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제주 숲속 작은 집에서의 하룻밤

안녕, 나는 디에디트의 객원필자 ‘기즈모’다. 오늘은 기계 얘기 대신에 제주도에서의 하룻밤 얘기를 해볼까 한다. 비 오는 제주도의 ‘봉성리 돌담집’에서 하루를...
안녕, 나는 디에디트의 객원필자 ‘기즈모’다. 오늘은 기계 얘기 대신에 제주도에서의 하룻밤 얘기를…

2019. 10. 11

안녕, 나는 디에디트의 객원필자 ‘기즈모’다. 오늘은 기계 얘기 대신에 제주도에서의 하룻밤 얘기를 해볼까 한다. 비 오는 제주도의 ‘봉성리 돌담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주변에 여행만 가면 항상 비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내 젊을 때 별명은 ‘레인메이커’였다. 내가 날짜만 잡으면 동남아시아에 우기가 시작된다. 신혼여행으로 간 보라카이에는 대형 태풍이 지나갔다. 과거 라스베이거스에 방문했을 때는 사막에 비가 3일 내내 내리기도 했다. 강수량이 부족한 지역이 있다면 나를 초대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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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제주도에 방문했을 때 불행 중 다행으로 ‘봉성리 돌담집’에 묵었다. 봉성리 돌담집은 제주도의 버려진 집을 개조해 여행자 숙소로 만드는 프로젝트 ‘다자요’의 두 번째 결과물이다. 지난번에는 ‘도순돌담집’에 가족과 함께 묵어 너무 만족스러웠기에 다자요의 두 번째 결과물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세련된 공간을 접하며 ‘역시!’라고 감탄사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도순돌담집이 ‘귤 밭에서의 하룻밤’이라는 테마였다면 봉성리 돌담집은 ‘제주 숲에서의 하룻밤’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분명 동네 한복판에 있는 집인데 무성한 제주 숲이 있었고, 그 숲속에 신기하게도 작은 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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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성리 돌담집 진입로는 마치 정글 입구 같았다. 비가 오긴 했지만, 아직 해가 지기 전인데도 진입로는 무척 어두워서 조명을 켜 놓을 수밖에 없다. 숙소 주변의 무성한 나무들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은 버스까지 다니고 사람들이 꽤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다자요는 버려진 집에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와 숲을 그대로 살려 마을 속에 제주숲이라는 안전하고 편리하면서도 이색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왜 수 많은 빈집 중에서 하필 이 집을 골랐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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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나무와 정글 사이로 봉성리 돌담집이 보인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제주 원시림을 탐험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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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다. 내부가 20평 정도 될까? 3~4인 가족이 오기 적당하고 연인이 오면 최선이다. 버스까지 다니는 안전한 마을에 존재하지만 숲으로 둘러싸여 비밀스럽고 조용한 아주 작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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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입구에는 돌담 앞에 앉아 잠시 쉴 수 있는 벤치도 마련돼 있다. 일본의 어느 작은 료칸에 온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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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주변을 둘러보면 볼수록 단순함과 아기자기함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숙소 뒤편으로 돌아가니 데크가 보였다. 데크에 의자를 놓고 앉아 고기도 구워 먹고 맥주도 한잔하기 좋겠다 했는데, 가까이 갈수록 그게 전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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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크 중에 덮개를 열어보니 작은 수영장이 있다. 사실 대형 욕조에 가깝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있다면 물놀이도 가능하고 여러 명이 들어가도 비좁지 않다. 주변은 나무와 돌담으로 둘러싸여 원초적인 모습으로 돌아다녀도 안전하다. 게다가 추가 비용 이런 것도 없다. 그냥 이용하고 싶은 만큼 이용하면 되는 프라이빗 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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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실내로 들어와 봤다. 역시 뼈대는 옛날집의 그것을 그대로 살렸다. 전체를 해체한 후에 천장을 뜯어내 층고를 높였다. 해체하며 살릴 수 있는 목재와 뼈대를 최대한 살리되 다시 색칠하고 복원한 후에 마감재를 발랐다. 벽은 다시 칠하고 바닥 역시 고풍스러운 목재로 다시 깔았다. 그래서 익숙하면서도 세련된 공간이다. 옛것이되 불편함이 없다. 건축가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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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에는 복도가 있고 복도 앞에 큰 폴딩도어가 있다. 여기에 앉아 비 오는 숲을 한참 바라봤다. 비가 좀 잦아지기에 폴딩도어를 다 열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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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딩도어를 열자 날 것 그대로의 작은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년간, 수십 년간 손대지 않은 마당이라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한참을 비 오는 숲을 바라봤다.

과거 제주에 놀러 올 때는 가야 할 곳과 맛집과 코스를 검색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동네 아무 카페나 아무 밥집에 가서 밥을 먹는다. 검색도 하지 않는다. 그냥 6천 원짜리 동네 한식뷔페에 가고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사 먹기도 한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 한참을 앉아 있거나 한참 바라보곤 한다. 인스타에 올릴 내용은 하나도 없지만 여행이 가슴속에 더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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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디에디트 독자들을 위해 내부를 좀 더 소개해야지. 내부는 거실과 큰 욕실, 부엌, 식탁 공간, 침실, 전실, 그리고 작은 화장실로 이뤄져 있다. 침실이 한 개지만 전실에 이불을 펴면 2~3명은 더 잘 수 있다. 전실에는 창이 있어 잠깐 앉아 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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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소파도 없지만 그냥 창틀에 편안히 앉아 커피 한 잔 옆에 놓고 돌담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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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은 정말 딱 두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여기서도 문을 열면 마당이 훤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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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은 욕조가 있고 세련된 간접 조명으로 이뤄져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문을 열면 수영장으로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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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요의 숙소는 뭐든지 대용량이다. 수건도 10여 개가 넘고 샴푸, 바디워시도 가득 들어 있다. 며칠을 묵어도 부족함이 없이 그득그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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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요 숙소에 오면 항상 감탄하는 것이 부엌이다. 그냥 예쁜 것이 아니라 실제 음식을 해먹고 생활하기에 불편이 전혀 없도록 모든 것이 다 갖추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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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양념부터 식용유, 간장까지 구비돼 있다. 구색만 갖춰 놓은 일반 숙소와는 차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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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드립 세트도 구비되어 있고, 원두 분쇄기부터 원두와 티 세트도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다. 일본의 무역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구입한 발뮤다 토스터와 발뮤다 더 팟도 있다. 은근 명품 사랑이 곳곳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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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어김없이 내 아침을 담당했던 발뮤다 더 토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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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은 역시 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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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은 욕실과 분리돼 따로 두었다. 작은 일본집에 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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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제주도에 집을 짓고 살고 싶었다. 대지 500평에 3층짜리 건평 80평짜리 저택을 짓고 살고 싶었다. 그런데 봉성리 돌담집을 보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작은 공간이지만 부족함이 없고 정겨우며 풍족하다. 청소도 쉬울 것 같다. 아니, 이런 집이 있는데 왜 내가 굳이 짓고 소유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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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제주도는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봉성리 돌담집에서 머무는 시간만큼은 충실한 시간이었다. 줄을 한참 서야 하는 맛집과 꼭 보러 갈 관광지도 모두 머리속에 지웠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비를 맞으며 음악만 틀어 놔도 제주도 여행이 꽉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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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요의 프로젝트들은 제주도의 구옥을 세련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결과물이다. 그래서 오히려 특별함이 있다. 관광객에게 좋은 공간이 아니라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에게 편리한 공간과 위치다. 그래서 다른 숙소에서 느낄 수 없는 감성이 있다. ‘편안함’ 이다. 오랜 시간 사람들이 거닐었던 골목과 돌담과 공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경치가 좋다는 이유로 생뚱맞은 언덕에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무식하게 솟은 공간이 아니다. 주변 집들과 똑같은 높이와 똑같은 크기로 오랜 시간 빚어진 공간이다. 그래서 편안하고 마음에 부담이 없다. 이름마저 편안한 봉성리 돌담집의 가장 큰 미덕이다.

*참고: 다자요는 현재 국내 법규상 모든 관광객이 이용할 수 없다. 자세히 설명하면 복잡하지만 좋은 취지라는 것을 민관에서 모두 인정하고 있지만 ‘민박업’에 대한 현재 법규가 그렇다. 그래서 다자요는 프라이빗 숙소 개념으로 모델을 바꿨다. 숙박비 대신에 투자를 하고 주주로서 이용하는 식이다. 좀 복잡하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링크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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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즈모

유튜브 '기즈모' 운영자. 오디오 애호가이자 테크 리뷰어. 15년간 리뷰를 하다보니 리뷰를 싫어하는 성격이 됐다. 빛, 물을 싫어하고 12시 이후에 음식을 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