시만 찾아다니는 뼛속까지 도시인,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나는 산도 들도 별 관심 없다(바다는 좀 관심 있다. 물을 좋아하거든). 사람이 붐비는 도시,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에너지를 좋아해서 여행도 큰 도시만 골라서 가는 편이다. 가장 좋아하는 도시는 우습게도 서울.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서 그런가? 잘 모르겠다. 나한테 서울은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새로운 면이 자꾸 눈에 띄는, 여전히 ‘모르는 도시’거든.
익숙함 안에 숨겨져 있는 낯섦을 찾아내는 건 매혹적인 일이다. 여기 이런 게 있어? 와, 이런 풍경은 처음 봐. 탄성이 터져 나올 때, 내가 살아가는 자리에서 순간적인 여행을 하는 듯한 감각이 든다. 또는 내 삶과 여행이 뒤바뀌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고.
‘시티 뷰’를 장착했다는 고층의 스팟 3곳을 찾아다니면서 나는 그런 감각 혹은 착각을 맛봤다. 동시에 신기한 점도 발견했다. 모두 17층에 위치했다는 것. 대체 17층의 비밀이 뭐길래?
커피 앤 시가렛
서울 중구 서소문로 116 유원빌딩 17층
지하철 시청역 출구로 나오자마자 왼쪽에 보이는 건물. 생각보다 너무너무너무 회사 건물 느낌이라 그냥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왔다. 진짜 여기라고? 의아해하면서 건물 회전문을 밀고 들어섰는데 정장 입은 남자분이 엘리베이터를 잡고 기다려주시는 게 보였다. 어엇. 생각해보고 탄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타고 보자. 17층을 꾹 눌렀다. 이 문이 열리면 사무실이 있을까? 카페가 있을까?
커피 앤 시가렛은 17층에서 내려서 우측으로 고개만 돌리면 찾을 수 있다. 옆에도 옆옆에도 사무실이 있는데, 투명한 유리 벽 안의 카페는 묘하게도 자연스럽다.
짙은 파란색으로 단정하게 꾸며진 공간. 묘하게 항공사 로고를 닮아있는 카페의 로고 덕분에 공항의 라운지에 와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카페에 들어서 창가에 자리를 잡았을 때,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순간 멈칫했다. 강남이 아니라 시청처럼 오래된 서울 시내에서 17층은 꽤 높은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 시선 아래로 쭈욱 펼쳐진 건물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너무 번잡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단정하지도 않은, 아주 서울스러운 시티 뷰.
커피 메뉴는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추천해주시는 시그니처 비엔나, 솔트 스카치 라떼 중 고민하다 아이스 솔트 스카치 라떼를 골랐다. 안 그래도 솔트 카라멜에 환장하는 나인데, 히말라야 핑크 소금을 써서 은은한 짠맛에 스카치 캔디를 닮은 부드러운 카라멜 향이라니.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커피의 맛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내 마음을 좀 잡아줬다.
르 꼬르동 블루 출신의 파티시에분들이 만든다는 구움 과자류도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옆에 함께 판매하고 있는 담배를 사보고 싶었다. ‘커피 앤 시가렛’은 커피와 담배를 함께 파는 곳이니까. 물론 카페 안은 금연 구역이다. 담배는 결국 안 샀고.
커피를 마시면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탁 트인 풍경에 없던 마음속 응어리도 스르륵 풀리는 느낌이었다. 새파란 하늘이 보이는 건 당연하고, 저 멀리 펼쳐진 산이 멋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건물 사람들은 참 좋겠다. 윗사람이 빡치게 하면 여기로 호다닥 달려와서 평온을 찾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창이 워낙 커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건지 창 안에 들어앉아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와, 저기 산 좀 봐.”
“북한산인가본데?”
“저 건물 OOO 맞지?”
“그치. 저기 덕수궁도 보인다!”
“시청은 이쪽이고?”
“아니, 그쪽 아니고.”
옆 테이블 사람들이 풍경을 보며 나누는 이야기를 듣다가 피식피식 웃었다. 이런 대화가 가능한 카페라니. 반대쪽 테이블에서는 혼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사람이 보였다. 종종 고개를 들어 풍경의 먼 곳을 내다보는 것 같았다.
커피 앤 시가렛은 프로젝트 브랜드 Instant Vacation Club과 함께 진행되고 있다.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 건강한 세상을 만든다’는 Instant Vacation Club의 소명에 따라 만들어진 커피 앤 시가렛의 슬로건은 ‘Express Time Out’.
마음이 쪼그라들고 뾰족해질 때면 잠시 타임아웃을 외치고 여기로 달려와야겠다. 이 풍경, 이 공간 안에서 잠시 쉬면서 이 도시와 그 안의 사람들에 대한 건강한 애정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도록.
무신사 테라스
서울 마포구 양화로 188 17층
무신사 테라스는 홍대입구역 바로 앞에 위치해있다. 다들 알다시피 홍대에는 고층 건물이 거의 없다. 무신사 테라스가 있는 AK&홍대는 주변 건물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곳이라 그런지 17층까지 높이 건물을 쌓아 올렸더라. 그 꼭대기 층을 무신사 테라스가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무려 800평을 말이다.
찾아가기 전에 한가지 팁을 주고 싶다. 무신사 테라스에 가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5층 식당가까지 올라갔다가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다시 갈아타는 것. 두 번째는 1층 씨유 편의점을 마주 보고 안쪽에 숨어있는(?) 홀리데이 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방에 가는 것. 누가 봐도 당연히 후자가 편하다. 찾기 귀찮다고 몸 힘들게 하지 말고 머리를 쓰자.
땡. 17층의 문이 열리면 무신사 테라스가 눈 앞에 펼쳐지는데, 800평이라는 거대한 크기(?)가 공간의 여유로움을 확보해준다. 전반적으로 아이보리 톤으로 단정하게 꾸며져 있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음… 아래의 홍대 거리에는 복작복작 정신없게 사람들이 막 몰려다니는데 나만 여유로운 천국에 있는 것 같은 느낌…? 공간 구성은 크게 Shop, Kitchen, Park로 이루어져 있다.
Shop에서는 무신사 온라인에서 판매되고 있는 의류, 신발이나 가방 뿐만 아니라 음반이나 독립출판물 같은 다양한 아이템들이 진열되어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어떤 테마로 디스플레이를 하는지 물어보진 않았지만 내가 갔을 때는 보라색 아이템들 위주로 배치되어 있어 내 주변의 보라색 처돌이(욕 아닙니다 요즘 유행어래요) 친구들이 생각났다.
우주선을 닮은 듯한 Kitchen에서는 커피와 음료를 마실 수 있다. 주방인데 왜 디저트류는 없는 걸까? 시그니처 메뉴는 의외로 커피가 아닌 말차슈페너.
이름만 봐도 아인슈페너에서 변형된 메뉴라는 걸 알 수 있어서 맛은 별 기대 안 했다. 그런데 마실수록 진해지는 말차의 맛이 너무 매력적인 데다, 잘못 만들면 쓴맛이 쉽게 도드라지는 말차라떼의 단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마지막 방울까지 쪽쪽 빨아 마셨다는 후문. 이래서 음식엔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구.
주문한 음료를 실내에서만 마시는 건 바보 같은 짓. 문 하나만 열고 나가면 홍대 거리가 발 밑으로 쭈욱 펼쳐지는 Park가 있기 때문이다.
워낙 무신사 테라스가 크다 보니 의자도 많고 앉을 곳도 많고, 심지어 끝쪽 공간은 넓다랗게 비어(?)있다. 게다가 17층은 홍대 인근에서 유일한 초고층이다…!
홍대 거리의 시티 뷰는, 뭐랄까, 내 인생 같달까^^? 우리네 인생을 신이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렇겠구나 싶을 정도로 정신없는데, 그게 의외로 귀엽다. 사람들의 머리는 내 손톱만큼 작고 다들 뭐가 그렇게 바쁜지 뽈뽈뽈 잘도 돌아다닌다. 그 모습을 보면서 홀로 앉아 말차슈페너를 마시다 보니 노래가 하나 생각나더라. 이랑의 ‘신의 놀이’.
무신사 테라스는 Shop, Kitchen, Park 공간을 제외하고도 여백이 어마무시하게 넓었다. 다양한 전시, 이벤트, 프로모션 등에 사용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갔을 때는 빈백이 자유롭게 놓여 있었다. 날이 점점 쌀쌀해지니 밖은 둘러만 보고 여기에 퍼져 누워서 친구랑 시답잖은 소리 하고 있어도 참 좋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친구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아마 같이 오는 날보다 걔네를 기다리기 위해 시간을 보내려고 여기 오는 날이 더 많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함!께!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사람이 적은 편이지만, 얼마 안 가서 홍대의 만남의 광장이 될 것 같은 공간. “야, 무신사 테라스에서 봐.” “뭐? 10분 더 늦는다고? 알았어.” “너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맨투맨 샀잖아.”
참,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저녁 7시면 문을 닫는단다. 그래도 이제 해가 짧아지니 폭음 달리기 전에 노을 보러 오긴 안성맞춤일 듯. 우리 다음 주 금요일 노을 타임에 무신사 테라스에서 만나요!
티컬렉티브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449 17층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무와 식물의 기운으로 가득한 티컬렉티브는 삼성, 정확히 말하자면 삼성중앙역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강남의 느낌이 물씬 나는 심플한 건물 꼭대기에 이렇게 내추럴한 느낌이 충만한 공간이 있다니.
층고가 높은 편이라 전체적으로 시원시원한 느낌이 나고 유리창에는 하늘이 가득 담겨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 투박한 듯 모던한 가구들과 사방에 잘 배치된 식물들 덕분에 묘하게 이국적인 느낌도 든다. 서울에서 느끼는 제주? 혹은 치앙마이?
가장 마음에 드는 공간은 테라스. 위험하니까(17층이라고) 천장만 뚫려있고 사방은 유리창인 오픈형 테라스다. 바닥엔 흙이 깔려있고, 작은 연못과 대나무 숲이 다소곳이 자리한 테라스에 앉아 서울의 빌라와 아파트들을 내려다보는 시티 뷰를 즐긴다. 그러다보면 뭔가 묘한 감각이 들면서 마음이 편안해진달까.
티컬렉티의 메뉴는 다양한데, 시그니처티는 녹차, 홍차, 유자차, 생각차, 우엉차 등 의외로 친숙한 메뉴들이다. 그 외에 비타민이 들어간 비타민차, 두세가지 차를 섞은 듯한 블랜딩티도 준비되어 있다. 주문 전에 찻잎들의 향을 킁킁 맡고 선택할 수 있는데, 나같은 결정장애자들은 오히려 더 결정을 못하게 될지도. (그럴 땐 와인을 주문하자! 와인 메뉴도 많다)
단점이 있다면 주말엔 사람이 엄청 많아서 한 두 시간 웨이팅은 기본이라고 한다. 게다가 본점인 청담점의 리뉴얼 오픈으로 삼성점은 현재 취재를 위한 사진 촬영이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아쉽지만 인스타그램에 방문했던 분들의 좋은 사진을 모아 보여드린다. 사진만 봐도 ‘오 대박’ 소리 절로 나올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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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아론
글쓰고 향 만드는 사람. 에세이스트, 프리랜서 에디터, 향수 브랜드 ahro의 조향사까지. 예술적 노가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