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도쿄 빈티지 어드벤처

도쿄에 다녀왔다. 모처럼 출장이 아닌 진짜 휴가였다. [이상하게 마음에 드는 사진, 긴자의 밤거리] 나이 먹으며 깨달았지만, 나는 여행을 아주 즐기는...
도쿄에 다녀왔다. 모처럼 출장이 아닌 진짜 휴가였다. [이상하게 마음에 드는 사진, 긴자의…

2019. 01. 16

도쿄에 다녀왔다. 모처럼 출장이 아닌 진짜 휴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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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마음에 드는 사진, 긴자의 밤거리]

나이 먹으며 깨달았지만, 나는 여행을 아주 즐기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탁월하게 계획적이지도 않고, 무모하게 즉흥적이지도 않다. 내가 여행지에서 가장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물건을 살 때다. 휴가는 짧다. 짧으면 이틀, 길어야 일주일 남짓 머무르는 여행지에서 전리품만큼 확실한 행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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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가장 확실한 행복]

바르셀로나에서 산 가죽 재킷. 파리에서 산 모자. 도쿄에서 산 카디건. 홋카이도에서 사 온 작은 우산. 몇 년이 지나도 이 물건들을 보면 그 때의 설렘이 떠오른다. 낯선 도시에서 나한테 딱 맞는 것들을 발견했을 때의 짜릿함이란. 쇼핑이란 연애만큼이나 운명이 따라줘야 하는 작업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곳에서, 그때, 딱 내 것이 되는 엄청난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진짜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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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도쿄 여행은 호화로웠다. 근사한 호텔에서 도쿄 도청을 바라보며 잠이 들고. 원하는 만큼 늦잠을 잤다. 긴자에서 오마카세를 맛보고, 도쿄타워가 눈앞에 쏟아지는 스카이라운지에서 칵테일을 마셨다. 그래도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빈티지샵에서 오래된 물건을 탐닉하던 순간이다. 아, 정말이지 도쿄는 빈티지의 천국이더라. 에디터H의 마음을 사로잡은 도쿄의 빈티지샵을 모아봤다. 언젠가 모험을 떠날지도 모르는 여러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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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는 빈티지 파라다이스였다]

사실 도쿄에서 빈티지로 유명한 동네는 코엔지나 시모키타자와다. 서울로 치면 동묘쯤 될까? 멋진 물건이 많다고 들었지만, 빈티지 초심자인 내게는 난이도가 높은 편이라 굳이 들리지 않았다. 주로 공략한 동네는 아오야마. 뻔하다고 생각했던 오모테산도 뒷골목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던지. 아, 너무 재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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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최고는 아모르 빈티지였다. 오모테산도 인근에 무려 세 개 지점을 두고 있는 빈티지샵이다. 각각의 샵마다 컨셉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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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이 유난히 많았다]
AMORE Vintage AOYAMA
東京都渋谷区神宮前5丁目1 神宮前5丁目1−6 2階 イルパラッツィーノ表参道2F

내가 추천하는 건 오모테산도역 근처에 있는 아오야마점. 2층 계단을 올라가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샵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은 가방인데 루이비통, 까르띠에, 에르메스, 구찌 등의 제품이 아름답게 진열돼 있다. 다른 빈티지샵처럼 숨어있는 보석을 발굴하는 느낌이 아니다. 마치 편집샵처럼 브랜드별로 보기 쉽게 진열되어 있기 때문에 둘러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성해진다. 물건도 다양하고, 상태도 깔끔하다. 구하기도 힘든 한정판 제품도 떡하니 전시돼 있다. 일본인들이 어떤 브랜드를 선호하는지도 대충 감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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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마음에 엉망으로 찍었던 인증샷]

나는 사실 오기 전부터 셀린의 오래된 디자인을 하나쯤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여기서 운명 같은 물건을 만나고 말았다. 약간 스크래치가 있었지만 반지르르한 가죽과 각 잡힌 모양이 근사한 셀린 빈티지였다. 게다가 이제 구하기도 힘든 클래식 디자인이 아닌가! 거울 앞에서 몇 번을 들었다 내렸다. 이미 블랙 미니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을 고민하다 그냥 샵을 나왔는데, 자꾸 눈에 밟히더라. 운명이라는 신호였다. 결국 다시 달려가서 사 왔다. 가격도 상당히 달콤했다. 한화로 70만 원대. 도쿄 여행 내내 이 가방을 들고 다니며 얼마나 행복했던지. 도쿄에서 갔던 어떤 빈티지샵보다 물건이 많고 화려한 곳이었다. 대부분 럭셔리 브랜드이기 때문에 가격대가 높지만,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디자인을 잔뜩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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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RE wardrobe
東京都渋谷区神宮前5丁目41−2

다른 아모르 지점도 간단하게 소개하겠다. 사실 먼저 방문한 아오야마점엔 샤넬 제품만 빠져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본어를 종합해 “샤넬은 없습니까?”하고 물으니 다른 두 개의 지점을 안내해주더라. 이 지점은 샤넬 의류와 액세서리만 판매한다. 트위드 자켓이 컬러 별로 진열된 진풍경을 만날 수 있다. 당연히 가격은 천문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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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벨라 하디드도 자주 온다는 바로 그곳]
AMORE Vintage OMOTESANDO
東京都渋谷区神宮前5丁目39−2

오모테산도 지점엔 샤넬의 빈티지 백이 수 백 개 진열돼 있다. 정말 눈이 돌아갈 만큼 화려한 곳이다. 인테리어도 화려하고, 거기 진열된 물건도 화려하다. 이렇게 다양한 컬러의 샤넬을 어디서 구했을까 싶을 만큼. 희귀한 디자인만큼 가격도 엄청났다. 빈티지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프리미엄이 붙은 가격이다. 하나 데려가고 싶었지만 콧대 높은 가격표에 놀라 눈요기만 하고 나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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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set Child
東京都渋谷区神宮前1丁目7 神宮前1丁目7−6 Coxy176 ビル 101

여긴 정말 우연히 발견한 나의 단골집이다. 5년 전이었나, 친한 친구와 떠난 도쿄 여행이었다. 우린 파르페를 먹으며 하라주쿠 뒷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수상한 가게를 발견했는데 날이 추워서 몸도 녹일 겸 들어갔다. 세상에 비비안 웨스트우드만 모아놓은 빈티지샵이었다. 밖에서 꼬지지한 간판을 봤을 땐 망해가는 가게 같았는데, 여기야말로 보물창고였다. 이상하고, 독특하고, 귀엽고, 재밌는 디자인이 넘쳐났다. 한 브랜드의 빈티지만 모아놓은 가게라니 얼마나 일본다운 아이디어인가. 마치 영화 <나니아 연대기>처럼 옷장 속 깊은 곳에 숨은 다른 세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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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분해 보이지만 보물이 숨어있다, 진짜다]

행거 가득 빽빽하게 진열된 옷가지 사이를 들추며 내 운명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귀여운 문양이 수놓아진 카디건을 샀더랬지. 그 옷을 입을 때마다 스산한 날에 발견한 이 가게가 떠올라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 뒤로 도쿄에 갈 때마다 반드시 하라주쿠에 들러 이 가게를 한 번 훑곤 한다. 한국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나만 알고 싶었지만 특별히 공개한다. 여러분만 알아야해요.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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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ND COLLECT
東京都渋谷区神宮前1丁目8 東京都 渋谷区 神宮前 1 8 5

사실 여긴 그렇게 추천할 만한 곳은 아니다. 다른 빈티지샵에 비해 뚜렷한 컬러도 스토리도 없었고, 빈티지라고 부를 만큼 전통있는 물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개하는 이유는 어쨌든 여기서 아주 좋은 물건을 건졌기 때문. 앞서 소개한 클로짓 차일드를 찾아가던 길에 간판을 보고 편집샵인 것 같아서 아무 생각없이 들어갔는데, 너무 귀여운 코트가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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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드한 체크가 매력적인 꼼데가르송 빈티지다. 한 번 입어만 봐야지. 아, 너무 귀엽다. 때마침 도쿄의 날씨는 포근하고. 이 옷은 입지 않은 것처럼 가볍고. 구경만 하려던 마음을 접고 코트를 결제했다. 2층엔 독특한 브랜드 의류가 아주 많다. 지하에 진열된 액세서리는 상태가 아주 나쁜 편. 대신 도쿄에서 발견한 브랜드 빈티지 샵 중에 가격이 제일 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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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낮의 긴자 거리를 걷다가 도쿄역 인근까지 올라갔다. 마루노우치 브릭스퀘어는 잠깐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건물 사이로 작은 정원이 숨어 있는데 마치 유럽의 거리같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일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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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 THE BATON MARUNOUCHI
東京都千代田区丸の内2丁目6−1 丸の内 ブリック スクエア

여기서 도쿄 최고의 빈티지샵 패스 더 바톤을 만났다. 일반적인 빈티지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쓰던 물건을 싸게 파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의 추억이 담긴 물건에 새로운 스토리를 부여하는 곳이다. 가게 이름 역시 누군가의 손에서 다른 누군가의 손으로 바톤을 넘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질이 좋고 잘 관리된 물건을 진열하는 건 물론이고, 필요에 따라 패스 더 바톤 스타일로 리메이크를 하기도 한다. 자세히 보면 상품 하나하나 마다 애정 어린 스토리가 따라붙어 있다. 과거엔 아끼는 제품이었지만 이젠 더이상 쓰지 않고,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것들. 그래서 누군가에게 다시 넘겨준다는 컨셉. 이런 비즈니스가 가능한 환경이 새삼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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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어머, 여기 뭐야, 너무 멋져”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작은 와인잔, 나무로 만든 보석함, 커틀러리 세트, 핸드백, 모자를 비롯해 수많은 잡화가 빈틈없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도 조잡하지 않다. 물건을 파는 가게가 아니라, 누군가의 집을 둘러보는 기분이다. 취향이 좋은 어떤 할머니가 몇십 년 동안 모아온 물건을 한데 모아놓은 것처럼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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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열대의 서랍을 열어보면 그 안에도 한 칸 한 칸 재밌는 아이템이 가득 차 있다. 실크 스카프나 독특한 원석을 엮어 만든 팔찌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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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올 걸 그랬어, 저 가방…]

다른 빈티지샵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물건이 많아서 한참을 둘러봤다. 앤틱하지만 올드하지 않고, 유행을 타지 않는 좋은 것들이 많았다. 비즈를 섬세하게 엮어 장식한 미니백을 한참 탐내다가 결국 포기하고 돌아왔다. 지금 사진을 다시 보니 조금 후회스럽다.

패스 더 바톤은 내가 방문한 긴자 마루노우치, 오모테산도, 교토까지 3개 점포가 있다고 하더라. 교토점은 120년 역사를 가진 고택에 지어졌다는데 나중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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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를 꽤 여러 번 갔었는데 이번에서야 다이칸야마의 매력을 알았다. 유명 브랜드샵이나 츠타야 서점도 흥미로운 볼거리지만, 빈티지의 천국이었다. 다이칸야마 역에서 시부야 역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골목길 사이사이에 수많은 빈티지샵이 숨겨져 있다. 초코칩 쿠키에 박힌 초콜릿처럼 듬성듬성. 그렇지만 아주 찐한 맛으로. 어딜 꼭 가봐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수상해 보이는 골목길을 하나 하나 들쑤시고 다녔다. 아쉽게 문 닫은 곳도 있었지만, 이번 여행 최고의 시간이었다.

다이칸야마의 빈티지샵은 아오야마처럼 세련되거나 고급스러운 느낌은 아니다. 더 앤틱한 제품이 많다. 물건 상태만 해도 훨씬 손때 묻고 낡은 것들이 대부분이고 말이다. 딱 한 군데 샵이 엄청나다기보다는 거리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좋다. 조금씩 특색이 다른 빈티지샵들을 차례로 구경해봐야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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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BOOTS
シルク代官山 1f, 14-5 代官山町 渋谷区 東京都 150-0034

CARBOOTS는 작은 가게지만 물건은 엄청나게 많다. 통로가 좁아서 두 사람이 서 있기 어려울 정도. 입구에는 보기 좋게 낡은 빈티지 구두들이 귀엽게 줄지어 서 있었다. 볼드한 액세서리나 복고풍 원피스, 니트 등 할머니의 옷장을 보는 것 같은 아이템이 많다. 사진에 보이는 페이즐리 그린 원피스와 플라스틱으로 마무리된 가방은 정말 귀여웠다. 가격도 아주 저렴한 편이다. 여긴 꼭 추천. 이 가게 말고도 SLOW, THE BRISK, SMITH ARTIQUE 등 다른 재밌는 곳이 많으니 여유를 갖고 진득하게 둘러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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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만-땅]

훌륭한 쇼핑이었다. 이 코트를 입을 때마다, 가방을 들 때마다 도쿄가 생각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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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