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주의, 집에서 혼자 읽지 말 것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2022. 12. 01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도 만들어 보내고 있다.)

책 한 권을 재밌게 읽고 나면 그 저자의 다음 책을 기대하게 된다. 이번 달엔 그렇게 고른 책이 세 권이다. 아래에 소개한 책이 재밌었다면 <신입사원 빵떡씨의 극비 일기>, <스틱>, <까대기>도 읽어보시기를. 그리고 <라이어 라이어 라이어>를 쓴 마이클 레비턴은 믿고 구입할 저자 리스트에 추가됐다. 이렇게 읽을 책이 자꾸만 늘어난다.


[1]
<엄마는 모르는 스무살 자취생활>

“나는 내가 못한다는 사실에 당당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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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를 시작하면서 엄마가 몰랐으면 하는 일이 급격히 늘어났다. ‘엄마 나 사실은… 아침은 거의 거르고요, 보내준 사과는 다 상했고요, 밤마다 술 마시고요, 공부는 정말 가끔 하고요, 지금 방엔 비가 새고 있어요…’ 잔소리를 피하고픈 이기심과 걱정을 덜어주고픈 효심이 더해져 비밀은 점점 늘어갔다.

저자 빵떡씨에게도 비밀이 없을 리 없다. 다행인 건 비밀을 공유하고 같이 문제를 해결해나갈 사람이 있다는 것. 함께 사는 쌍둥이 동생 석구다. 섬유유연제 두 통을 풀어 세탁기가 거품으로 가득 차도, 회심의 무생채가 무말랭이가 되어도 한 마디면 달려오는 동생. “석구야! 나와봐!” 물론 약간의 타박과 빈정거림은 감수해야겠지만, 두 사람은 뚫어뻥과 장바구니를 하나씩 쥔 표지 그림처럼 자취생활의 막막함과 외로움을 나눠 지고 살아간다.

둘의 케미에 흐뭇해하던 것도 잠시, 과거의 내가 떠올라 조금 아련해졌다. “처음 시작하는 서투름을 가족과 공유하는 즐거움”을 그때 일찍 알았더라면, 내 스무 살 자취생활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니, 안 달라졌을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서른 살 결혼생활’이나 잘하자. (저자도 스무 살이 아니듯 나 역시 서른 살은 아니다)

빵떡씨가 집안일은 서툴지만 글은 잘 쓴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 “집을 지을 때 지켜야 할 소음의 기준을 몇 가지 딱 정해보겠다. 옆집에서 못질하는 소리는 들릴 수 있지만 솔로 화장실 타일 닦는 소리는 들리면 안 된다. 드럼 치는 소리는 들릴 수 있지만 리코더 소리는 들리면 안 된다. 월드컵 환호성은 들려도 되지만 애정 행각 소리는 들리면 안 된다.” 누나가 글쓰기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석구가 더욱 분발해주기를.

  • <엄마는 모르는 스무살 자취생활> 빵떡씨 | 자음과모음 | 2022.10.17 | 14,800원

[2]
<제철동 사람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릴 때부터 봐 왔던 제철소 굴뚝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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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나는 ‘인생 드라마’로 <동백꽃 필 무렵>을 꼽는다. 영화든 드라마든 앞에 ‘인생’을 붙이려면 모름지기 인생을 담고 있어야지. 스릴 넘치는 ‘까불이 찾기’도, 용식이와 동백이의 계산 없는 로맨스도 재밌었지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은 옹산 게장골목 사람들의 인생을 생략해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같은 미덕을 가진 ‘인생만화’ 한 권을 소개하려 한다.

이종철 작가는 데뷔작부터 남달랐다. 6년간의 상하차 아르바이트 경험을 바탕으로 택배 노동자들의 하루하루를 생생히 그려낸 <까대기>는 2019년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받았다. (매년 다섯 편씩 발표되는 ‘오늘의 우리만화상’은 믿고 보는 리스트 중 하나다.) 이 만화를 읽고 나서, 당일배송의 편리함 뒤에 사람이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담담한 그림체는 인생을 담기에 딱 알맞은 그릇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인생을 그린다. <제철동 사람들>의 배경은 포항제철 공단 마을이다. 저자의 부모님이 이곳에 ‘상주식당’을 차리면서 만화는 시작된다. 바쁘게 일만 하던 엄마, 웬만해서는 자식들을 혼내지 않던 아빠, 식당을 찾는 손님들, 일을 돕던 이모들, 같이 놀던 동네 친구들이 모두 주인공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자기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 있다. 그런 작품은 ‘인생’이란 수식어를 붙일 자격이 있다. 난 이 만화를 보면서 잊고 있던 장면들을, 잊고 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지금부터 <제철동 사람들>은 내 인생만화다.

  • <제철동 사람들> 이종철 | 보리 | 2022.8.30 | 18,000원

[3]
<넘버스 스틱!>

“우리가 숫자형 인간이 아닌 것은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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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과학의 선구자 그레이스 호퍼는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칠 때, 작문 실력을 특히 중시했다. 학생들이 ‘수학 시간에 작문시험을 왜 치냐?’고 투덜거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면 수학을 배워봤자 아무 쓸모도 없으니까.”

<넘버스 스틱>은 의사소통을 돕기 위한 책이다. 어렵게 복잡하게 느껴지는 숫자를 ‘와닿는’ 언어로 번역하는 다양한 기술을 알려준다. 소수, 분수는 기억하기 어려우니 웬만한 숫자는 반올림해라. 숫자는 어느 정도 이상 커지면 와닿지 않으니 이해시킬 방법을 찾아라. 예를 들어 미국에 약 4억 정의 민간 소유 총기가 있다는 사실은 잘 와닿지 않는다. 이럴 때 숫자 번역이 필요하다. “미국에 살고 있는 모든 남성과 여성, 아동이 총기를 하나씩 나눠 갖고도 약 7000만 정이 남는다는 뜻이다.”

책에는 이런 ‘숫자 번역’ 사례가 풍부하다. 제프 베이조스의 자산 750억 달러가 얼마나 많은지, 타자가 배트를 휘두를지 말지 결정하는 0.25초가 얼마나 짧은지, 형광등의 교체 주기 7년이 얼마나 긴지 강조하기 위한 문장들은 재치가 넘친다. 다음엔 어떤 사례가 나올지 기대될 정도다. 여기서 너무 많은 걸 공개하면 저자에게 예의가 아니니, 딱 하나만 더 소개하겠다.

1968년 아폴로 8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 궤도에 진입했다 돌아왔다. 당시 기술로 대기권에 안전하게 진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만일 지구가 농구공이고 달이 야구공이라면 둘 사이의 거리는 7미터다. 이때 약 24킬로미터 너비의 진입 가능 구간은 종이 한 장 두께도 되지 않는다.”

  • <넘버스 스틱!> 칩 히스, 칼라 스타(지은이), 박슬라(옮긴이) | 웅진지식하우스 | 2022.09.23 | 17,000원

[4]
<라이어 라이어 라이어>

“사람들이 나를 믿게 만들기 위해서는 때때로 거짓말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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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 번째 좌우명은 ‘착하게 살자’였다. 착한 삶이란, 곧 남들을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좌우명대로 살려고 노력했고, 덕분에 ‘착하다’라는 말을 곧잘 듣곤 했다. 하지만 자아가 커질수록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나다울 수 없으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니?” (책에서 저자의 엄마가 ‘솔직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을 인용했다.)

그래서 좌우명을 바꿨다. 이번엔 ‘솔직하게 살자’였다. 솔직한 삶이란, 곧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좌우명대로 살려고 노력했고,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작용이 있었다. 내 말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생겼다. “당신이 아무리 옳은 일을 해도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을 싫어하게 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데이트 상대 코니가 저자의 ‘지나친 솔직함’을 지적하기 위해 한 말을 인용했다.)

<라이어 라이어 라이어>를 읽으며 크게 공감했던 이유는 저자 역시 나처럼 시행착오를 겪으며 솔직함과 무례함 사이, 가식과 배려 사이에서 고민해왔기 때문이다. 솔직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부모 밑에서 자란 저자는 20년 넘도록 거짓말을 세 번밖에 안 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저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 결국 많이 사랑했던 애인과 헤어진 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한다. ‘이젠 거짓말을 하자!’ 치밀한 가설을 토대로 한 저자의 ‘거짓말 실험’ 결과는 책으로 확인해보시기를.

이제 나의 세 번째 좌우명은 ‘재미있게 살자’다. 착한 것도 솔직한 것도 결국은 함께 살아가는 재미를 위한 노력, 그 일부분이 아닐까.

  • <라이어 라이어 라이어> 마이클 레비턴(지은이), 김마림(옮긴이) | 문학수첩 | 2022.9.23 | 14,000원

[5]
<이상한 집>

“그리고 아이 방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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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친정에 가서 혼자 있는 날이었다. 자기 전에 잠깐 읽을 요량으로 <이상한 집>을 펴들었다. 그런데 몇 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하고 덮었다. 졸려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결국 다음날 지하철 출근길에 다 읽어버렸다. 그만큼 책이 얇고 술술 읽힌다. 다만, 나홀로 집에서 읽지 않기로 한 건 잘한 일이었다. 지하철에서도 무서워서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읽어야 했으니까.

무서운 이야기의 배경으로 가장 효과적인 곳은 어딜까? 공동묘지? 자유로? 바로 집이다. 가장 안전해야 할 곳이기에,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피할 곳도 없다. 500만 관객이 본 영화 <숨바꼭질>의 홍보 카피는 “우리 집에서 낯선 사람의 숨소리가 들린다”였다. 이 영화를 본 날, 새벽에 잠에서 깨 헛것을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이상한 집>을 집에서 읽는 건 무리였다.

<이상한 집>은 어느 이층집의 평면도에서 시작한다. 오컬트 전문 필자인 ‘나’에게 의뢰인이 보내온 평면도다. 집을 살지 말지 고민 중인데, 아무래도 집 구조가 이상해서 찝찝하다는 것이다. 얼핏 봐서는 흔한 가정집처럼 보이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어색한 부분이 하나둘 눈에 띈다. 주방과 거실 사이 애매한 공간, 고립된 아이 방, 창문 없는 욕실…

‘나’는 건축사무소 설계사와 뜻밖의 제보자의 도움을 얻어, 어색한 집 구조 뒤에 숨은 무서운 진실을 파헤친다. 그 과정에서도 여러 집의 평면도는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가 된다. 그림으로 추리하는 색다른 재미를 느껴보시기 바라며… 다시 한번 당부드리는 것은, 이 책은 꼭 집이 아닌 곳에서 보시기를.

  • <이상한 집> 우케쓰(지은이), 김은모(옮긴이) | 리드비 | 2022.10.27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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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