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이모, 여기 대장부 하나요

시작은 몇 주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디터H와 고된 하루를 보내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삼겹살, 아니 오겹살. 지글지글 끓는 기름과 단백질이...
시작은 몇 주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디터H와 고된 하루를 보내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2017. 02. 23

시작은 몇 주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디터H와 고된 하루를 보내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삼겹살, 아니 오겹살. 지글지글 끓는 기름과 단백질이 익을 때 나는 소리와 냄새는 언제나 옳다. 자, 저녁에 삼겹살을 먹는다. 이 문장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뭐? 당연히 쐬주다.

“소주 한 잔 할까요?”

난 소주가 싫다. 맛도 향도 없는 것이 지독히 쓰기만 쓰다. 소주는 싫지만, 그 촌스러운 초록색 병이 담고 있는 정서는 참 좋아한다. ‘소주 한 잔 할까?’라고 건네는 말에 담긴 미처 다 전하지 못한 말. 잔을 부딪칠 때 나는 청명한 소리. 원샷 후 테이블에 잔이 떨어지는 소리와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는 ‘캬’까지. 아, 소주는 넘나 정겨운 것.

어렸을적에 소주는 나에게 섹시한 술이었다. 이게 다 고딩때 눈물 콧물 흘리며 본 <내 머리속의 지우개> 때문이다.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라고 던진 정우성의 작업 멘트에 손예진은 가늘고 흰 새끼 손가락을 들고 원샷을 하며 앙큼을 떨었지.

fullsizephoto1807[남녀가 함께 소주를 나눠 마시면 사귀어야 하는 줄 알았던 때도 있었다.]

소주는 서민의 술이다. 소주는 싸다. 그리고 독하다. 내일 아침 출근해야 하는 우리는 싸게 마시고 빨리 취할 수 있는 술이 필요하다. 딱 한 잔만 더하고 가자며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요.”라고 외칠 땐 부담이 없어야 한다.

“우리 중에 스파이가 있어!”

그런데 최근 소주 시장에 낯선 다른 녀석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야금야금 흐리멍텅해지던 소주가 심지어 과일의 탈을 뒤집어 쓰고 나타났다. 과일소주 열풍에 작은 반도가 들썩였다. 자몽부터 블루베리까지 맥락도 근본도 없이 과일향을 더한 소주를 보는 건, 참 씁쓸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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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놈이 섞여있다!]

엣헴, 게 누구 없느냐. 다음은 소주의 양반. 증류식 소주의 등장이다. 증류식 소주의 시작은 2005년 광주요그룹이 ‘화요’를 출시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질세라 2006년 하이트진로가 일품진로를 선보이며 가세했고, 이어 국순당의 려, 그리고 지금 롯데 주류의 대장부까지 왔다.

“그냥 소주는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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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류는 술의 정수(精髓)다. 에센스, 핵심이다. 쌀로 밥을 짓고 여기에 누룩을 더해 발효시킨 청주를 더 높은 알코올 도수를 얻기 위해 진하게 달여낸 것이 바로 증류식 소주다. 조금 더 높은 순도를 얻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고 응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증류의 핵심이다.

반면 희석은 원래 있는 것을 묽게 만드는 과정이다. 희석식 소주는 95% 알코올 액에 물과 기타 첨가물을 넣어 만든다. 화학물 더하기 화학물. 공장에서 만든 약품이다.

사실 원래 소주는 증류식 소주를 말한다. 따지고 들자면 알코올에 물을 탄 희석식 소주는 전통방식이 아니니, 소주가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게 합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증류식 소주가 진짜 소주라고 하는 건 무의미하다. 우리 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도 소주는 그냥 소주였다. 희석식 소주가 가짜라고 말하는 건, 짜장면을 자장면이라고 발음하는 것 만큼이나 궁색하다(심지어 이제 짜장면도 표준어가 아닌가). 주세법도 증류식과 희석식 소주 모두를 ‘소주’라고 정하고 있다. 차라리 증류식 소주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게 더 좋지 않을까? ‘증류식 소주’라니, 참 맛없어 보이는 명칭이다. 증류식 소주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제와 자기가 진짜 소주라고 말하는 그들의 마케팅이 조금 없어보인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Processed with VSCO with e8 preset[재작년 겨울 고딩친구들과의 강릉여행. 안주는 닭내장탕]

우리가 남이가. 소주는 우리에게 초코파이 같은 존재다. 정이다. 사는 게 바빠서 오랜만에 함께 만나는 친구들과 잔을 나누는데, 소주말고 무슨 술이 어울리겠는가. 게다가 맵고 짠 한국의 안주에는 소주의 맛은 퍽 잘 어울린다.

“그리고 그녀석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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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장부가 등장했다. 증류식 소주의 판이 커지는 건 어느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그런데 유통을 꽉 잡고 있는 롯데주류가 ‘한 병 더!’를 자신있게 외칠 수 있는 저렴한 가격대의 증류식 소주를 선보인 것이다.

대장부 21은 100%우리 쌀 외피를 깎아내고, 15℃ 이하의 저온에서 발효와 숙성을 거친다. 우리가 소주를 빚을 것도 아니고, 이런 설명은 지루하다. 그래서 다른게 뭐라고? 역시 가격이다. 현재 증류식 소주의 가격은 2만원대로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고기집에서 단돈 5,000원으로 증류식 소주를, 아니 대장부를 마실 수 있다. 이 놀라운 가격엔 병의 역할이 크다. 대부분 증류식 소주가 전용병에 담긴 것과 달리 대장부는 일반 희석식 소주와 동일하게 360ml 용량의 녹색 공용 소주병에 담아냈다. 판도 잘 깔아놨다. 요즘 웬만한데서는 대장부를 시킬 수 있다. 심지어 편의점에서도 판다. 술은 유통이다. 아무리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나도 유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소비자에게 다가갈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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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야기가 늦었다. 분명 꽤 잘 만든 술이다. 곡주 특유의 들큰함이 돌면서 혀를 싸고 도는 맛이 인상적이다. 적당한 가격대의 사케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대장부는 사나이의 술, 남자의 가슴을 울리는 진한 술이다. 알코올 도수 21도로 강하다. 독하지만 쌀의 내음이 덕에 역하지 않다. 한 없이 도수가 낮아지기만 하는 희석식 소주보다 도수는 훨씬 거칠지만, 목넘김은 부드럽다.

하지만 맵고 짜고 단 한국 음식이랑 함께 먹기엔, 혹은 기름진 삼겹살과 함께 마시기엔 조금 느끼하다. 하지만 이건 고기를 마시고 쐬주를 마셔야 식도에 끼어 있는 기름기를 싹 씻어낸다고 믿는 우리의 기분 때문일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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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참으로 오묘하다. 소주는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싸고 빨리 취해야했던, 서민들의 오랜 친구였던 소주는 몸을 낮추고 과일로 치장하고 있다. 이게 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증류식 소주란 이름으로 등장한 대장부도 돌아서고 있는 소비자들의 치마자락을 붙잡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무언가를 마시고 얼큰하게 취해있겠지. 대기업 걱정은 해서 뭐하나. 여러분, 누구 오늘 나랑 쐬주 한 잔 안할래요?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