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대중음악 평론가 정민재다. 해가 바뀌고 1월도 벌써 다 지나갔으니 신년 인사를 하기엔 좀 머쓱한 때다. 그래도 우리는 설이 지나야 진짜 새해 아닌가. 더 늦기 전에 들어봐야 할 아홉 뮤지션을 모았다. 장르부터 성별, 형태, 데뷔 시기 등 여러모로 서로 다른 이들의 단 한 가지 공통점은 폭발적 성장의 동력을 갖췄다는 것. 지금 알아두면 머지않아 어디 가서 여유롭게 아는 척하는 날이 올 것이다. 설령 그날이 오지 않더라도 플레이리스트를 풍성하게 해줄 이들임은 틀림없다. 2026년을 환하게 빛낼 음악가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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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권진아와 최유리를 섞어 놓은 것 같다.” 지난해 JTBC <싱어게인 4>에 ‘61호 가수’로 출연한 공원의 첫 무대에 달린 댓글이다. 무려 1,600개가 넘는 공감을 받았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의 음색에선 확실히 친숙한 느낌이 든다. 그럼 이제 61호 가수가 아닌 공원의 음악을 들어 보자. 싱어송라이터 공원은 슈게이즈를 추구한다. 그게 뭐냐고? 설명보단 들으면서 직접 느끼는 편이 쉽다. 지글대는 기타 연주와 강렬한 드러밍이 연출하는 공간감, 겹겹이 쌓인 소리 더미에 안개처럼 퍼지는 목소리. 한 마디로 일반적인 팝의 문법과는 거리가 멀다. 공원의 슈게이즈는 좀 다르다. 그는 그럴듯한 사운드 디자인에 탁월한 멜로디 감각, 특유의 매력적인 보컬로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의 문턱을 낮춘다. 몽환적이고 드라마틱한 밴드 연주에 신비로운 목소리가 아득히 메아리치는 ‘메아리’를 들어 보라. 61호 가수? 그는 이미 전도유망한 아티스트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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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kai 토카이
밴드 토카이는 공연 때마다 이렇게 외친다. “토카이를 세카이로!” 팀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일본어 단어 세카이(せかい, ‘세계’)를 활용해 포부를 드러내는 이들만의 구호다. 곽태풍(보컬), 김두하(기타), 진수용(드럼)으로 구성된 2002년생 동갑내기 3인조는 작년 1월 데뷔한 이래 6개월에 한 장씩 결과물을 내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첫 정규 앨범 《burning.》, EP 《breathing.》에 이어 이번 1월 발표한 정규 2집 《shining.》까지, 결성 초기부터 구상한 청춘 3부작을 완성했다. 제이팝의 영향이 느껴지는 선명한 멜로디에 명료한 구성, 명랑하고 패기만 만한 보컬이 이들을 대표한다. 새 앨범의 문을 여는 ‘청춘작열’에서 경쾌하고 푸르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나. 동시에 한없이 서정적이고 아련한 선율도 써내는 게 이들의 강점이다. 타이틀 곡 ‘Sakura’의 감수성이 마음에 든다면 1집의 ‘Violet’, ‘Aoki’까지 챙겨보자. 참고로 팀 이름은 김두하가 연주하던 악기 회사 이름이다. 우리는 시시한 작명이 위대해지는 경우를 여러 번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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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솔
싱어송라이터 진솔은 작년 11월에 데뷔 EP를 냈다. 지금까지 발매한 곡은 EP에 담긴 6곡이 전부. 누군가는 그를 이 리스트에 포함하긴 좀 이르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솔로 아티스트로는 두 달 남짓한 신예지만, 작곡가로 보낸 기간은 올해로 9년 차에 접어든다. 그동안 김세정, 도영 등과 60여 곡을 발표했고, 그중 걸그룹 키스오브라이프의 ‘Sticky’는 음원 차트 톱3에 오르기도 했다. 한창 곡을 만들다 보니 정작 자신이 어린 시절 좋아했던 스타일의 음악은 만들지 않았단 걸 깨달았다고 한다. 그렇게 나온 EP 《4Cuts》는 그의 취향과 개성, 대중적 감각을 조화롭게 담아낸 앨범이다. 헤어진 연인에게 냉소적으로 경고하는 ‘정신 좀 차려’에서는 치밀한 스토리텔링과 고유의 표현력이, 밴드 신인류의 보컬 신온유와 호흡을 맞춘 ‘치사량(Help Me)’에는 세련된 팝 멜로디가 반짝인다. 뛰어난 작곡가라고 누구나 싱어송라이터로 거듭나진 않는다. 진솔은 단 6곡으로 자신의 역량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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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
고등학교에서 어울리던 친구들이 같은 대학교에 진학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 우정이 변하지 않고 끝내 밴드까지 결성할 확률은? 윤아빈(보컬, 기타), 김태욱(드럼), 박서영(베이스), 나경호(기타, 키보드, 프로듀서)로 구성된 4인조 밴드 산보는 그렇게 탄생했다. 2024년 데뷔 앨범 《룸펜》을 내면서 “처음 모인 날부터 첫 앨범이 나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던 이들은 약 1년 반 만인 올해 2월 정규 2집 《아니카》를 발표한다. 발매 전 앨범의 라이너 노트를 쓰기 위해 먼저 들어봤다. 흥미로운 작품이다. 어린 시절 만난 친구들이 함께 20대 중반을 지나면서 경험한 시시콜콜한 에피소드와 감정이 생생히 담겼는데, 다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는 이들의 이야기에 내 친구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젊은 날의 우정 이야기란 얼마나 개인적인 동시에 보편적인가. 유려하게 흐르는 멜로디와 산뜻한 밴드 연주, 감수성을 자극하는 보컬이 선사하는 음악적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청춘의 싱그러운 성장 스토리는 언제, 어디서든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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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게
팀의 이름에 담긴 중의적 의미부터 짚을 필요가 있다. 여기엔 ‘설렌다’는 뜻과 함께 음악 장르 ‘레게’의 암시가 존재한다. 한국에서 레게를 좋아하는 걸로 유명한 연예인이 누구인가. 향스(Hyangs)와 심(Shim)으로 구성된 이들은 하하가 프로듀싱한 그룹이다. 2020년 데뷔해 레게를 중심으로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혀온 설레게를 6년이 지나 특기하는 건, 이들이 작년에 단행한 환골탈태 때문이다. 기존의 보컬리스트 두 명에 글러브맨(기타), 이스라엘(키보드), 김윤성(베이스), 채혜목(드럼)이 밴드를 이뤄 발표했던 EP 《Sunrise Groove 》에는 레게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감미로운 보컬 하모니와 펑키한 그루브가 여유롭게 넘실대는 알앤비, 솔(soul)의 정취. 타이틀곡 ‘Please Come Back To Me’의 탁월한 멜로디와 리듬감, 중독성 강한 후렴구와 짜릿한 가창은 듀오의 성공적 변신을 대변한다. 올해 아예 Band SRG란 이름으로 돌아온다는 이들의 다음 행보에는 또 어떤 설렘이 깃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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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윤
올해로 활동 10년 차를 맞은 최정윤을 주목해야 할 아티스트로 소개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다. 싱어송라이터로서 그의 지난 궤적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2017년 독립 음악가로 데뷔한 그는 굴지의 레이블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를 거쳤고, ‘YOMM’이란 이름으로 일본 활동을 펼쳤는가 하면 동료 음악가 박현서와 ‘정윤과 현서’란 팀을 이루기도 했다. 소란의 고영배, 기리 보이, 갓세븐의 영재 등과 함께한 곡도 있다. 인디 팝 아티스트로서 웬만한 경험은 다 한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아직 없는 게 있으니, 바로 정규 앨범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게 대수인가 싶지만, 싱글이나 EP가 아닌 풀 앨범에서만 가능한 감흥은 여전히 존재한다. 2023년 연말 레이블이 나온 이후 다시 인디펜던트로 돌아가 꾸준히 싱글을 내던 그가 올해 첫 번째 정규 앨범 발표를 준비 중이다. 깨끗하고 따뜻한 음색에 재즈 기반의 고감도 코드 진행이 돋보이는 팝 멜로디. 최근 싱글 ‘순간순간’, ‘알아요’에서 느껴지는 내공이 뒤늦은 1집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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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디 벗 구디
올디 벗 구디는 영어권에서 흔히 쓰이는 관용 표현이다. 오래되었지만(Oldie), 여전히 좋은 것(but Goodie). 팀 이름에서부터 이들의 지향점이 드러난다. 보컬리스트 정화, 피아니스트 강한성으로 이루어진 재즈 듀오는 작년 봄, 팀 이름과 같은 제목의 첫 번째 정규 앨범을 냈다. 셀프 타이틀 그대로 ‘올디 벗 구디’한 스타일이다. 풍부하고 스윙감 넘치는 보컬에 낭만적 고전미가 감도는 연주. 제목처럼 스윙에 흠뻑 빠지는 ‘Let us swim in the Swing!’ 같은 곡은 마치 1930년대에 나온 음악 같다. 재즈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틴 팬 앨리 시대의 미공개 유물처럼 들리는 이 앨범에는 놀랍게도 이들의 순수 창작곡만 실렸다. 이미 수없이 재해석된 클래식을 또 불러서 전 세계 수많은 경쟁자와 맞붙느니, 차라리 우리만의 스탠더드를 직접 만들고 부르자는 의도였다고 한다. 탄탄한 음악성을 바탕으로 과감하고 영리하게 접근한 이들은 좀처럼 신선함을 찾기 힘든 재즈 스탠더드의 새로운 얼굴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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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ffie 에피
하이퍼팝(Hyperpop)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이 장르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자연스럽게 뒤 문장을 완성한 행운의 편지 세대라면 하이퍼팝은 낯설 확률이 높겠다. 2010년대 중반 영국에서부터 유행한 하이퍼팝은 한마디로 전자음을 사납게 배치하고 소리를 왜곡시켜 듣는 이의 귀를 찌르는 다소 과격한 팝 음악이다. 팝의 전형성을 거칠게 벗어나지만, 그럼으로써 새로움을 좇는 Z세대의 팝 음악이 됐다. 2020년 래퍼로 처음 이름을 알린 에피는 지난해 하이퍼팝을 국내화한 주역이다. 2002년생인 그는 하이퍼팝의 극적 문법과 사운드 디자인에 케이팝의 멜로디, 감수성을 접목한 EP 《E》로 본토와는 다른 한국식 하이퍼팝을 완성했다. 키치한 홈 비디오 스타일의 뮤직비디오와 시너지를 일으킨 ‘down’, 가사에 f(x)와 뉴진스, 빅뱅을 인용한 ‘코카콜라’ 등이 드디어 우리에게도 감각적인 우리만의 하이퍼팝이 나왔다는 기쁨을 안겼다. 여기에 ‘CAN I SIP 담배’, ‘MAKGEOLLI BANGER’ 등이 담긴 후속작으로 기분 좋은 충격파를 이어가며 케이팝 이면의 마이너 흐름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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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IMYOUNG 나우아임영
국내에서 힙합이 마지막으로 대중적 위력을 발휘한 게 언제였나. 작품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웰메이드 앨범은 꾸준히 나왔다. 문제는 흥행이다. 경연 프로그램과 무관하게 인기 차트에 올라 히트곡이 되고, 당대의 스타가 되는 사례가 ‘어느새부터’ 끊겼다. 2000년생 래퍼 나우아임영에게선 이 방면의 오랜 갈증을 해소할 잠재력이 보인다. 2022년 데뷔한 그는 지난해 식케이(Sik-K)가 설립한 레이블 KC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에겐 과거 빅뱅, 2NE1으로 대표되는 강렬한 일렉트로 하우스 사운드와 오토튠이 날카롭게 걸린 싱잉 랩, 무엇보다 귀에 맴도는 멜로디 진행이 그의 개성을 만든다. 기존에 자신이 발표했던 ‘AH’에 식케이의 랩을 더해 완결성을 높인 ‘AH AH’는 전성기 시절 빅뱅을 연상케 하는 뱅어다. 힙합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반갑게 즐길 만한 노래다. 이어진 첫 정규 앨범의 ‘LUXURY BASS’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친숙한 댄스 사운드에 눈에 띄는 비주얼까지, 새로운 스타 탄생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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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재
대중음악 평론가. 음악이 들리는 글과 말을 추구한다. 음악과 수다, 무엇보다 음악 수다를 좋아해 팟캐스트 '뮤직 매거진 뮤브'를 제작,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