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역

LIFE

7시 48분에 만나요, 안동역에서

낭만의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안동역에 다녀왔습니다
낭만의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안동역에 다녀왔습니다

2025. 08. 23

안녕하세요. 객원 에디터 김정년입니다. 광복절 연휴에 KBS <다큐멘터리 3일> 촬영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올해 여름, SNS에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10년 전 약속’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자리였죠.

10년 뒤 우리 여기서 다시 만나요!
2015년 8월 15일 오전 7시 48분

때는 바야흐로 2015년 광복절 아침. KBS 다큐멘터리팀의 이지원 촬영감독은 안동역에서 아침 기차를 기다리던 익명의 배낭여행객을 만났습니다. 친구끼리 배낭여행에 나선 소감, 다음 목적지 같은 걸 물어보던 와중에, 세 사람은 재회를 약속합니다. 카메라가 켜진 상태였죠.

출처: KBS​ <다큐멘터리 3일>

방송 후 10년이 흘러 어느덧 2025년. 이지원 촬영감독은 여름이 다가오자 ‘그때 그 약속’을 떠올립니다. 갈지 말지 고민하는 마음이 담긴 촬영감독의 인스타그램 피드에 사람들은 낭만적이라며 열렬한 격려를 보냈고, 학생 중 한 명이 들고 있는 오레오 등 각종 브랜드 계정이 댓글로 응원하는 댓글을 남겼습니다.

이지원 촬영감독의 이야기가 네티즌 사이에서 점점 더 화제가 되었습니다. 10년 전 KBS <다큐멘터리 3일>의 안동역 재회 약속이 미담이자 낭만을 상징하는 하나의 현상이 되었고, 이지원 촬영감독은 자기 몫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안동역으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KBS 다큐멘터리 팀은 여기에 다큐멘터리 제작을 보태기로 결정했죠. 10년 전 약속을 지키러 약속 장소로 내려간 촬영감독, 그를 둘러싼 72시간의 기록. 그것이 바로 2025년 8월 22일, 금요일 밤 KBS 2TV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3일 특별판 – 어바웃 타임>입니다.

이는 2022년에 종영됐던 인기 다큐 프로그램의 부활이기도 했어요. KBS <다큐멘터리 3일>은 특정 장소에서의 3일을 기록하는데요. 21세기 한국의 이모저모를 ‘특정한 공간’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세밀하게 관찰하는 게 프로그램 콘셉트였어요. 취재현장에서 벌어지는 상황 변화를 담백한 편집과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였고, 방영 당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죠.

716회차 방송을 마지막으로 종영한 방송이 부활하는 것도 낭만적이고, 낭만적인 약속을 지키려는 모습도 낭만적입니다. 2025년 8월 15일 오전 7시 58분이 되면 교통인프라 개선으로 이미 폐역이 된 구 안동역 앞에서. 무언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게 기정사실이 됐죠.


8월 14일 오후 5시 32분
옛 안동역으로 이동해보자

​안동역(2025). KTX 개통을 비롯한 교통 인프라 개선으로 역사를 안동시 외곽으로 옮겼다. <다큐멘터리 3일>에 등장한 역은 이미 문을 닫은 상태.

광복절 연휴에 여름 휴가 인파가 겹친 탓인지 안동으로 내려가는 교통편을 구하기는 무척 어려웠습니다. 하루에 네 번 들른다는 KTX는 이미 매진. 대신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안동행 버스티켓을 운 좋게 예약했습니다. 버스는 오후 5시 반에 안동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 터미널 앞이 곧바로 역사와 이어져 있었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동역 인근 가게에 들렀고, 근처에 방송 촬영하는 분들이 계신지 여쭤봤지만! 딱히 그런 사람들은 없고 안동역도 평소와 다를 바 없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새 안동역에서 택시를 잡고 안동 시내로 이동합니다. 경험상 지역 내 소식은 택시 기사님들이 빠삭한데요. 안동 시내로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혹시나 싶어서 기사님에게 물어봤어요. 광복절 오전에 이뤄질 옛 안동역에서의 KBS 다큐멘터리 촬영을 아시는지를요.

“KBS 다큐? 상봉이요? 그 옛날에 KBS 이산가족상봉 말고는 들은 게 없는데요.”

기사님은 오히려 문을 닫은 옛 안동역에 제가 무슨 일로 가는 건지 되물으셨죠. 기사님은 8월 중순에 안동에 오면 줄불놀이가 유명하다고 낙동강변에서 불놀이가 볼만하다며 뜻밖의 여행 꿀팁을 전해주셨어요. SNS에서의 관심도와 현실 세계에서의 관심도는 뚜렷한 낙차가 있다는 걸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한밤중 야장을 즐기는 관광객이나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벗 삼아 수다를 떠는 안동시민을 붙잡고 같은 질문을 던져봤지만, 다들 이번 상봉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이제 제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하나. 10년 전 다큐멘터리 촬영 장소에서 KBS 제작진을 만나는 일뿐입니다. 안동에 내려와서 마땅한 인터뷰를 하지 못한 데다, 날이 밝으면 제작진에게 말을 걸기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죠.


8월 14일 오후 9시 52분
남자 두 명이 안동역에 있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상봉 예상지에 도착하니 두 명의 남자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역 앞에 서있습니다. 팀 리더인 KBS 조정훈 프로듀서와 낭만적인 약속의 주인공인 이지원 촬영감독이었죠. 그들은 구 안동역 광장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10년 전 배낭여행객 친구들이 예정 시간보다 이르게 올지도 모른다 여겼던 걸까요. 역전 파출소를 지키는 경찰관 말고는 아무도 없던 고요한 광장. 저는 카메라를 든 제작진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붙이며 명함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취재를 허락받을 수 있었죠.

출처: 코레일 / 바이브랜드

직업정신을 발휘해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자기소개인지 고백인지 모를 말을 시작했습니다. 

저도 10년 전에 <다큐멘터리 3일> 팀에서 촬영한 내일로 배낭여행을 떠났었다고. 아마 지금 30대인 시청자들은 여러분이 기록한 낭만을 분명 기억할 거라고. 최저시급이 4~5,000원 하던 시절이었다고. 어렵게 모은 돈으로 방학 무렵이면 일주일 동안 무제한 철도패스를 들고 새마을호와 무궁화호를 갈아타며 낯선 동네와 전국의 게스트 하우스를 누비는 게 참 즐거웠다고. 살다보면 이따금 떠오르는 인생의 커다란 낭만이었다고. 사람들은 내일 낭만이라 이름 붙이고 싶은 장면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모일 것 같다고. 

그런 말을 꺼냈습니다. 제작진 앞에서 독백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죠.

​제 이야기를 곁에서 조용히 듣던 이지원 촬영감독은 제 손에 스티커를 쥐여 주었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저희는 여기서 계속 자리를 지킬 예정입니다. 일찍 오셔서 피곤하실 텐데 내일 또 와서 지켜봐 주셔야죠.” 너그럽게 타이르는 말에 번뜩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열심히 살펴야 할 건 지원 감독님과 여학생들의 낭만적인 상봉을 특종처럼 다루는 게 아니라 현장을 목격하러 안동역까지 찾아온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아닐까? 그들의 다양한 욕망 아닐까.”


8월 15일 오전 7시 10분
그날이 왔다

그 다음 날 아침, 옛 안동역 광장을 찾았습니다. 현장은 어린 소년들이 광장에서 축구공을 갖고 놀 정도로 한적한 분위기였습니다. 광장은 전날 밤보다 더 많은 제작진들이 모여있었는데요. KBS <다큐멘터리 3일> 팀은 옛 안동역 건물을 미리 대관한 모양인지 역 안팎에 다양한 촬영장비를 설치해둔 상태였습니다. 촬영감독님들이 카메라를 들고 광장에 모인 시민들과 눈을 마주치며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오전 7시 30분이 넘어가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광장으로 모이기 시작했어요. 취재진 혹은 유튜버로 짐작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비중은 일반 시민들이 더 많았습니다. 갓난아이를 안고 온 젊은 부부, 부모님을 졸라서 왔다는 열두살 초등학생, 다큐 3일의 오랜 팬을 자처하는 시민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죠. 

인터넷에서는 안동역을 찾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도 많았습니다. 특히, 현장에서 상봉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을 ‘낭만파괴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았어요. 구경꾼의 존재 자체가 낭만의 주인공에게 부담을 준다는 조언이 있었고 낭만적인 사건이 되겠지만, 자신의 낭만이 아닌 것을 욕망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식으로 냉소적인 반응을 던지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죠. 다섯 글자로 말하자면 ‘거길 왜 가냐’ 정도가 아닐까요.

“얘들아! 그러면 우리는 20년 뒤에 여기서 만날까?”

안동초등학교에서 왔다는 3인조 학생들이 꺄르르 웃으며 지나갑니다. 방송국 카메라가 그들이 서있는 방향으로 들어오면, 유독 환하게 웃던 학생이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온 학생들에게 물어봤습니다. 뭘 기대하며 이곳을 찾았는지.

“멋있잖아요. 약속을 지키는 건 멋있어요. 그리고 그 약속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응원하고 싶었어요. 친구들 사이에서 이번 일이 되게 유명했었어요.”

학생들이 저에게 되돌려준 말은 안동역을 찾은 사람들에 대한 간단명료한 설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동역을 찾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는 이유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이 어린 학생들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슬슬 낭만이라는 개념을 조금씩 터득하고 있을 겁니다. 전화를 걸어 친구의 엄마가 받으면 “OO이 집에 있어요?”라고 묻는 느린 낭만이 사라진 시대, 너무도 스마트해진 시대에 처음 체감하는 낭만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웹툰이나 영화 같은 콘텐츠를 통해서 낭만을 배울 수도 있겠지만, 물리적으로 경험한 낭만은 더 특별한 법이니까요. 그들은 어쩌면 현실에서 직접 낭만을 직접 목격하며, 낭만이 무엇인지 자신의 힘으로 정의 내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세 학생이 지키지 않아도 그만일 약속을 지키는 게 낭만 중 하나라는 걸 먼 훗날에도 기억할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8월 15일 오전 7시 48분
폭발물이 설치되었다고?

예정된 상봉시간인 7시 48분이 가까워질수록 군중은 조심스럽게 움직입니다. 광장 옆에 파출소가 있었고, 경찰이 미리 설치한 것으로 짐작되는 가드레일을 따라 사람들이 역광장을 넓게 둘러싸기 시작했어요. 약속된 시간이 임박합니다. 사람들은 말소리를 줄이고 숨죽인 채 주인공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대로변을 유심히 살폈어요.

​오전 7시 48분. 디데이 카운트가 끝났습니다. 역 광장에서 로맨틱한 상봉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지원 촬영감독도 두 명의 배낭여행객도 보이지 않았죠. 시간이 흐를수록 현장을 방문한 사람들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 같은 게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군중 사이에서 상봉 현장을 더 지켜볼지 말지 고민하는 대화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할 무렵. 파출소에서 나온 경관님이 역 광장 앞에 우뚝 섰어요.

“시민 여러분, 역사에 폭발물이 설치됐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시민들 안전을 위해서 통제를 따라주십시오.”

그 순간, 낭만을 고대하던 광장 사람들의 기묘한 에너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들고 말았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맥이 풀린 얼굴로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이번 원고를 청탁한 에디터B에게 전하고, 인근 카페에서 뜻밖의 해프닝이 가라앉길 기다렸습니다.

오전 10시, 소방차까지 출동한 옛 안동역 광장을 지나 파출소로 들어갑니다. 신분을 밝히고 상황수습현황을 파악했는데요. 폭발물 설치는 악의적인 허위신고로 추정. <다큐멘터리 3일>팀이 곧 다른 장소로 자리를 옮겨 촬영에 나선다는 사실을 확인했어요. 머지않아 방송인 이만기가 나타나 텅 빈 광장 앞에서 짧은 촬영을 마치고 역사 앞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죠.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에 쓰일 장면을 예정대로 촬영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저는 이어서 옛 안동역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철수를 준비하는 <다큐 3일>의 제작진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프로듀서님과 아침부터 시민들을 카메라에 담은 촬영감독님들에게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았지만, 거기서 현장취재를 마쳤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따로 편지를 보내기 확인해보기로 마음먹었죠. 광복절 연휴가 끝나고, KBS 조정훈 프로듀서로부터 장문의 메일을 회신받을 수 있었습니다.

“포스트 프로덕션 시간이 모자라서 당일부터 강행군 중입니다. 원하시는 만큼 충분한 답변을 드릴 수 없는 점 양해 바랍니다. 모든 매체에 재회를 둘러싼 해프닝을 방송으로 확인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있어요.

저희는 있었던 일, 확인한 일만 저희 프로그램의 렌즈를 통해 방송되길 원합니다. 다만 다소 거칠게 팩트들이 유통되어서 이번 만남을 지켜보고 있던 당사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목격자들이 오인하는 부분도 있구요. 72시간 여정과 10년 전 세 분을 응원해주신 분들 모두의 순수한 마음이, 일부 혼탁한 바이럴 매체와 당일의 해프닝으로 훼손되지 않길 원하는 마음입니다.

2025년 여름 청춘과 낭만을 호명한 10년 전 다큐 3일과, 내일로 기차여행에 나선 청년들과 제작진의 가늘고 느슨한 인연이, 이런저런 희망과 소망을 안동역에 쏟았던 모든 분들께 힘이 되길 바래요.

세상엔 작은 기적 같은 일들도 있구나, 인생은 낭만을 기억하고 있구나. 만남의 성사 여부와 관계없이, 낭만이라는 도무지 이 세태에 어울리지 않은 감정을 끄집어내어 기억하게 한 세 분의 뜨거웠던 여름을 지지하고 싶습니다.”

8월 22일 오후 10시
우리가 낭만이라 부르고 싶은 것

이번 취재 기사를 마무리 지으며, 낭만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지금 이 시대에 낭만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어떤 낭만을 원하는 걸까요?

낭만은 극적으로 성사된 기적이 아니라, 그 기적을 믿고 싶어 했던 수많은 마음들 속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오래된 약속을 여전히 마음속에 간직하는 일, 누군가의 꿈을 함께 기다려 주는 일, 그리고 그것을 망치려는 해프닝마저 너그럽게 기억해 두려는 마음. 저는 그런 걸 낭만이라 부르고 싶어집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About Author
김정년

브랜드와 음식문화를 탐구하는 피처 에디터. 세계를 떠돌며 아름다운 논픽션을 쓰는 게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