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에디터 수은이다. 매년 여름이 되면 외출이 무서워진다. 에어컨 없는 곳에서는 단 10분도 머물기 힘들고, 지하철로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마저 견디기 싫어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아예 집 밖에 나가지 않는다. 친구들을 만날 때는 무조건 실내. 주로 쇼핑몰을 뱅글뱅글 돌아다니거나 대형 카페에 죽치고 앉아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데, 매번 비슷한 곳에 가니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최근 영화 <백룸>이 개봉하면서 강변 테크노마트가 ‘백룸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며 핫한 장소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 거기 2000년대 레트로 분위기로 유명한 곳 아닌가?’ 몇 년 전부터 SNS에 간간이 올라오는 방문 후기를 통해 사진을 몇 장 본 적 있다. 사람들이 일부러 이곳을 찾는 이유는 그때 그 시절에 멈춰있는 빈티지한 인테리어를 보기 위해서라고. 근데 레트로 감성은 뭔지 알겠는데, ‘백룸 감성’이라는 건 또 뭘까.
마침 집에서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위치였고, 방문 후기를 찾아보며 ‘잼컨’의 향기를 맡은 나는 다가오는 주말 약속 장소를 강변 테크노마트로 급변경했다.

강변 테크노마트는 과거 전자제품 쇼핑의 성지였다. 지금처럼 온라인 쇼핑이 일상화되지 않았던 때에는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직접 가게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직원에게 설명을 들은 뒤 구매했다. 특히 값이 많이 나가는 TV나 컴퓨터, 휴대폰 등 전자제품은 구매하는 곳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고, 정확한 제품 정보나 후기를 찾아보기도 쉽지 않아 여러 매장을 찾아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 나도 어렸을 때 첫 컴퓨터를 사기 위해 부모님과 차를 타고 동네 전자제품 매장들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지금은 방에 누워 스펙과 가격이 깔끔하게 정리된 테크 유튜버의 영상을 몇 개 본 뒤 주문 버튼만 누르면 끝이지만, 그땐 그게 당연한 거였다.

강변 테크노마트는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은 물론 지상 10층짜리 거대한 건물 안에 컴퓨터, 게임기, 이동통신기기, DVD 등 다양한 전자제품 매장이 층마다 꽉꽉 들어차 있어 쇼핑에 제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쇼핑으로 소비의 트렌드가 바뀌면서 많은 매장이 영업을 종료했고, 새로 입점하는 업체가 나타나지 않아 그 공간이 텅 비어버리게 되었다. 판매하는 사람도 없고 구매하러 오는 사람도 없는 ‘유령 상가’가 된 것이다.


그러다 몇 년 전, 갑자기 20대 사이에서 강변 테크노마트 붐이 일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Y2K’ 대유행 시대가 도래한 것…(마이 베이비 알러뷰쏘머치 포에버 유 앤 아이~♫) 1998년 개장 이후로 바뀌지 않고 그대로인 내부 인테리어 때문에 마치 그 시절에 시간이 멈춘 듯 레트로한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건데, 지금까지도 Y2K 감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이곳을 찾고 있다.


사실 유령 상가라고 해서 디스토피아 영화에 나올 법한 어둡고 으슥한 모습을 상상했는데, 막상 들어가니 평범한 쇼핑몰이 나와서 조금 실망(?)했다. 1층은 ‘엔터식스’라는 이름의 작은 패션 쇼핑몰. 쇼핑하는 사람들과 빈자리에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상외로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특이한 점은 딱 한 가지. 요즘 보기 힘든 화려한 인테리어다. 곡선을 활용한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장식물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사진 속 복잡한 패턴이 그려진 천장 조명이 그중 하나다. 이런 건축 양식을 ‘로코코 양식’이라고 하던가. 최근에 비슷한 인테리어를 어디서 봤는지 생각하다가 에버랜드가 떠올랐다. 빈티지한 유럽 감성으로 꾸며진 에버랜드의 소품숍이나 식당이 딱 이런 느낌이었다. 꿈속에 들어온 것처럼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느낌.


2층부터 8층까지는 전자제품 매장. 손잡이가 네온색으로 번쩍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나름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1층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친구들이 도착하기 전에 혼자 여러 층을 돌아다녔는데, 이 넓은 공간에서 마주친 사람이 5명이 채 안 된다.

전체 매장 중 절반 이상이 영업을 종료한 상태라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중간중간 아직 영업 중인 매장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손님이 있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기사 사진을 찍기 위해 혼자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을 쏘다니니 지나치는 카메라 매장 사장님마다 내게 말을 건넸다. “카메라 파실 거예요?” “제가 한번 봐드릴게요.” 손님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 모든 가게 사장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내향인에게는 아주 난감한 상황. 뻘쭘하게 웃으면서 “아니에요. 괜찮습니다.”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빠르게 자리를 떴다…


드디어 찾았다. 백룸 감성…! SNS로 방문 후기를 찾아보면서 최근 ‘백룸 감성’을 느끼려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걸 알게 됐다. 백룸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잠깐 설명하자면, ‘백룸(The Backroom)’은 무작위로 생성된 방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미로 같은 공간을 의미한다. 오류처럼 물리 법칙을 벗어나 우연히 들어가게 된다는 도시 괴담에서 시작된 세계관인데, 예를 들면 이런 거다. 게임을 하다가 캐릭터를 잘못 조작해 벽을 뚫고 맵 밖으로 나가버렸을 때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빈 공간, 웅웅거리는 형광등 소리만 들리는 아무도 없는 새벽의 쇼핑몰. 왠지 스산하고 기괴한 그 느낌이 바로 ‘백룸 감성’이다.

얼마 전에 이 백룸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영화 <백룸>이 개봉하면서 강변 테크노마트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건데, 사진 속에 보이는 것처럼 폐업으로 텅 비어버린 공간들 때문에 현실에서 백룸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내가 실제로 가본 후기는 이렇다. 갑자기 뜬금없이 나타나는 빈 공간들이 기묘하게 느껴짐. 기분 탓이겠지만 이곳 공기만 더 썰렁한 느낌. 아직은 낯선 세계관인 백룸이 대체 어떤 건지 보려고 이런 공간들을 일부러 찾아다니긴 했지만, 한곳에서 오래 머물진 않았다(무서워요).

사실 여기 진짜 유명한 곳은 따로 있다. 바로 지하 1층 ‘푸드코트’. 쇼핑몰만 가면 사고 싶은 게 넘쳐 눈 돌아가는 욕심 그득한 지금과 달리 물욕이 없던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 손에 이끌려 간 쇼핑몰이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단 하나 좋은 게 있었다면 바로 푸드코트에 갈 수 있다는 건데, 돈가스부터 라면, 떡볶이, 냉면 등 수많은 종류의 음식이 한곳에 모여 있어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때 그 천국이 강변 테크노마트 지하 1층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늦는다던 친구들이 밥 먹을 시간에 맞춰 기가 막히게 도착했고,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주문한 후 다시 모이기로 했다. 고민 끝에 내가 선택한 메뉴는 철판볶음밥. 간판에 대문짝만하게 쓰인 ‘철판볶음밥’이라는 글씨가 정직하고 강렬한 게 삘이 찌르르 왔다. 여긴 분명히 맛집이다.

가게 앞에는 이렇게 음식 모형과 함께 가격이 쓰여 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서 보기만 해도 군침이 싹 도는 가짜 음식. 이런 음식 모형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오나전 추억 돋네(?).

각기 다른 재료가 들어간 철판볶음밥 중 ‘강추’라고 적혀 있는 피자치즈 철판볶음밥을 주문했다. 가격은 9,500원. 메뉴를 주문하면 무려 음료가 서비스로 나온다. 요즘 편의점에서 파는 콜라 가격을 생각하면 볶음밥에 음료까지 한 끼 식사로 꽤 저렴한 가격이다. 맛은 단순 그 자체.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 준 것 같은 슴슴한 김치볶음밥에 살짝 끼얹은 양식 소스와 고소한 모차렐라 치즈의 익숙한 조합이다. 맵고 짜고 단 자극적인 음식이 판치는 요즘 세상에 맛보기 힘든 추억의 맛이라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친구들은 뭘 주문했는지 한번 볼까. 강경 한식 파인 친구 Y는 콩나물 야채밥과 김치찌개가 같이 나오는 세트를 골랐고, 오자마자 덥다고 헥헥대던 친구 H는 물냉면과 비빔냉면이 짬짜면처럼 반반 담겨 고기와 함께 나오는 육쌈 양다리 냉면을 선택했다. 맛에 대한 평가는 내가 남긴 것과 비슷하다.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추억의 맛.

지금까지의 모든 여정은 이곳에 오기 위한 빌드업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변 테크노마트 푸드코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 바로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아우라가 느껴지는 ‘눈의 꽃’이다. 눈의 꽃은 팥빙수, 과일빙수, 눈꽃빙수 등 여러 종류의 빙수를 파는 빙수 전문점이다. 그때 그 시절 추억의 카페 ‘캔모아’가 떠오르는 화려한 간판과 먹음직스러운 빙수 모형. 가게 전체에 다닥다닥 붙은 현란한 메뉴 사진에 우리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가게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빙수 모형이 진열된 쇼케이스 안에 애니메이션 캐릭터 피규어가 함께 장식되어 있다. 빙수 위에 높게 쌓아 올린 소프트아이스크림 모형 위에도 조그마한 피규어 키링이 매달려 있고, 구석구석 아기자기한 소품이 한가득이라 소품숍에 온 것처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작은 에피소드를 하나 이야기하자면, 빙수를 주문하고 기다리다가 방금 출근한 것처럼 보이는 매장 직원의 패션 스타일을 보고 “헙!”하는 소리를 내며 놀라 버렸다. 학창 시절 남몰래 동경하던 싸이월드 얼짱 언니 그 자체였으므로. 여긴 정말 2000년대에 시간이 멈춰있었다.

메뉴판 속 수많은 빙수 중 우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눈꽃빙수’를 주문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어렸을 때 빙수 좀 먹어 본 사람들은 알 거다. 이게 근본이라는 걸.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보드라운 우유 얼음과 새빨간 딸기시럽, 예쁘게 잘린 과일 조각들, 초코와 바닐라가 반반 섞인 소프트아이스크림, 인원수에 맞춰 서비스로 나온 토스트까지 그때 그 시절 그대로다. 음식에 담긴 추억은 참 신기하다. 한입 먹자마자 세월이 지나 까맣게 잊고 있던 순간도 마치 어제 겪었던 일처럼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니. 방과 후에 친구들과 카페에서 빙수 하나 시키고 서비스 토스트를 무한리필하며 몇 시간 동안 수다 떨던 시절이 떠올랐다. 잊고 있던 친구들의 얼굴도. 얘들아 잘 살고 있니?

빙수를 해치운 뒤 배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잠시 산책을 했다. 아까 혼자 발견했던 백룸 감성 공간들을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다가 화장실에 들렀는데, 여긴 화장실도 평범하지 않다.


네 칸 정도의 작은 화장실에 반짝거리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별 모양 타일 너무 귀엽잖아! 짙은 푸른 색 타일로 표현한 밤하늘, 노란색과 하늘색 포인트 타일로 새긴 초승달과 별. 이런 화장실은 6살 때 다녔던 유치원 화장실 이후로 처음이다. 강변 테크노마트에 있는 화장실은 내가 본 밤하늘 말고도 다양한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모든 층의 화장실을 전부 가보지는 못했지만, SNS에 방문 후기를 검색하면 다른 방문객들이 다녀간 귀여운 디자인의 화장실을 구경할 수 있다.

마지막 목적지는 9층 하늘공원. 높은 건물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한강 뷰로 유명한 스팟이다.

몇 시간 동안 실내에만 있어 갑갑해지려던 차였는데, 하늘공원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자마자 펼쳐진 탁 트인 하늘과 쏟아지는 햇빛에 가슴이 뻥 뚫렸다. 꽤 넓은 공간에 푸릇푸릇한 화단과 아담한 분수가 깔끔하게 가꿔져 있다. 공원 중앙에 비치된 넘어질 듯 절대 넘어지지 않는 팽이 의자에서 아이들이 까르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난간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펼쳐지는 미친 뷰. 맞은 편에 높이 솟은 롯데타워가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로는 길게 늘어선 잠실철교가 보이고, 다시 왼쪽을 바라보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차들이 쌩쌩 달리는 올림픽대교가 보인다. 매일 지나치는 한강인데 높은 건물 위에서 바라보니 느낌이 또 다르다. 한강이 이렇게 컸구나.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좌석이 많아서 날씨 좋은 날 책 한 권 들고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강변 테크노마트는 듣던 대로 2000년대에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았다. 요즘 쇼핑몰과는 다른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잊고 있던 오래된 기억 속에서는 너무나 친숙한 그곳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곳은 정말 2000년대 어느 날에 시간이 멈춰있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다시 시간이 흐르는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게 아닐까?’ 마치 판타지 영화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에서 시간 조정 능력을 가진 미스 페레그린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루를 무한 반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쁜 일상에 지쳐 잠깐 시간을 멈추고 추억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뻔하지 않은 실내 데이트 코스를 찾는다면, 혹은 ‘Y2K 감성’, ‘백룸 감성’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번 여름 강변 테크노마트에 놀러 가 보면 좋겠다. 아, 어떤 이유로 방문했든 눈꽃 빙수는 꼭 먹어 보길 바란다. 진짜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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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은
에디터 수은. 애매한 취향은 축복입니다. 뭐든지 좋아할 수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