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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참 순진했어요

아프지 않고, 아무 데서나 잘 자고, 잘 먹고, 튼튼한 내 몸뚱이 하나만 믿고 삼십 년을 살아왔는데. 천년만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니...
아프지 않고, 아무 데서나 잘 자고, 잘 먹고, 튼튼한 내 몸뚱이 하나만…

2018. 03. 04

아프지 않고, 아무 데서나 잘 자고, 잘 먹고, 튼튼한 내 몸뚱이 하나만 믿고 삼십 년을 살아왔는데. 천년만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니 내가 순진했지. 이런 내 신체 중에 요즘 부쩍 예민해진 부분이 있으니, 바로 피부다.

디에디트 사무실은 건조한 사막이다. 천장에 달린 온풍기는 적당히라는 걸 모른다. 하루 종일 뜨거운 바람을 내 볼따구니에 쏘아 댄다. 끄면 춥고 켜면 건조하고. 덕분에 전형적인 ‘수부지(수분부족형지성)’의 상태로 이 겨울을 버텼다. 유수분의 밸러스가 망가지니 피부결이 거칠고 예민해졌다. 내 피부는 낡고 오래되어 버려지기 직전의 초라한 가죽 쇼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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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런 내 피부를 구원해준 녀석을 소개하려 한다. 워낙 잘 알려진 제품이지만 그래도 좋은 건 더 널리 알려야 한다. 독일에서 시작해 100년이 훌쩍 넘는 지금까지 나처럼 예민한 피부를 지켜온 브랜드 피지오겔. 순하고 촉촉하기로 유명한 파란색 제품은 다들 한 번쯤 써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도 물론 좋지만, 오늘 내가 소개할 것은 분홍색의 카밍 릴리프. 요즘처럼 심한 일교차와 온풍기의 건조함 때문에 점점 더 예민해지는 내 피부에 찰떡처럼 착 달라붙은 아이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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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피지오겔은 내가 믿고 쓰는 몇 안 되는 브랜드 중 하나다. 처음엔 향도 없고 연고같다는 느낌에 채 반도 비우지 못하고 다른 제품으로 넘어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왔다. 아마 써본 사람들을 알 거다. 막상 쓸 땐 큰 감흥이 없을지 몰라도 다른 것을 쓰고 나면 이 브랜드가 얼마나 믿음직스럽게 내 피부를 보호해주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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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건 세럼과 밤 이 딱 두 가지. 특히 스킨케어의 경우 이것 저것 많은 것을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나에겐 아침저녁으로 이 이상 바르고 있을 만한 여유가 없다. 아니, 어쩌면 내가 단순히 게을러서 그럴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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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 성분도 좋지만 일단 가격이 착하다. 피지오겔 카밍 릴리프 세럼이 30ml 용량에 3만 5,000원 그리고 50ml 용량의 리스토어링 리피드 밤이 3만 7,000원. 패키지만 과하고 정작 알맹이는 별거 없는 제품에 속아본 사람이라면, 이 제품이 얼마나 거품 없이 순진한지 알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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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의 최애템 카밍 릴리프 세럼부터. 아침, 저녁 딱 두 번 펌핑해서 쓴다. 피지오겔 특유의 희미한 연고향이 나지만,  사실 이 정도면 무향에 가깝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향이 마음에 안정감을 준다. 미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피부를 보호하고 치료해 주고 있다고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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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투명하고 말간 제형이다. 얼굴에 발라주면 유분감 없이 착하고 가볍게 붙는다. 이게 참말로 설명하기 어려운데 처음엔 촉촉하다가 어느 순간 뽀송뽀송하게 마무리된다. 보이는 건 뽀송해도 손바닥을 얼굴에 대면 찹쌀떡처럼 딸려오는 쫀득함이 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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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적인 효과를 보이는 화장품들이 사실 피부에 부담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이미 수많은 화장품들이 내 피부 위를 스쳐 지나가고 난  뒤다. 오히려 요즘은 바를 때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순한 제품을 더 좋아한다. 이 세럼도 그렇다. 과한 촉촉함이나 번들거림 없이 피부에 스미고 나면 내 피부인 듯 흡수된다. 며칠 쓰다 보니 피부가 한결 유연해졌다는 느낌이 들어 지금까지도 꾸준히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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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럼이 내 살과 가장 먼저 닿아 성난 피부를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했다면, 마지막에 바르는 카밍 릴리프 리피드 밤은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피부를 지키는 장벽을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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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형이 독특하다. 밤과 크림의 중간 정도라고 보면 정확하겠다. 흡사 연고처럼 보이는 제형 안에는 몽글몽글한 알갱이가 보이는데 바르면 쉽게 녹아들면서 사라진다. 훨씬 쫀득하고 꾸덕한 느낌이라 지성인 나는 아침보다는 저녁에만 조금씩 바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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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무리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다. 오늘 하루가 내 인생의 전부였던 것처럼 살았던 찰나의 젊음은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 또 다시 반복될 것이란 것을 깨달으면서 끝이 났다. 하루가 마디처럼 끊기고 다시 시작되던 그때와 달리 요즘엔 오늘이 그저 어제와 내일의 연결 과정이란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오늘도 무리하지 말고, 야금야금 성실한 삶을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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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도 같다. 화려한 기능과 성분으로 무장한 에센스보다는, 순하고 착한 성분의 몇 가지를 꾸준히 사용하는 게 예민한 피부를 가장 빠르고 쉽게 길들이는 방법이다. 성나고 신경질적인 피부는 순한 성분으로 다스리는 것이 맞으니까. 곧 다가올 봄, 먼지와 건조함으로 또 한껏 예민해질 테지만, 무리하지 말고 꾸준히 발라줘야지. 잠잠해져라. 잠잠해져라 주문을 외면서.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