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2022. 01. 04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도 만들어 보내고 있다).

오늘 책 추천을 다 쓰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뉴욕타임스 편집장의 글을 잘 쓰는 법>에 나오는 조언 ‘자기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쓰라’에 지나치게 감명받은 나머지, 내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버린 것 아닐까. 피드백 남겨주시면 적극 반영하겠다.


[1]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근거 없는 자신감, 근거 없는 안도감,
그리고 근거 없는 불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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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려요. 2차 면접에 합격하셔서 입사 제안 드리려고 해요.” 이직이 결정됐다. 퇴사와 첫 출근 사이에 일주일이 주어졌다. 아내가 추천해준 파주 북스테이에서 5일을 보냈다. 서재 가득 책이 꽂혀 있는 곳으로 가면서도 굳이 책 두 권을 가져갔다. 나는 굳이 챙긴 두 권 중 한 권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부터 읽었다. 겨울밤 방에 앉아 귤 까먹으며 추리소설을 읽으니 오랜만에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역시 직장생활의 꽃은 퇴사야!’ 쌓이는 귤껍질과 함께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맑아졌던 머리는 기분 좋게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추리소설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후더닛(whodoneit)이다. ‘누가 이 사건의 범인이게?’라고 묻는 장르다. 이 책은 전형적인 후더닛이다.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은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대학생이든 초등학생이든 거짓말을 조금씩 하며 사는데, 과연 ‘사건’이 될 정도의 거짓말이라면 뭘까.

몇 장 읽다 보면 범인이 언제 어디서 거짓말을 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바로 면접장이다. 솔직하게만 말해서는 뒤처질지 모르는 면접장에서, 조금이라도 합격 가능성을 높이려는 취준생은 과거를 포장하고 미래를 자신한다.

몇 주 전에 본 이직 면접이 떠올랐다. 없는 얘길 지어내지는 않았지만, 가능하다면 나에게 불리한 진실은 숨기고 싶었다. 그럼 그것 또한 소극적인 거짓말 아닌가? 100% 솔직하게 면접에 임했다면 나는 합격할 수 있었을까? 합격을 준 면접관이 나중에 ‘속았다’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괜한 걱정에 파주의 공기가 살짝 답답해졌다. 역시 직장인의 모든 불행은 직장에서 시작되는 법. 귤이나 몇 개 더 까먹고, 다음 책을 읽자…

  •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아사쿠라 아키나리 | 북플라자 | 1만 6,000원

[2]
<그냥 하지 말라>

“가장 먼저, 본인의 가치관을 의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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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쉬러 오는 거, 일이랑은 상관없는 책을 가져왔음 좋았을 텐데. 예를 들면 앞서 소개한 추리소설이나, 사서 쟁여두기만 했던 만화책 같은 것들. 하지만 고민 끝에 챙긴 나머지 한 권은 <그냥 하지 말라>다. 무의식중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이전에 몇 번 해봤다고 금방 수월해지는 게 아니니까. 아직 문제가 뭔지도 모르면서, 답을 얻고 싶었다.

책 소개말에 적힌 브랜딩, 콘텐츠, 라이프스타일 같은 키워드가 새롭진 않았지만, 저자에 믿음이 갔다. TV에서 가끔 본 저자는 ‘빅데이터 전문가’치고 매우 일상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어렵고 복잡한 걸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려면, 몇 배 더 노력과 고민이 필요하다. 노력하고 고민하는 이 사람의 ‘그냥 하지 말라’가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성실은 의미를 밝히고 끈기 있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근면은 생각이 배제된 성실함이고요. 앞으로의 시대는 생각 없는 근면이 아닌 궁리하는 성실함이 필요합니다. ‘그냥 하지 말라(Don’t just do it)’고 말씀드리는 이유입니다.”

이 문장 말고도, 마음에 드는 문장이 보일 때마다 핸드폰으로 찍어 저장했다. 어떤 문장은 완전히 소화될 때까지 여러 번 곱씹었다. 그렇게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트렌드 예측서와 자기계발서가 잘 팔리는 이유를 알겠다. 예측이 정확할 필요도, 저자의 노하우가 현실적일 필요도 없다. 불안을 달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 책은 내 불안을 훌륭히 달래줬다. 심지어 가볍다. 파주까지 가져오길 잘한 것 같다.

  • <그냥 하지 말라> 송길영 | 북스톤 | 1만 7,000원

[3]
<뉴욕타임스 편집장의 글을 잘 쓰는 법>

“열세 살 무렵, 이성의 관심을 받으려고 안달하는 내게
오빠가 한 충고가 글쓰기에서도 통용된다. ‘그냥 너답게 굴어.’
그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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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리에서 2년 8개월 동안 남이 쓴 글을 편집했다. 입사 전 예상했던 것보다 ‘편집’의 범위는 넓었다. ‘문장을 예쁘게 다듬고, 불필요한 내용은 쳐내는 일’은 일부에 불과했다. 편집은 저자의 생각이 독자에게 온전히 전달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이었다.

내 생각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란 강의가 대학마다 열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말도 어려운데, 글은 더하다. 수많은 저자의 글을 편집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이거였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나도 편집자로서 좀 더 멋진 피드백을 하고 싶었지만 이것만큼 치명적인 장애물이 없다. 독자들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를 때,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뒤로 가기’를 누르거나 책을 덮는다.

독자가 읽기를 거부하면 손쓸 방법이 없다. 음악을 듣거나 영상을 볼 땐 “듣다 보니 좋아졌어”, “잘 모르겠는데 계속 보게 돼” 같은 말을 종종 한다. 글은 아니다. 읽다 보니 좋아지거나, 잘 모르겠는데 계속 읽게 되는 글은 없다. 아, 물론 셀럽이 쓴 글은 팬들이 인내심을 갖고 읽어준다. (혹시 셀럽이시면 댓글 하나 남겨주세요. 팬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썼다면, 이제 기본은 갖췄다. 여기서 좀 더 욕심을 낸다면, 뻔하지 않아야 한다. 뻔하지 않은 글을 쓰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 생각이든 경험이든 자기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쓰면 된다. 지금까지 ‘퍼블리 전 편집 매니저의 글을 잘 쓰는 법’에 대해 소개했다. 이해하기 쉽게, 자기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뉴욕타임스 편집장의 글을 잘 쓰는 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덥지 않다면, 책을 읽어보시라.

  • <뉴욕타임스 편집장의 글을 잘 쓰는 법> 트리시 홀 | 옮긴이 신솔잎 | 더퀘스트 | 1만 6,000원

[4]
<법정의 얼굴들>

“형사재판장은 형벌 말고는 달리 세상에 기여할 수단이 없다.
사람을 바꾸고 바위를 깰 수 있는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말과 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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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로 일하면서 정말 많은 글을 읽었다. 처음부터 저자가 잘 써서 보내준 글도 있고, 편집 후 확 좋아져 뿌듯했던 글도 있다. 물론 내 편집 실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글도 있고, 아예 발행되지 못한 글도 있다.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글을 읽고 편집한다는 건 가장 즐겁고도 버거운 일이었다. 2년 8개월 동안 ‘이 사람 진짜 잘 쓴다’라고 느낀 건 두 번인데, 둘 다 회사 내부 사람이었다. 둘 중 한 명이 이 책과 관련이 있다.

나보다 1년쯤 늦게 입사한 A는 출판편집자 출신이었다. 이력을 들었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 A가 쓴 글을 읽고 나서는 조금 위축되었다. ‘이해하기 쉽게, 자기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잘 쓴 글이었다. 즐겨찾기에 추가해두고 여러 번 읽었다. 재미있는데 날카로웠다. 내가 쓰고 싶은, 그런 글이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편집 매니저랍시고 A 앞에서 ‘이 글은 이렇고 저 글은 저렇고’ 얘기하는 게 부담될 정도였다. A는 몇 달 후 퇴사했다. 특별히 친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A의 글을 더 읽을 수 없어 아쉬웠다. 그리고 조금은 안도했다. 내 밑천이 드러날까 봐 겁이 났던 것 같다.

몇 달 후 A가 차린 출판사의 첫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주영 판사가 쓴 <법정의 얼굴들>이다. 전작 <어떤 양형 이유>의 편집자가 A였다. 회사 동료였을 때 A가 이 책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던 기억이 난다. 그땐 내용도 모르면서 A의 자부심만 믿고 장바구니에 넣어뒀었다. 이번 기회에 두 권을 모두 사서 한꺼번에 읽었다. A가 자부할 만했다. 이제 난 밑천 드러날 걱정 없이 박주영 판사와 모로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 <법정의 얼굴들> 박주영 | 모로 | 1만 7,000원

[5]
<요즘 애들>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길러졌는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일상을 살아가는지 가장 잘 묘사하는 말은 번아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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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진짜 잘 쓰는 사람’, B는 여전히 회사에 다닌다. B에게 선물할 책을 찾다가 <요즘 애들>이 떠올랐다. 알게 모르게 B가 ‘요즘 애’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근데 B가 과연 ‘요즘 애’가 맞나? 기원전부터 2021년까지 끊이지 않는 말 “요즘 애들 버릇없다”가 진짜라면 B도 버릇이 없어야 할 텐데, 반말과 욕을 즐겨 하는 것 빼고는 대체로 선을 잘 지키는 편이다. B가 9X년생이니 8X년생인 나보다는 요즘 태어났지만, 가끔 몇 마디 해보면 나보다도 트렌드에 관심 없어 보일 때가 있다. 이런 B를 ‘요즘 애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선물하는 게 맞는 걸까?

물론이다. <요즘 애들>은 B뿐 아니라,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2030 직장인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2019년에 쓴 칼럼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칼럼 제목이 곧 이 책의 주제다. ‘밀레니얼은 어떻게 번아웃 세대가 되었는가?’ 저자는 번아웃이 몇몇 사람의 특수한 증상이 아니라, 밀레니얼 세대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이라고 말한다. 늘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고, 쉴 때도 스마트폰을 보고, 번아웃이 왔을 때 ‘쉼’이 아니라 ‘번아웃 극복 노하우’를 검색하는 세대.

나 또한 번아웃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니, 몇 년 전부터 줄곧 번아웃 상태다. ‘심심하다’라는 생각을 해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시간은 항상 부족하고, 할 일은 많다. 일을 하고 있을 때도 항상 ‘다음 일’을 생각한다. 심지어 쉴 때도 ‘잘 쉬어야 한다’라는 부담을 느낀다. 이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니 안심이 되면서도 다른 사람이 걱정된다. 특히, 가는 일 붙잡고 오는 일 안 막는 B 같은 사람들(B에게: 안 읽어도 되니까 이 책이 또 다른 태스크가 되지 않길…).

  • <요즘 애들> 앤 헬렌 피터슨 | 알에이치코리아 | 1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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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