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한국 작가의 최신 단편소설 5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2022. 03. 03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도 만들어 보내고 있다)

지난달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를 읽으면서, 한국 작가가 쓴 단편소설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이번 달엔 단편소설로 구성된 책 5권을 골랐다. 읽을 소설이, 읽을 작가가 아직 많이 남아서 행복하다. 한글 배워놓길 잘했지…


[1]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가장 시시한 문장으로 지유는 소설을 끝맺었다.
이원영은 다 나았고, 오래오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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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까다롭다. 같이 살다 보면 ‘그냥 좀 넘어가지’ 싶을 때도 많다. 그런데 이 까다로움은, 내가 아내의 코멘트를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떠들썩한 이름값이나 매끈한 포장에 좀처럼 속아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책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아내가 추천한 작품은 최소 별 네개 이상이다. 어느 날 혼자 서점에 다녀온 아내가 말했다. “임솔아라는 사람이 쓴 책을 몇 페이지 읽었는데 너무 좋아서 놀랐어” 드문 극찬이었다. 그날 바로 임솔아 작가의 새 소설집을 주문했다.

나도 까다롭다. 아내의 까다로움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두 번째 소설집”이라는 소개 문구가 계속 거슬렸다. 아내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난 분명 이 작가의 팬이 될 텐데, 그럼 “첫 번째”부터 순서대로 봐야 하지 않을까?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첫 번째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을 먼저 집어들었다.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도 아쉽기보다는 행복했다. 오예, 아직 한 권 더 남았다! 이미 그의 팬이 된 나는 포털에 ‘임솔아’를 검색했다. 몇 시간 전 올라온 기사가 눈에 띄었다. “제13회 젊은작가상 대상에 임솔아 작가”

괜히 뿌듯했다. 재밌게 봤던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 받았을 때 괜히 우쭐해지는 것처럼. 수상작 ‘초파리 돌보기’는 두 번째 소설집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에 수록되어 있다. 작가는 ‘초파리 돌보기’를 쓰면서 처음으로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 소설보다 우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한 인간의 행복을 소설 아래 두지 않는 이 소설가를, 나는 더 좋아하게 되었다.

  •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임솔아 | 문학과지성사 | 14,000원

[2]
<장미의 이름은 장미>

“인생의 가장 예외적인 시간이 나에게 남긴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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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작가에게 ‘첫 번째 소설집부터 순서대로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덤볐다가는 큰 코 다친다. 단편집 6권, 장편소설 8권에 새로 나온 단편집까지 총 15권을 읽어야 할 테니까. 1995년에 데뷔했으니 햇수로 27년이다. 어릴 때 읽었던 그의 대표작 <새의 선물>은 100쇄를 코앞에 두고 있다. 고수의 실력은 또 어떨지 기대하며 신간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집어들었다.

책에 실린 소설 네 편 모두 뉴욕에 간 한국인의 이야기다.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하기엔 너무 멀고, 비싸고, 바쁘고, 화려한 도시. 뉴욕행 비행기를 탄 데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겠지만, 소설은 ‘뉴욕에 간 이유’를 굳이 조명하지 않는다. 왜 갔는지가 중요할까? 이유가 무엇이든, 그곳에서 그들은 모두 외로운걸. 말이 안 통해서 외롭고, 말이 들려서 외롭다. 찾아갈 친구 하나 없어서 외롭고, 찾아간 친구 때문에 외롭다. 풍경이 낯설어서 외롭고, 한국이 떠올라서 외롭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은 오히려 산뜻했다. 서늘한 외로움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다. 낯선 풍경 앞에서, 비로소 내가 선명해진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로 떠나온 후에야, 비로소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 그들이 왜 뉴욕에 갔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외로우려고, 외로움을 발견하려고.

책 한 권 읽었을 뿐인데 뉴욕에 다녀온 듯 외로움의 흔적이 남는다. 고수란 이런 것일까. 그래놓고 27년차 작가는 “새삼스럽게 서툰 마음”을 고백한다. 고수란 이런 것이다.

  • <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 | 문학동네 | 15,000원

[3]
<시소 첫번째>

“나는 아마 그림을 그리다가 디스크로 요절할걸.
허리 디스크, 목 디스크, 손목 디스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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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원고를 준비하면서 잊고 있던 옛날 취미가 생각났다. 좋아하는 가수가 생기면 앨범을 샀다. 그 앨범이 좋으면 예전 앨범까지 싹 다 손에 넣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각 앨범의 트랙 순서를 외우고, 앨범별로 좋아하는 트랙의 순위를 매기고, 가수별로 좋아하는 앨범의 순위를 매기고, 인터뷰를 뒤져 앨범 표지와 수록곡들의 연관성까지 찾아내야 직성이 풀렸다. 그래서인지 싱글 위주 활동이 대세가 된 지금도 굳이 10곡을 꽉꽉 채운 정규앨범에 좀 더 마음이 간다.

은희경 작가와 임솔아 작가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그때와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이 작가의 소설 한 편이 좋으면 한 권을 다 읽고 싶고, 그 한 권이 좋으면 예전 발표작까지 싹 다 손에 넣고 싶고, 각 단편집의 목차를 외우고, 단편집별로 좋아하는 소설의 순위를 매기고, 작가별로 좋아하는 단편집의 순위를 매기고, 인터뷰를 뒤져 그 문장을 쓸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고 싶다. 읽을수록 그 이름들이 소중해졌다. 이번에 소개하는 작가들 외에도 요 몇 년 사이 읽었던 윤성희, 황정은, 백수린, 김금희, 그리고 앞으로 좋아하게 될 많은 이름들. 그 이름들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시소 첫번째>를 추천한다.

‘시소’는 계절마다 시와 소설 한 편씩을 골라 소개하고 저자를 인터뷰하는 기획이다. 지난 1년간의 선정작 8편이 이번에 책으로 묶였는데, 내가 이 책에서 찾은 이름은 단편 ‘미조의 시대’를 쓴 이서수 작가다. 과장 없는 현실을 그려낸 이 소설이 좋았기에, 난 이서수 작가의 단편집을 기다릴 것이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좋은 사람’을 듣고 나서, Toy 5집 앨범 <Fermata>를 샀던 그날처럼.

  • <시소 첫번째> 손보미 외 7명 | 자음과모음 | 13,800원

[4]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

“아직 8시간 25분이 남았다고,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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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여 전부터 균열이 생기고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이 세계의 귀퉁이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 건지 자주 고민하곤 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는 실은 ‘허락하고 싶지 않은 미래’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해진 작가는 소수자, 난민, 노숙자, 국가적 폭력의 희생자 등 이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왔다. 여기서 ‘잘 보이지 않는’이란 수식어는 사실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 하는’에 가까운데, 그의 소설은 모른 척 고개를 돌리는 이들의 귀에다가 “여기에 사람이 있다!”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래서 그가 처음 펴낸 SF소설이 반갑다. ‘너무 멀어 잘 보이지 않는다’라고 얼버무리는 이들의 눈앞에다가 외면하고 싶은 미래를 펼쳐보이면,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 하던 사람들도 못 이기는 척 멈춰서지 않을까 싶어서.

물론, 미래를 예언하는 책은 많다. 이 기술이 이렇게 발달하면 이러이러한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러이러한 재앙이 닥칠 것이다. 소설의 미덕은 거기서 몇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점이다. 재앙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어떤 하루를 보낼까? 어떤 말을 하며 슬퍼할까? 포기하는 사람들 사이 희망은 어디에서 시작될까? 행복은 어떻게 정의될까? 사랑은? 우정은? 가족은? 책에 수록된 8개의 단편은, 이 모든 질문들에 대답해보려는 저자의 노력이다.

’허락하고 싶지 않은 미래’가 다가오는 지금,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 조해진 작가는 지극히 소설가다운 힌트를 건넨다. 미래에 사람이 있다, 이것만은 잊지 말 것.

  •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 조해진 | 마음산책 | 14,000원

[5]
<2035 SF 미스터리>

“누군가와 사귀다가 피임에 실패해 애라도 생겼다간 체포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안전을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세상에 혈육이 단 한 명도 없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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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를 비롯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발전과 퇴보는 우리가 사는 풍경을 어떻게 바꿔놓을까. 너무 멀리 가지도 말고, 딱 13년 후의 풍경을 그려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일하고, 사랑하고, 행복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뺏고, 죽이고, 자기 욕심을 채울 것이다. 전자를 그린 소설이 조해진 작가의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라면, <2035 SF 미스터리>는 후자다. 듀나, 천선란, 도진기 등 9명의 작가는 각자의 시선으로 2035년의 범죄를 상상한다. 미래에도 사람이 있다면, 사람이 있는 곳에 범죄가 없을 리 없으니까.

범죄는 바퀴벌레 같다. 기술이 발전하면 발전한 대로, 사회 시스템이 무너지면 무너진 대로 범죄는 거기에 착 달라붙어 알을 깐다. 유전자 편집 기술은 살인의 이유(‘고난도 살인’)가 되고, 난민촌은 복수의 배경(‘억울할 게 없는 죽음’)이 되며, 텔레포트 기술은 공갈협박의 수단(‘컨트롤 엑스’)이 된다.

자연히 범죄소설 9편의 초점은 ‘누가’보다는 ‘어떻게’와 ‘왜’에 맞춰져 있다. 범인을 추리하는 재미는 조금 떨어질지 모르지만,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서 펼쳐놓는 작가들의 상상력이 흥미진진하다. 다소 복잡한 기술 묘사와 생경한 배경에도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SF와 미스터리 중 하나라도 좋아한다면, 반길 수밖에 없는 책이다.

  • <2035 SF 미스터리> 천선란 외 8명 | 나비클럽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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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