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아무것도 사고 싶지 않다는 거짓말

[이충걸 칼럼] 당근으로 카시오 A158W를 샀다
[이충걸 칼럼] 당근으로 카시오 A158W를 샀다

2026. 08. 27

편집자 주: 6년째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기획 노트에는 ‘이충걸’이라는 이름이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잡지를 한 번이라도 동경했다면 모르기 힘든 지큐 코리아의 전설적인 편집장. 이충걸 작가는 잡지계를 떠났지만 여전히 글과 가까이 지냅니다. 아니, 오히려 더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에세이를 쓰고, 소설을 쓰고, ‘이충걸의 글쓰기 클래스’라는 글쓰기 수업을 운영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화려한 패션 잡지 세계를 떠나 텍스트의 세계엔 가까워진 그에게 더 많은 원고를 받고 싶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글은 여전히 사고 싶은 게 많은 한 사람의 물욕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은 생명이 있다는 말을 믿진 않는다. 나는 자동차 모형이든, 돌멩이든 아이스크림 막대기든, 뭐든 친구로 바꿀 수 있는 아이가 아니니까. 그래도 없이 살면 매우 곤란한 물건은 있다.

누구는 집에 불이 나 커피 머신이 타버리면 세상 전체를 잃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나는, 시계였다. 예전엔 책이라고 했을 텐데, 도서관에 가지도 않고, 옛날만큼 다독하지 않으니 덧붙일 말은 없다.

나는 시계를 좋아했다. 시간을 벗어나는 이는 없고, 정확하든 아니든 다들 시계를 보며 죽는 날을 셈하니까. 또 남자 장신구가 시계 뿐이기도 하고. 팔찌? 귀걸이? 전생에도 생각해본 적 없다.

아무튼 시계를 모았다. 셔츠 커프스로 둘러싸인 채 살에 닿는 금속을 보며 몰랐던 언어와 명칭을 배우는 데 시간을 썼다. 단호한 쿼츠 애호가도 마음을 바꿀 만큼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기계식 시계를 차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품위 있게 맞을 것 같았다. 바쁘게 윙윙거리는 스켈레톤 시계의 해부학 수업을 받다 보면 아주 특별한 시간의 세계에 발을 디딘 기분도 들었다. 마침내 원하는 장소에 왔다는 감각 또는 내 일상에 목적성을 부여해 주리라는 교묘한 약속이랄까.

나의 24시간은 제네바 인증을 받은 크로노미터처럼 정확하게 똑딱거렸다. 만약 시간 자체가 견고하지 않고, 혹시 정치적 구조물이라면 삶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시계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격조차 묻기 겁나는 천문학적 오브제지만, 그래도 몇 개는 샀다. 끝도 없이 지갑을 열도록 설계된 세상에 나라도 뭘 사지 않으면 경제는 주저앉을 거라고 없는 살림에 기염을 토했다. 시계 찬 손목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기절초풍 부자도, 강박적 저장 강박증도, 마냥 티내고 싶은 마음도 아니면서, 시계 하나 때문에 삶 자체가 통제 불능이던 그때.

어느 해, 제니스 스틸 크로노그래프에 관해 기나긴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누가 나더러 시계 유튜버를 하라고 권했다. 그게 칭찬인지, 그 정도면 병이란 힐난인지, 오직 내 삶이 무너지고 있다는 뉘앙스만 분명했다. 나는 강한 시계학적 견해를 가진 곰 같은 사람일 뿐인데.

나는 다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시계의 섬뜩한 아름다움보다 가치 있는 것이 있었다. 4월의 목요일, 느슨한 금도금 팔찌 같은 시계가 대부업 하는 어른 팔뚝 털을 꼬집을 때  독특한 혐오감이 아롱졌다. 다른 날, 이탈리아 식당에서 오일 파스타를 먹는데 롤렉스 에어킹의 무두질한 가죽 스트랩에 기름이 튈까 봐 신경 쓰였다. 가을 밤길을 걸을 때 손목을 따뜻하게 두드리던 나의 에어킹, 정말로 희귀한 다이얼과 차라리 비범한 바늘에 올리브 기름 방울은 옷의 티, 아니 티의 옥 같았다.

나의 실용주의가 폭발적으로 소리쳤다,

“이제 시계 그만 살 거야!”

문제는, 무엇에 몰입하면 꼭 사야 한다는 초조함이었다. 나의 소모병,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충동, 인류학자들이 내가 글 안 쓸 땐 그것만 할 거라고 우길 쇼핑 행위는 안경, 모자, 티셔츠, 가방으로 옮겨 붙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미학적 단순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 생물학적, 주관적, 역사적 차원을 다 지니고 있었다. 물론 나는 예쁜 걸 샀(다고 믿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시장의 지시에서 벗어나 최소화된 삶을 만들라고 충고한다. 가진 것의 8할은 다만 불필요하며, 그저 인생을 짓누를 뿐이라고. 그러니까 가진 것을 세어보고, 엄격하게 분류하고, 필요할 때만 푼 다음, 3분의 1을 잘라내라고. 한 달 뒤엔 나머지도 다 버리라고. 나중엔 집도 줄이고, 정신적 잡동사니도 없애고, 친구도 만들지 말라고. 최후에는 심폐소생술을 해줄 극소수만 남을 거라고. 결론은, 자본주의가 고장날 리는 없고, 내가 고장 났다는 얘기였다.

소비의 열광에서 출발해 포화, 회의를 거쳐 다른 삶을 찾는다는 나의 명분이 웃기는 건 아닐지라도 왜 물건에 감정을 맡기는지, 왜 자꾸 자극을 구하는지, 왜 그렇게 빨리 싫증내는지, 소비에는 워낙 그렇게 권태가 따르는 건지에 관해선 자문할 필요가 있었다. 현대 사회가 어떻게 물질적 겸손에 매력을 느끼는 건지, 무욕의 상태가 어떻게 예술·철학·기술·자본주의와 맞물리는지는 모호하지만, 더러 누적의 논리에 지배당했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때는 그만 좀 사라는 메시지가 새로운 소비 형태이자 베끼고 싶은 라이프 스타일이 된 것도 같다. 의도된 절제가 미적인 언어로 둔갑한 열망이라면 갖지 않으려는 마음이 외려 사치로 보일 것이다.

뭐? 적을수록 더 많다고? 덜 가질수록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경험, 더 많은 성장, 더 많은 기여, 더 많은 만족, 그리고 더 많은 자유를 가질 거라고?  정말 그럴까? 무한히 부푸는 소비의 꿈에서 깨어나 물질적 한계 안에서 다른 삶의 방식을 발명할 수 있을까? 광란의 욕구를 다루지 못 하는 나로선 삶이 갈수록 복잡해질 따름이다.

아, 짜증나. 지갑이 두둑하여 선택지가 넘쳐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 안 하겠지? 수완이 좋아 하루하루 숨만 쉬어도 돈이 불어나는 사람들, 할아버지 집에서 태어나 아빠 집에서 살다가 자기 집에서 죽는 사람들은 이런 감정 모르겠지?  

하긴, 옷장을 열어도 늘 입는 티셔츠는 여섯 개 정도. 나의 신경과학으로는 세 개면 족하다. 대오각성까지는 아닌데, 갑자기 내가 가진 것이 지루해졌다. 어느 순간 신호가 왔다. 일찍 일어나 6.5 온스 미국산 코튼에 가먼트 다잉이라는 이유로 산 티셔츠를 집어 들고, 이걸 가져서 뭐가 좋은지 생각했다. 가로로 납작한 사각에 브릿지가 길어 꼭 독서실 붙박이처럼 보이는 검정 뿔테 안경과, 빈티지 사이트에서 샀으나 너무 헐거워 처박아둔 흰 색 모자, 가방이 그렇게 많으면서도 그런 색깔 또 없다고 산 카키색 백팩은 완고하게 옷장에 놓여 있을 뿐, 물리적 형태 말고는 텅 빈 채 침묵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설명할 것도 없었다.

넘어진 김에 제사 지낸다고 그 길로 양말 서랍을 정리했다. 뭉쳐 있던 겨울 울 양말을 조심조심 하나하나 풀어 각각의 짝을 가지런히 펼쳐 놓았다. 멋진 금욕주의자가 된 기분이 참기름처럼 물씬했다. 나의 자발적 단순성은 사회 불안이며, 생태계 파괴, 꼬인 제도까지 개선할 잠재력이 있어 보였다. 의지를 효율적으로 주장하려고 인 사겠다는 건지, 티도 안 나는 축소의 풍요로움 때문에 의지를 외치는 건지는 헷갈렸지만. 아무튼 과잉을 벗겨내려는 세상은 보기보다 복잡하고, 귀찮고, 불편했다.

그 와중에 태어나 처음으로 당근 거래를 했다. 앱을 설치할 줄도 몰라 친구를 성가시게 한 내가, 모르는 이와 접선해 뭔가 거래하겠다니, 공원 까마귀도 비웃었다. 그래도 카시오 A158W를 보고는 사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모든 시계 오타쿠에게는 기원이 있을 것이다. 대학 졸업하고 내 자신에게 선물했던 그 은색 물체는 인생에서 가장 젊을 때 내 손목에 시간을 붙들어 주었지.

신용산 역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다정하게 반말을 하며 시계 상태가 최상이라고 강조했다. 충격, 방진, 방수? 의문투성이. 케이스는 살짝 부식되었고, 반짝이던 테두리는 매끄럽지 않았다. 백라이트가 화면 한쪽에서 비추어 시인성이 떨어지는 채 액정의 흑백 숫자는 변함없이 현재를 비추고 있었다. 사실 내일 아침 이후로는 못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소형 전자기기의 세계에서는 어떤 시계도 거부당하지 않고, 골동품도 없으며 위계질서도 없었다. 즉, 만원짜리 카시오 시계는 10억 넘는 바쉐론 콘스탄틴 영구 캘린더 달력보다 정확할 것이다. 무엇보다 나의 끊어진 세계와, 역경 끝에 다시 시작된 세계를 이어주고 있었다.   

나는 우아한 것을 거부하지 않고, 거부할 권리도 없다. 그러나 무상함에 대한 민감성. 마찰 없는 감정의 청결함, 근원적인 무엇에 닿고 싶은 피상성… 어떤 생활 방식으로서의 ‘덜’이라는 부사엔 확실히 이상하고 보다 깊은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이 밝은 엔진을 둘렀을 때, 작은 동그라미 세상의 이상한 행복감이…

나는 시간 말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믿었다. 이윽고 내 것이 아니게 될 시간이지만.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가 남았다.  모든 걸 원하면서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나의 거짓말이.

About Author
이충걸

작가, 前 지큐 코리아 편집장. 2022년부터 글쓰기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