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솔직한 네 생각이 궁금해

안녕, 에디터B다. 나는 가끔 에세이를 읽는다. 다분히 실용적인 이유로 에세이를 읽는다. 에세이에서 좋은 태도를 배우고, 좋은 문장과 단어를 발굴한다. 이동진...
안녕, 에디터B다. 나는 가끔 에세이를 읽는다. 다분히 실용적인 이유로 에세이를 읽는다. 에세이에서…

2021. 12. 12

안녕, 에디터B다. 나는 가끔 에세이를 읽는다. 다분히 실용적인 이유로 에세이를 읽는다. 에세이에서 좋은 태도를 배우고, 좋은 문장과 단어를 발굴한다. 이동진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어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행위’에 가깝다.

저마다 자주 쓰는 단어와 표현은 정해져 있다. 환경이 크게 변하지 않는 한(소속된 조직이 달라지거나, 인간관계가 바뀌지 않으면) 개인의 단어 세계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세이를 읽는 건 큰 도움이 된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에세이 한 권을 읽는 게 간단하다. 에세이 작가는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도 속 깊은 얘기를 잘도 해준다. 2022년을 맞이해 정적인 취미를 하나 갖고 싶다면 에세이 읽기를 추천한다. 오늘 소개하는 다섯 권의 책에서 한 권 골라보는 것도 좋겠다.


일기, 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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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글을 읽으면 내가 작아진다. 그의 글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하려다 ‘어찌 내가 감히’라는 생각만 든다. 황정은의 글은 진중하고, 속 깊으며, 글자 하나하나가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함을 지녔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어떻게 이런 리듬감을! 감탄만 한다. 단점(?)도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정신적으로 힘들 땐 읽을 수가 없었다. 심리적으로 불안할 땐 그의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우울한 기분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황정은 작가의 첫 에세이집 <일기>를 읽기 전에 기대했다. 황정은이 에세이를 쓰면 그건 무슨 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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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이라… 아직도 잘 모르겠다. 깊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은 든다. 바다엔 길이 없다. 길이 없는 바다에서 방향성을 잃은 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다. 드라마틱한 하나의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화가 많거나 등장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다. 유쾌한 일상이나 귀여운 실수담 같은 것도 거의 없다.

글의 호흡이 긴 편이다. 문장의 호흡도, 한 편당 분량도 긴 편이다. 이런 에세이가 처음엔 불편했지만, 느린 유속에 몸을 맡겨버리니 오히려 좋다. 물론 긴 호흡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 적응을 마쳤다면 순조롭게 쭉쭉 읽힐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황정은 월드’로 들어가는 일이다.

  • <일기 日記 > 황정은 | 창비 | 14,000원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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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는 여행 에세이다. 뉴욕, 아헨, 오사카, 타이베이, 런던을 여행했던 정세랑 작가의 기록을 묶은 책이다. 나는 정세랑 작가의 글을 읽으면 왠지 모르게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등장인물들은 특별히 모나지 않고 동글동글한 성격을 지녔으며, 무해하고 뾰족하지 않다. 빌런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폭력적인 캐릭터는 없었다. 나에게 거주할 지구를 결정할 선택권이 있다면, 정세랑이 만든 지구에서 살고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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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이 무해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유를 이 책을 읽고서 알게 되었다. 정세랑과 주변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나는 정세랑과 그의 친구들에 대해 잘 모르지만, 여행기를 통해 본 그들은 분명 다정한 사람들일 것 같다.

여행을 하면 세상을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를 보게 된다. 카페에서 짧은 시간 대화를 할 때는 몰랐던 것을 여행을 함께 하면 알게 된다. 필연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선택과 선택 사이에는 우선순위가 매겨지고, 맨얼굴과 본심이 나온다. 나는 해외여행에 대한 욕망이 극히 적은 사람임에도, 이 에세이를 읽고 (코로나가 끝나면) 여행을 더 자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행지에서 어떤 사람인가, 나는 평소 어떤 가면을 쓰고, 여행지에서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 다정한 사람일까, 불편한 사람일까.

  •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 위즈덤하우스 | 16,800원

2인조, 이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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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에세이 좀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만약 그 친구에게 처음 추천하는 거라면 내 답변은 항상 같다. 김중혁의 에세이 아무거나, 이석원의 에세이 아무거나. 김중혁의 에세이는 시트콤 한 편을 보듯 유쾌하고, 찰떡같은 비유가 매력적이다. 이석원의 에세이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솔직해서 좋아한다. 기술적으로 화려하지도 않고, 어려운 단어로 독서의 흐름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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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수선을 맡겼다가 불친절했던 사장님에게 느꼈던 불만, 그때 아무 말도 못한 게 스트레스가 되어 다음에 찾아가면 반드시 따져 물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이야기. 나는 에세이가 어떤 내용을 포함하고 어떤 형식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그런 기준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있다고 해도 반드시 지켜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일상과 그것에서 발견된 생각이라면 무엇이 되든 좋지 아니한가.

하지만 나에게도 취향이라는 건 있으니 당연히 싫어하는 에세이도 있다. 어떤 작가들은 지나치게 멋을 부린다. 대본이 절대 없다고 말하는 연애 버라이어티처럼 부자연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나열되어 있다. 독자가 아닌 자신을 위해 글을 쓰다 보면 힘이 잔뜩 들어간 문장이 나온다. 나의 유려한 글솜씨를 뽐내주마! 그 마음을 줄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석원의 에세이는 정확히 그 반대에 있다. 이석원은 자신의 못난 점, 부족한 점, 숨기고 싶은 점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그리고 부끄러워하면서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까 고민한다. 나는 이석원의 그런 글이 좋다.

  • <2인조> 이석원 | 달 | 14,800원

여행의 이유,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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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를 영화감독에 비유해보자. 황정은이 박찬욱이라면, 김중혁은 류승완, 김영하는 봉준호일 것 같다. 김영하는 글에 관해서는 못하는 게 없는 한국 문단의 슈퍼스타다. 2004년 동인문학상, 이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학계 그랜드슬램을 달성했고, 출간하는 소설은 매번 대중성과 작품성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소설뿐만이 아니라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고 그 유명한 대사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도 그가 썼다. 또,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까지 했으니 만능 글쟁이인 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세이도 잘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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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는 여행 에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김영하에게만 이렇게 신기한 일이 생길까 궁금했다. 공항에서 추방당하질 않나, 쿠바에서 담배 직거래를 하질 않나… 그런데 그건 김영하가 특이해서도 아니고, 소설가라서 별것 아닌 일도 그럴싸하게 포장을 잘해서도 아니다. 뻔한 것보다는 새로운 것에 부딪치기를 즐기는 모험가이기 때문이다. 김영하는 말한다. “해외여행을 가면 일부러 메뉴판 밑에 있는 걸 시켜요. 음식이 맛있으면 맛있게 먹으면 되고, 맛이 없으면 그 실패경험에 대해 글을 쓰면 되잖아요.” 이 말은 꼭 여행 중인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닌 듯하다. 우리가 해야 할 무수한 선택 중에 몇 개는 익숙한 A가 아닌 낯설고 두려운 B를 선택해보자. 지금보다 조금 더 드라마틱한 하루가 되지 않을까.

  • <여행의 이유> 김영하 | 문학동네 | 13,500원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정지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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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매하기 전에 몇 가지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표지에는 한가로운 낮의 푸르른 풍경이 그려져 있고, 조그맣게 ‘서울과 파리를 걸으면 생각한 것들’이라고 적혀 있다. 이 조합을 보고 혹시 이 에세이가 산책에 대한 작가의 에피소드나 파리지앵의 아침 산책 풍경, 서울의 좋은 산책 코스를 다룬다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책은 생각보다 말랑말랑한 얘기를 담고 있지 않다. 제목을 말해주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쉬울 거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생에서 두 번 저항하기란 힘들다’

‘죽어서 승리를 거둔 사람들이 살아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시카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해진 장소가 아니었다. 그저 미국이라는 공간을 향해 방출된 무엇일 뿐이었다’

산책에 대해 쓴 에세이가 아니라 산책을 하며 생각한 것들이 주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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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서 당혹스러웠다. 이 책을 읽으면 파리를 여행하고 싶어질줄 알았으나,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파리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에는 고수를 씹는듯한 묘한 중독성이 있다. 어렵고 낯선 방식이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계속 들어보고 싶다. 정지돈 에세이의 단골손님, 금정연, 오한기와의 대화는 글을 친근한 분위기로 만들어준다. 그럼에도 표지에 속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주간 문학동네에서 2페이지 분량을 읽어 볼 수 있으니 궁금하면 여기에서 읽어보자.

  •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정지돈 | 문학동네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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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