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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너 지금 아트하니?

기자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문창과 출신이라고 했더니, 선배 중 하나가 이런 얘기를 했다. 기자는 ‘아트’하려고 들면 안 된다고....
기자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문창과 출신이라고 했더니, 선배 중 하나가…

2017. 06. 20

기자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문창과 출신이라고 했더니, 선배 중 하나가 이런 얘기를 했다. 기자는 ‘아트’하려고 들면 안 된다고. 팩트만 전달해야 한다고. 맞다. 기사는 정확한 사실을 실어 나르는 작업이다. 수다스럽고 사족이 많은 내게 기자의 글쓰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지난 13일 새벽, A씨가 장충동 족발집 앞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 문장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팩트다. 기사에 가깝다. 이제 다른 예를 보자. 어떤 글쓰기에서는 같은 풍경을 다르게 그려낸다.

큰 솥에서 구름 같은 김이 솟아올랐다. 양파, 마늘, 생강, 감초, 엄나무… 마지막으로 돼지족을 밀어 넣고 한 시간 반을 더 끓여낸다. 익숙한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코를 벌름거리며 이 집 문턱을 넘게 만드는 그 냄새 말이다. 배부른 사람들이 뼈다귀만 남기고 돌아가는 새벽. 50년 넘게 족발을 삶았다는 식당 앞에서, 동갑내기쯤 되는 A씨의 죽음은 잡내조차 풍기지 못하고 식어 갔다.

어떤 글쓰기에도 옳고 그름은 없다. 방법은 의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오직 사실 만을 전해야 할 때가 있고, 비극에 조명을 쳐서 그림자를 더 깊게 드리워야 할 때도 있다. 이건 마케팅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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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이 WWDC 2017에서 여러 신제품을 발표했다. 그중 단연 많은 눈길을 받은 제품은 애플의 스피커, 홈팟(HomePod)이었다. 키노트 현장에서 홈팟의 데뷔를 지켜본 소감을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디자인은 세련되지만 유니크하진 않았고, 그 자리에 인공지능 스피커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곱씹을수록 재밌더라. 애플이 ‘아트’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리를 품은 스피커. 당연히 아마존 에코나 구글 홈같은 인공지능 스피커와 비교 대상이 될 것이다. 시장을 선점한 제품이 이미 너무나 분명한 아이덴티티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뒷북이라고 말했고, 인공지능 비서로서 시리가 미숙한 부분이 있음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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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어쩐지 그것이 알고 싶다 톤이다). 첫째로 애플은 원래 ‘처음’이 되는 것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뒤늦은 축에 속한다. 속된 말로 개X마이웨이라고 하던가. 자기애가 강한 이 브랜드는 제 갈 길만 간다. 16년 전 아이팟이 처음 나왔을 때, 세상엔 이미 수많은 뮤직 플레이어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아이팟은 다르다”고 여겼다. 애플이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시장의 속도에 맞추거나 이미 나온 카테고리의 Me-too 제품을 만드는 것은 그들의 성미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브랜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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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애플이 홈팟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떠올려보자. “Reinvent home music.” 집에서 음악을 감상하는 방식을 재창조하겠다. 면 아마존은 에코를 어떻게 설명했을까? Always ready. Connected and Fast. Just Ask.” 언제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제품. 똑같은 스마트 스피커지만, 제품을 소개하는 두 기업의 ‘글쓰기’는 판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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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홈팟을 소개하며 이상할 만큼 ‘인공지능’과 ‘시리’를 강조하지 않았다. 음성 제어로 어떤 질문을 할 수 있는지 가볍게 짚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오히려 새삼스러울 만큼 스피커 본연의 기능에 집중했다. 음악을 즐기는 기기로서의 성능 말이다. 홈팟 스스로 공간을 인식하고 방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감지해 공간에 맞게 최적의 사운드를 구현한다는 이야기는 마치 마법처럼 들린다. 7인치가 채 되지 않는 작은 스피커가 온 집안을 채우는 풍부한 스피커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애플 뮤직이 가진 취향 훌륭한 플레이리스트가 자리하고 있다.

음악은 애플이 가장 잘하는 일이니, 우리는 음악에 집중하겠다. 이 동그랗고 아름다운 물건은 당신이 집에서 음악을 즐기는 경험을 완전히 바꿔줄 것이다. 얼마나 달콤한 속삭임인가!

기업들이 인공지능 스피커에 핏대를 세우는 이유는, 그 물건이 위치할 장소 때문이다. 다들 우리의 거실을 점거하고 싶어 한다. 그곳에 자신들의 생태계로 유인할 허브를 세우고 “내 구역” 깃발을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음성인식이라는 차세대 인터페이스에 인공지능과 머신러닝을 덧입혀 말 한 마디로 온갖 것들이 가능해진다고 호객 행위를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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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에 애플은 고고한 척 음악이라는 카드를 빼 든 것이다. 여러분 이게 바로 애플이 만든 스피커에요. 음악은 내 나와바리인 거 다들 알죠? 노래 자주 듣잖아요? 어떤 장르 좋아해요? 잔잔한 그루브가 있는 재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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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비서는 멋지지만 여전히 낯설다. 일반 사용자들은 음성 명령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에 기업의 기대 만큼 목 말라 있지 않다. 하지만 음악은 다르다. 누구나 음악을 듣는다. 내 말은 흘려 듣는 우리 엄마도,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신곡에는 귀를 기울인다. 예술은 기술보다 쉽게 마음을 간지럽히는 법이다. 애플은 우리의 거실을 점거하기 위해 음악이라는 트로이 목마에 시리와 홈팟을 탑승시켰다. 얼마나 세련된 브랜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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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팟은 절대 음악만을 위한 ‘순수한 머신’일 수 없다. 세상엔 음악 외길을 걸어온 오디오 제조사가 수없이 많고, 공간을 인지해 사운드 튜닝을 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홈팟이 현재 시중에 나온 스마트 스피커보다 사운드에 더 집중한 제품임은 분명해보인다. 그리고 이건 가격대를 올리기 위한 충분한 명분도 되고 말이다.

애플이 ‘아트’하고 있다. 이 전략이 우리 마음을 잘 만져서 지갑까지 열게 할까? 이제 아이팟 시절만큼 애플의 마법이 통할지 장담할 순 없지만 수다스런 글쟁이인 나는 이런 얄미운 마케팅이 퍽 흥미롭다. 일단은 12월에 만나요.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