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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마시는 그 카페의 드립백 5

안녕, 에디터H다. 나는 하루종일 무언가를 마신다. 낮에는 주로 커피를 마시고, 밤에는 와인을 마신다. 올해 초엔 와인을 한 병인가, 두 병인가,...
안녕, 에디터H다. 나는 하루종일 무언가를 마신다. 낮에는 주로 커피를 마시고, 밤에는 와인을…

2021. 03. 09

안녕, 에디터H다. 나는 하루종일 무언가를 마신다. 낮에는 주로 커피를 마시고, 밤에는 와인을 마신다. 올해 초엔 와인을 한 병인가, 두 병인가, 세 병인가… 하여튼 어마어마하게 마시고 봉변을 당했다. 이 에피소드를 너무 여러 번 언급한 것 같아 민망하지만, 한 번만 더 말하겠다. 1월 1일 밤, 술에 취해 비틀비틀 걷다가 제자리에서 풀썩 넘어졌다. 상당히 아크로바틱하게 넘어진 모양이다. 발등의 뼈가 세 조각으로 부러졌다. 술에 취해 이 지경이 되었다는 건 이 자리에서 처음 밝힌다. 나도 창피한 건 아는 사람이거든. 병원 차트에는 이렇게 적혔다. 좌측 제5중족골 기저부 골절. 해석하자면 이런 뜻이었다. 나는 이제 와인을 마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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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깁스에 목발까지 장착하고, 방에 갇혀서 고루한 재택근무의 나날이 시작됐다. 어느때보다도 제정신이어야 했다. 내게 남은 건 커피 뿐이었다. 인스턴트 커피만 마시며 일주일을 버텼다. 갓 추출한 커피의 향긋함이 그리워졌다. 카페 문턱이라도 밟고 싶었다. 그래서 커피머신을 사고, 캡슐도 사고, 드립백도 사고, 원두도 사고… 하여튼 방구석에서 살 수 있는 모든 걸 다 샀다. 그리고 깨달았다. 가장 쉽게 맛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솔루션은 드립백이라는 것을.

오늘은 프로 집콕러, 프로 금주러 에디터H의 드립백 탐방기를 준비했다. 심장이 격하게 뛸 정도로 다양하게 마셔보고 맛있는 것만 골랐으니, 여러분은 부디 행복하시길.


How to m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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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에 앞서 드립백으로 커피를 내려 마셨는데 ‘맹탕이었다’는 분들은, 물을 얼마나 부었는지 체크해 보시길. 일반적인 카페 아메리카노 분량을 생각하고 물을 부었다가는 커피맛 숭늉이 되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드립백의 적정 물양은 200ml 정도. 막상 내려보면 생각보다 섭섭한 분량이다. 취향에 따라 물을 더 부어서 희석된 맛을 즐겨도 무방하지만, 제대로된 향과 맛을 즐기고 싶다면 150ml~200ml 정도가 알맞다. 일반적인 드립 커피와 똑같이 물을 균일하게 천천히 조금씩 붓고, 물이 필터를 다 빠져나갈 때쯤 다시 채워넣는 걸 3번 정도 반복하면 200ml의 커피가 추출된다. 드립백도 로스팅한지 얼마 안 된 게 가장 맛있다. 그리고 기왕이면 원두 양이 1g이라도 많을수록 좋더라. 오늘은 편의를 위해 인터넷 구매가 가능한 제품만 소개하겠다. 다 내 돈 주고 샀다. 광고 아님.


모모스커피
7개입 1만 1,000원. (개당 약 1,571원)
용량 : 12g (원두 종류마다 상이함)
한줄평 : 솜씨 좋은 사람이 내려준 핸드드립 커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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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모모스커피부터 시작해보자. 모모스커피는 대한민국 최초의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인 전주연 바리스타로 유명하다. 우리가 또 이런 감투에 약한 민족 아닌가. 하하. 아쉽게도 부산 본점에는 들러보지 못했지만, 직접 방문해본 에디터B가 “커피 맛이 너무 좋았다”고 극찬하길래 믿음을 가지고 모모스의 드립백도 주문해봤다. 패키지 디자인은 심심한 편. 디자인이 커피 맛을 좌우하는 건 아니지만, 책상 위에 올려두고 하나 씩 뜯어먹는 용도이니 기왕이면 패키지가 근사한 게 흐뭇하지 않나. 게다가 잘 만든 패키지는 속에 어떤 커피를 품었는지 판단하는 힌트가 되어주기도 하니까. 내가 주문한 건 <우라가 라로 보다 내추럴 에티오피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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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의 향…”이라고 되뇌이면서 봉투를 뜯었다. 옴마마? 역시는 역시 역시인걸까. 마시기 전부터 향긋하다. 내가 구입한 다른 드립백에 비해 커피 입자가 조금 더 굵은 편. 커피 입자 크기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던데, 보통 입자가 굵을수록 쓴맛보다는 신맛이 강조된다더라. 실제로 씁쓸하고 다크한 맛보다는 적당한 산미부터 느껴진다. 삼키고 나면 입 안에 초콜릿 향이 맴돌면서 달콤한 뉘앙스도 느낄 수 있다. 사무실 모두에게 반응이 좋았던 제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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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 자체에서 풍기는 신선하고 고급스러운 향이 만족스럽다. 향은 새콤하지만, 실제로 마시면 향에 비해 산미가 강하지 않다. 복합적인 풍미를 느낄 수 있는 편. 일회용 드립백에서 이 정도 맛이면 감동이 아닌가.


앤트러사이트
6개 샘플러 9,000원 (개당 1,500원)
용량 : 11g
한줄평 : 패키지 만큼이나 감성적인 맛, 싱겁지만 향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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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나는 앤트러사이트가 만든 공간은 참으로 좋아하지만, 커피 맛엔 크게 감흥을 느낀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브랜드의 드립백을 구입한 이유는, 가장 쉽게 주문할 수 있는 제품 중 하나거니와 스토리텔링이 너무 좋아서. 대문호나 화가의 이름을 딴 블렌딩 원두는 마시는 사람의 지적 허영마저 채워준다. 각 원두 패키지 뒤에는 윌리엄 블레이크와 나쓰메 소세키, 바슐라르의 저서 중 일부가 쓰여있다.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어떤 향인지는 괜히 알 것 같은 그런 기분? 시크한 일러스트와 패키지 디자인도 고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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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가지 원두가 각각 하나씩 들어간 형태의 샘플러를 구입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각각의 원두가 개성이 강해서 재밌다. 커피를 내릴 때 풍기는 향이 강렬하고 신선하더라. 하지만 막상 마셔보면 향에 비해 싱겁게 느껴진다.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원두가 산미가 강한 편이다. 산미가 강한 커피를 좋아한다면 꽤 매력적인 여운을 느낄 수 있으리라. 원두양이 11g이라, 180ml 정도 추출해야 진하게 마실 수 있다. 기대없이 시음했다가 꽤 높은 점수를 주게 됐다. 드립백 치고 복합적인 향을 잘 담고 있다는 점에서 추천.


우긋커피
10개 실속형 10,000원 (개당 1,000원)
한줄평 : 역시 갓 로스팅한 원두보다 좋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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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취향으론 오늘 소개하는 드립백 중 1등. 지인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커피 상점인데, 뒷광고나 홍보글은 절대 아니니 오해 마시길. 항상 주문하면 2~3일 전에 갓 로스팅한 신선한 원두로 보내주는데, 향이 기가 막히다. 드립백 상단을 뜯어내자마자 커피 향이 진동을 한다. 옆자리에 있던 에디터M이 “커피 마셔?”하고 코를 킁킁댈 만큼. 역시 좋은 원두를 신선할 때 추출하는 것 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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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만큼이나 맛도 훌륭하다. 주로 주문하는 원두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인데, 균형 잡힌 산미와 달콤한 아로마가 마시는 내내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일회용 드립백에서도 이만큼 복합적인 풍미를 맛볼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제품. 솔직히 오늘 소개한 다른 브랜드에 비해 패키지 디자인은 투박한 편이다. 유명한 브랜드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개별 포장된 일회용 드립백을 마실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던 사람이라면, ‘실속형’으로 판매하는 드립백이 반가울 것. 낱개 포장 없이 하나의 종이 봉투 안에 10개의 드립백이 들어있는 방식이다. 원두 종류에 따라 조금씩 가격이 다르지만, 가격 메리트도 좋다. 다양한 원두를 마셔보고 싶거나, 선물용이라면 요일드립백을 추천한다.


바샤커피
12개 3만 3,000원 (개당 2,750원)
용량 : 12g
한줄평 : 디자인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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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을 사들이던 중에 발견한 ‘바샤 커피’. 혹자는 드립백계의 ‘에르메스’라고도 부르더라. 가격이나 디자인을 보면 과연 그러하다. 싱가포르에서 핫한 커피 브랜드라던데, 1910년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시작된 커피룸 문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이름이나 디자인만 보면 100년 쯤 된 브랜드같지만, 2019년에 싱가포르에 첫 매장을 냈다는 사실도 재밌다. 역시 브랜딩이 중요하다. 나 역시 이국적인 패키지 디자인에 홀려서 무시무시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구입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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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함께 판매중인 머그까지 4만 원이나 주고 사버렸다. 너무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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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온에서 핸드 로스팅 하는 방식으로 만든다던데, 사실 이런 커피는 대륙을 횡단해 바다건너 오는 제품이기 때문에 앞서 소개한 제품처럼 신선한 맛은 느낄 수 없다. 내가 구입한 제품 역시 작년 5월에 제조한 드립백이었다. 복합적인 아로마나 산미는 느끼기 어렵다. 대신 뉘앙스가 완전 다르다. 커피 입자가 아주 곱고, 원두의 양도 넉넉하게 들어 있어서 굉장히 진하게 마실 수 있다는 게 특징. 커피를 다 내리고 나면 드립백 안에 들어있던 커피가 ‘떡’이 될 만큼 입자가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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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하고 다크한 맛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꽤 반가웠다. 바샤 커피는 종류가 굉장히 많은 편인데 100% 아라비카 싱글 오리진보다는 가향 커피를 마셔보는 걸 추천한다. 캐러멜 향이나 초콜릿 향, 바닐라 스파이시 향 등 이국적이고 독특한 향을 첨가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게 메리트. 나는 캐러멜로 모닝 커피를 함께 구입했는데 커피를 내릴 때마다 달콤한 캐러멜 향이 풍기는 게 기분 좋다. 이 커피는 진하게 내려서 우유와 함께 먹기에도 알맞겠다. 비싼 가격이 흠이긴 하지만, 고급스러운 패키지가 주는 만족감이 너무 커서 추천. 특히 선물용으로 추천한다.


에디토리
6개 10,000원 (개당 1,666원)
용량 : 13g
한줄평 : 향은 섬세하고, 양은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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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실제로 구입한 드립백은 거의 10종류에 가깝고, 그 중 가장 맛있었던 것 5가지만 소개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미 리스트가 다 나와있는 마당에 5등이었던 드립백을 밀어내고 급하게 자리를 차지한 게 바로 에디토리의 드립백이다. 며칠 전에 간만에 사무실에 놀러왔던 기즈모 님이 선물로 주셨는데, 마셔보니 웬걸? 너무너무 맛있는 게 아닌가. 드립백 마다 무려 13g의 원두가 인심좋게 들어있다. 에디토리는 사실 카페가 아니라 뚝섬역 인근에 있는 오디오 리빙 편집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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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에도 아름답고 소리도 아름다운 오디오가 즐비한 곳이기도 하다. 내가 선물받은 에디토리 블렌드 드립백 세트는 ‘모노’와 스테레오’라는 두 종류의 원두가 3개씩 들어있다. 에디토리와 어울리는 작명 센스다. 모노는 가벼운 바디감에 데일리로 마시기 좋은 부드러운 풍미. 스테레오는 좀 더 묵직한 바디감이 매력적이다. 특히 스테레오가 맛있었는데 견과류의 고소한 맛이 목구멍에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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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공개하는 아쉽게 탈락한 후보들. 프릳츠 커피와 요즘 핫한 듁스 커피 모두 카페에서 마실 땐 좋았는데, 드립백은 아쉬웠다.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