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지극히 주관적인 세기의 패션쇼3

안녕, 패션에 대한 글을 쓰는 이예은이다. 평소 패션쇼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저 옷은 예쁘다’ ‘저 옷은 진짜 이상하다’ 아마...
안녕, 패션에 대한 글을 쓰는 이예은이다. 평소 패션쇼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2021. 08. 23

안녕, 패션에 대한 글을 쓰는 이예은이다. 평소 패션쇼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저 옷은 예쁘다’ ‘저 옷은 진짜 이상하다’ 아마 옷에 대한 감상이 주를 이룰 거 같다. 하지만 패션쇼에서 볼 수 있는 건 옷이 전부가 아니다. 패션쇼는 의상, 장소, 모델, 음악 모든 게 합쳐져 가끔은 행위 예술이나 초대형 설치 미술 같은 모습을 띠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대충 넘겨보는 인스타그램 속 순간의 이미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패션쇼를 보면서 패션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키워온 나에게는 영화에 버금가는 종합 예술로 다가오기도 한다. 디에디트는 에디터가 자신의 취향을 마구 드러내는 웹진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포브스 선정, 이 아니라 내 맘대로 선정한 레전드 패션쇼 세 개를 소개하려 한다.


[1]
CHANEL 2019 S/S

[샤넬의 2019 봄/여름 컬렉션이 열린 그랑팔레에 지은 세트장]

세계 4대 패션위크 뉴욕, 런던, 밀라노, 파리 패션위크 중 파리 패션위크는 다른 도시에 비해 유명 명품 브랜드가 대거 포진해있기 때문에 가장 화려하고 중요한 패션위크로 꼽힌다. 그런 브랜드들 사이에서도 가장 큰 스케일의 쇼를 여는 샤넬은 매 시즌 화제의 중심에 있다. 2024년 파리 올림픽 경기장으로도 사용될 파리 8구의 대형 전시관 그랑팔레는 2005년부터 꾸준히 샤넬의 패션쇼장으로 이용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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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은 지금까지 이 장소에서 초대형 로켓을 발사하거나 거대한 인공 폭포를 만들거나 혹은 공간 전체를 농장으로 꾸기도 했다. “일회성 패션쇼를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싶을 정도로 샤넬은 그동안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며 블록버스터급 패션쇼가 뭔지를 보여줬다.

최근 샤넬의 쇼 중 가장 임팩트 있었던 시즌을 꼽자면 인공 파도를 만들고 모래를 공수해 해변으로 꾸민 ‘2019 봄/여름 컬렉션’이다. 패션쇼는 파리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한 10월에 열렸지만 샤넬은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해변을 지어버렸다. 이 패션쇼장이 공개되자마자 모든 소셜미디어는 온통 샤넬 얘기로 가득 찼다. 패션쇼 하나 한다고 바다를 만드는 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싶지만 10년 전 극지방의 빙하 몇백 톤을 잘라 설치했던 적이 있는 샤넬이니 바다쯤이야 우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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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_37437375166_dbdaefa32b_b[265톤에 달하는 스웨덴의 빙하를 공수해온 2010 F/W 샤넬 컬렉션과 인공 폭포를 만든 2018 S/S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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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샤넬은 스케일에 비해 옷 자체는 실망스러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컬렉션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시즌엔 샤넬만의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젊은 감성을 다 잡은, 전 세계 여성들의 눈을 사로잡은 예쁜 제품들이 유독 많았다. 샤넬은 이 시즌 가방 두 개를 교차시켜서 맨 더블 사이드 팩 가방을 처음 선보였고, 모델 손에 두 개의 가방을 주렁주렁 들려 보냈다. 해변의 모래사장을 걷는 게 쇼 컨셉인 만큼 쇼 초반에 등장한 모델들은 맨발이었는데 신발이 없는 룩엔 가방이라도 두 개씩 보여주겠다는, 모든 제품을 최대한 다 팔아먹겠다는 샤넬의 의지가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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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커 쇼츠, 80년대 실루엣의 트위드 재킷, ‘CHA’와 ‘NEL’로 나누어진 귀걸이, PVC 소재의 가방 등 컬렉션 히트 아이템들이 하나둘 나오고, 중반부터는 신발을 손에 든 모델들이 등장하는데 영상에선 잘 안 보이지만 해변 모래사장을 지나 중간 나무덱부터는 들고 있던 신발로 갈아신고 캣워크를 걷는다. 이건 우리가 해변에서 놀고 난 뒤의 신발을 갈아신는 딱 그 모습이라 해변 컨셉에 더욱 몰입하게 되고 괜히 더 친근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피날레에 모델들이 단체로 등장하면서 실제로 휴양지에 놀러 온 것처럼 손잡고 파도에 발 담그며 노는 모습이 보이는데 신나고 즐거운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이건 세상 모든 사람이 바라는 놀면서 돈 버는 모습이 아닌가 싶어 굉장히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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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날레에 줄지은 모델들 사이로 해변 옆 오두막에선 칼 라거펠트와 버지니 비아르 두 디자이너가 등장하는데 이 컬렉션이 열리고 4개월 뒤인 2019년 2월, 샤넬을 35년 동안 이끌었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사망하게 된다. 라거펠트 사망 이후 혼자서 브랜드를 맡게 된 버지니 비아르는 라거펠트와는 다르게 스케일 큰 패션쇼장을 싫어한다는 인터뷰가 있기도 했고,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샤넬에서 이와 같은 대형 스케일의 쇼를 당분간 보기 힘들어졌다. 라거펠트의 마지막 터치가 담긴 컬렉션 중 하나라는 이유로 이 쇼는 레전드로 불리게 되었다.


[2]
JACQUEMUS 2020 S/S
<Le coup de soleil>

두 번째 소개할 레전드 패션쇼는 공개 이후 브랜드 공식계정 인스타 팔로워 180만 명이 늘어났다는 전설적인 패션쇼, 프랑스 브랜드 자크뮈스의 2020 봄/여름 패션쇼다. 브랜드마다 가을/겨울 컬렉션을 잘하는 브랜드가 있고 반대로 봄/여름 컬렉션에 강한 브랜드가 있는데 자크뮈스는 단연 후자인 브랜드이다. 이 컬렉션의 이름 ‘Le coup de soleil’는 햇빛에 그을린 화상 혹은 일사병이라는 뜻인데 듣기만 해도 피부가 따갑고 어질어질한 뜻과는 반대로 아주 로맨틱한 컬렉션이었다.

매년 6월에서 8월까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발랑솔에선 라벤더 축제가 열리는데 자크뮈스는 브랜드 런칭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을 패션쇼장으로 골랐다. 벌들이 윙윙대고, 만개한 보라색 라벤더밭에 둘러싸인 기나긴 핫핑크색 캣워크 위를,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걸어오는 모델들의 모습을 보면 ‘장관이네요, 절경이고요, 신이 주신 선물입니다’란 말이 절로 나온다. 이 컬렉션 전부터 자크뮈스는 패션씬에서 가장 주목받는 브랜드 중 하나였지만, 이 유일무이한 패션쇼는 SNS에서 끝없이 바이럴 되면서 브랜드 팔로워가 급증했고 자크뮈스의 대표적인 컬렉션이 되었다.

1400_wp4210072[2020 s/s 컬렉션 영감이 된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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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뮈스는 이자벨 마랑, 루즈 같은 흔히 생각하는 ‘파리지앵’의 멋을 보여주는데 다른 프랑스 디자이너 브랜드와는 달리 여유롭고 낭만적인 ‘프랑스 남부’ 감성을 뽐낸다. 새로운 프렌치 시크의 모습으로 평가받는 이 브랜드는 90년생의 젊은 디자이너 시몽 포르테 자크뮈스가 만든 브랜드다. 파리 패션위크 일정 아래에서 컬렉션을 열지만 파리지앵이라 불리기 거부하는, 애향심 대단한 이 디자이너는 프랑스 남부 해안 도시 마르세이유 출신이다. 휴양지에서 입을 법한 바람에 흩날리는 오버사이즈 셔츠, 해변에 어울릴 챙 넓은 모자, 형형색색의 컬러는 ‘프랑스 남부의 햇살을 컬렉션에 가져오고 싶다’던 디자이너의 바람을 그대로 시각화했다. 어릴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이기도 한 Jacquemus를 브랜드 이름으로 삼은 것만 봐도 느껴지듯이 자크뮈스의 컬렉션은 가족과 고향에서 받은 영감들로 가득하고 그를 향한 애정, 그리움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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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뮈스는 자신의 외할머니를 컬렉션 캠페인 모델로 삼아 애정 어린 코멘트와 함께 할머니 사진으로 브랜드 인스타그램 피드를 도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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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쇼가 열리고 딱 1년 뒤 그 순간을 회고하며 인스타그램에 올린 비하인드씬까지 빠짐없이 모두 아름답다. 가본 적도 없는 프랑스 남부 도시에서 머무른 듯, 기억을 조작하는 이 패션쇼의 이름은 한국식으로 하자면  ‘여름이었다…’가 어울리지 않을까.

게다가 자크뮈스는 컬렉션에 쓰고 남은 컬러풀한 패턴의 자투리 천으로 감싼 꽃다발을 판매하기도 했다. 이 귀여운 브랜드를 사랑하지 않는 법? 나는 모른다.


[3]
Alexander McQueen 1999 S/S
‘No.13’

세계 4대 패션 위크 중 가장 세간의 시선을 끄는 건 파리 패션 위크라지만 1990년대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1990년대 런던 패션 위크는 세계적인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들과 함께 예술과 결합한 실험적인 런웨이를 선보이는 예술의 장이었다. 그 시대, 그곳에선 수많은 레전드 패션쇼가 탄생했고 그중에서도 알렉산더 맥퀸의 1999년 봄/여름 컬렉션인 그의 13번째 컬렉션 ‘No.13’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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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쇼는 시작부터 조악한 화질과 세기말 감성이 묻어나는 폰트 디자인으로 으스스하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극대화한다. 컬렉션 초반엔 절제된 컬러와 테일러링의 모던한 옷들이 등장하고, 엉덩이골이 다 드러나는 범스터 팬츠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알렉산더 맥퀸답게 골반에 겨우 걸친 극강의 로우라이즈 팬츠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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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부터는 맥퀸스러운 레이스, 러플이 달린 스커트, 자수 드레스나 가죽으로 된 코르셋과 하네스가 등장하며 도발적이고 혁신적인 의상이 나오기 시작한다. 세계 1차 대전 중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을 위해 의수족을 제작한 런던의 퀸즈 메리 병원의 워크샵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답게 실험적이면서도 정형외과적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중에서도 장애를 갖고 태어나 어린 시절 무릎 아래를 절단한 미국 패럴림픽 육상선수 에이미 멀린스(Aimee Mullins)가 입고 나오는 룩은 컬렉션의 대표 피스로 꼽힌다.

1400_339798-scaled-tile[미국 패럴림픽 육상선수 에이미 멀린스, 부츠 같은 신발은 사실 정교하게 조각한 나무 의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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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도전적인 옷들도 멋있지만, 이 패션쇼를 레전드로 꼽는 이유는 이 쇼의 하이라이트, 마지막 퍼포먼스 때문이다. 피날레에선 발레리나였던 모델 샬롬 하로우(Shalom Harlow)가 순백의 튤 드레스를 입고 원형 판 위에서 선 채 오르골 속 인형 모형처럼 돌아간다. 그 위로 자동차 제조에서 사용되는 두 개의 스프레이 머신이 검정색, 노란색, 녹색 페인트를 마구 뿌린다. 그리고 물감이 흩뿌려진 드레스를 입고 쇼장을 걸어 나가는 모델을 보며 불은 꺼지고 드레스에 묻은 페인트가 야광으로 빛나면서 패션쇼는 마무리된다. 모든 이에게 의심 없이 천재 디자이너라 불렸던 알렉산더 맥퀸 본인조차도 자신을 울렸던 유일한 패션쇼라고 했고 패션과 기술이 결합한 행위예술에 가까운 이 퍼포먼스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 외에도 알렉산더 맥퀸은 당시 마약 스캔들로 퇴출당한 모델 케이트 모스를 홀로그램으로 패션쇼에 등장시키는 등 기술과 결합한 혁신적인 패션쇼를 많이 선보였다.

“The art challenges the technology, and the technology inspires the art.”

“예술은 기술을 도전하게 만들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

내가 좋아하는 픽사 ‘토이 스토리’ 제작자, 존 래시터가 한 말이다. 어디선가 이 말을 보고 가장 먼저 알렉산더 맥퀸이 떠올랐다. 1990년대부터 로봇이나 첨단 기술을 사용한 패션쇼를 선보였던 알렉산더 맥퀸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VR과 AI 같은 기술을 활용해 얼마나 멋진 쇼를 보여줬을까. 아마 매 시즌 런던 패션위크마다 알렉산더 맥퀸쇼가 있는 날엔 맥퀸의 쇼 사진과 영상들로 인스타그램이 가득했을 거다. 맥퀸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넘게 흘렀지만, 아직까지 맥퀸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천재 디자이너는 등장하지 않았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알렉산더 맥퀸의 패션쇼를 계속해서 떠올리고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패션쇼를 보다 보면 앞서 소개한 샤넬 쇼처럼 당장 입고 싶은 옷도 있는 반면 알렉산더 맥퀸 쇼처럼 “저걸 대체 누가 입어?” 싶은 옷들도 있다. 패션쇼에 나온 옷 중에는 실제 판매되는 제품도 많지만, 판매 목적이 아닌 시즌별 컨셉이나 디자이너의 철학과 감성을 가득 담아 컬렉션 전용으로 제작된 보여주기용 옷들도 많기 때문이다. 흥행을 목표로 하지 않는 예술 영화나 독립영화처럼 말이다. 해리포터 같은 마법 판타지 영화를 보면서 ‘저건 말도 안 돼’ 생각하지 않듯이 패션쇼는 현실적 판단은 내려놓고 작품 감상하듯 무념무상으로 보면 더 재밌다. 패션쇼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현실적인 생각이 아닌 때론 도시 한복판에 바다를 가져오기도 하고, 사랑하는 고향 꽃밭에 수백 미터의 달하는 런웨이를 설치하고, 기계로 물감을 뿌려 옷을 완성하는 디자이너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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