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 버스를 타고 가다가 스와치 강남 부티크를 지나갈 일이 있었습니다. 순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대충 봐도 수십 명은 돼 보이는 사람들이 스토어 앞에 몰려 있었고, 직원이 이를 제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거든요.
그날 밤, 소셜 미디어에서 강남 스와치 부티크 앞에 붙어 있던 안내문을 봤습니다. “안전 우려로 인해 판매를 중단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는 전 세계 스와치 부티크에서 온갖 난리가 난 사진과 영상들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제가 봤던 광경도 판매 중단 결정으로 항의하는 사람들이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이제 스와치 부티크 앞에서 이런 난리가 벌어지는 건 일상이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지난 2022년, 오메가와 스와치의 문스와치는 스와치 제2의 부흥기를 끌어내면서 본판인 오메가 스피드마스터의 판매량까지 끌어올렸고, 지금까지 무려 30가지가 넘는 배리에이션이 출시되며 수집가들의 욕구를 자아내고 있죠. (저도 4년 동안 7점 정도 모았네요.) 2년 뒤의 출시한 블랑팡과의 협업 모델인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는 비록 문스와치만큼의 성공은 아니었지만, 오메가보다 낮은 블랑팡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협업의 주인공은 누가 될까 하는 궁금증이 슬슬 올라올 무렵 공개된 것이 바로 오데마 피게와의 협업인 ‘로얄 팝’입니다. 저는 오데마 피게와 협업한다는 루머가 처음 떴을 때 반신반의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협업 제품이 오리지널의 이미지를 깎아내리지 않는다는 건 문스와치를 통해 충분히 증명되긴 했지만, 여전히 믿기 힘들었던 건 사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스와치 그룹 소속인 오메가나 블랑팡과 다르게 오데마 피게는 아직도 창업자들의 후손이 회사를 지키고 있는 가업이자 몇 안되는 독립 시계 브랜드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혹자는 언젠가는 이루어질 협업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먼저, 문스와치 출시 당시에 오데마 피게의 당시 CEO는 한 인터뷰에서 문스와치가 젊은 세대에게 전통적인 시계의 아이콘에 대해 교육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며 극찬했었다고 해요. 이미 오데마 피게 측에서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죠. 그리고, 오데마 피게가 스와치 그룹과의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시계 무브먼트에서 동력을 실제 시간의 흐름에 맞춰 분배하는 밸런스 스프링에 사용된 항자성 소재인 ‘니바크론’을 공동 개발했거든요.

(출처: clickamericana.com)
어찌 됐든, 이 ‘로얄 팝’이라는 단어만 보면 어떤 조합으로 제품이 탄생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얄’ 부분은 당연히 오데마 피게의 간판 시계인 로얄 오크를 의미하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팝’은 뭘까요? 바로 스와치가 1990년대에 발매한 바 있는 ‘스와치 팝’ 시리즈의 오마주입니다. 스와치 팝은 시계 헤드를 중심으로 손목에 차는 것뿐만 아니라 가방이나 열쇠에 매달거나, 심지어 옷에 넣는 것도 가능한 모듈형 시계였습니다. 사실 손목시계 이전에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회중시계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 개념으로 돌아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로얄 오크 회중시계가 처음인 것도 아닙니다. 1979년에 출시한 것으로 알려진 로얄 오크 5691 레퍼런스가 회중시계였거든요. (당시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아 오데마 피게 쪽에서도 추측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로얄 팝을 보면 5691에 현대적인 로얄 오크의 디자인 요소를 가미한 듯합니다. 시계 헤드는 로얄 오크의 메인 케이스 모습을 충실히 재현했어요. 팔각형 모양은 물론이고 베젤에 박힌 8개의 나사까지 그대로입니다. 케이스는 여태까지의 스와치 협업 모델들이 모두 그랬듯이 70% 세라믹, 30%의 친환경 합성 소재를 섞은 바이오세라믹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이얼 쪽과 무브먼트를 볼 수 있는 케이스백에는 모두 사파이어 글라스를 사용하는데,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에서 이미 케이스백에 사파이어 글라스를 쓰긴 했지만, 전면에까지 사파이어 글라스를 쓴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회중시계로 디자인한 특성상 여기저기 많이 부딪힐 걸 상정한 결정으로 보입니다.


로얄 팝은 두 가지 디자인을 기준으로 총 여덞 가지의 색으로 출시됩니다. ‘르핀(Lépine)’ 스타일은 용두가 열두 시 방향에 위치하고, 시분침만 있어서 깔끔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보네(Savonette)’ 스타일은 용두가 일반적인 손목시계와 비슷한 세 시 방향에 위치하고, 스몰 세컨즈 침이 더해졌습니다. 르핀 스타일은 총 여섯 가지의 색, 그리고 사보네는 두 가지의 색으로 구성돼 있어요.
로얄 팝을 처음 구매하면 시계 헤드와 함께 색을 맞춘 가죽 소재의 랜야드가 동봉됩니다. 랜야드는 시계 헤드를 프레임에 끼우면 되는데, 이미 스와치는 시계의 발표와 함께 현재 발매된 모든 색의 랜야드를 온라인으로 별매한다고 밝혔어요. 그 말인즉슨 현재의 워치 헤드에 다른 색의 랜야드를 끼워서 색깔 놀이를 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거기에 차후에는 탁상시계로 만들 수 있는 스탠드도 판매할 계획이라고 해요. 로얄 팝이 이렇게 쉽게 모듈화할 수 있다 보니 이미 다양한 써드파티 스트랩 업체들이 로얄 팝을 가운데 끼우는 형태의 스트랩을 준비하고 있어서 조만간 손목시계로써도 사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스와치 제공)
로얄 팝의 무브먼트는 스와치의 기계식 무브먼트인 시스템51(SISTEM51)입니다. 1분에 무려 6개의 무브먼트를 생산하는, 기계식 무브먼트 중에서는 최초로 생산 과정이 100% 자동화된 무브먼트이며, 최대 90시간의 파워리저브와 앞서 언급한 니바크론 밸런스 스프링을 사용해 항자성도 높였어요.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에 탑재된 무브먼트와 유사한데, 차이점이라면 로터가 빠진, 첫 수동 시스템51 무브먼트라는 점입니다. 회중시계가 많이 쓰였던 당시에는 아직 오토매틱 무브먼트가 존재하지 않았던 점을 고증한 것이죠.
출시 전에 잠깐 눈으로나마 로얄 팝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비록 소재 면에서 진짜보다 당연히 저렴해 보이지만, 겉으로만 봐도 허투루 만든 모양새는 아니었습니다. 바이오세라믹으로 만들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고증 수준(?)이 꽤 높았거든요. 바이오세라믹에서는 처음 보는 것 같은 베젤의 브러시 처리는 정교했고, 심지어 로얄 오크의 상징과 같은 와플 다이얼을 단순한 프린팅이 아닌 양각으로 구현한 것도 놀라웠어요. 문스와치의 출시 당시에는 마감에 비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 때 확실히 전반적인 만듦새가 크게 올라왔고, 이번 로얄 팝에서는 이전 모델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기교도 일부 부리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미 지난 토요일에 전 세계에서 벌어진 난리를 봤을 때, 로얄 팝의 초기 반응은 엄청난 거 같아요. 심지어 문스와치 때보다도 더 과열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강남을 비롯해 전 세계 여러 곳의 스와치 부티크가 과도하게 몰려든 인파로 판매를 중단하고 아예 문을 닫아야 했고, 스와치는 이후에 “일부 국가에서 50명 이상의 인파가 운집하면 추가 입고가 있더라도 판매하지 않는다”라는 정책을 새로 정해야 했습니다.

혹여나 로얄 팝을 구매할 계획이 있다면, 지금 구하지 못한다고 해서 앞으로도 구매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스와치 측에서도 로얄 팝은 한정판이 아니며, 최소 몇 개월은 더 판매할 예정이라고 안내하고 있거든요. 실제로 문스와치나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 모두 지금은 자유롭게 스와치 부티크에 들어가 구매할 수 있게 되었고, 일부 색상은 심지어 온라인으로도 구매할 수 있게 되었죠. 특히 지금 정가의 다섯 배에 달하는 리셀가로 구매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 미친 리셀 가격에 구매하는 것은 리셀러들의 배만 불러주는 행위니까요. 진정 실사용을 위해 이 시계를 구매할 예정이라면, 한 가을쯤에 리셀러들의 쓰나미가 지나가고 재고가 여유로워질 때 구매하는 것을 추천드려요. 저도 그때쯤에나 한번 노려볼까 싶네요.
문스와치가 나올 때도 그랬고,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가 나왔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 역시 오데마 피게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협업에 동의했냐는 의문이 소셜 미디어에 많이 보입니다. 그나마 오메가나 블랑팡은 스와치 그룹 소속이라서 소위 “까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깠다”라는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지만(딱히 그런 거 같진 않지만요), 같은 그룹도 아닌 오데마 피게는 원하지 않았다면 동참할 필요도 없었겠죠.

제 생각엔 오데마 피게 자체가 특히 젊은 층에는 가격도 가격이지만, 공급도 제한적이라 접근이 매우 어려운 브랜드가 되었고, 스와치의 이러한 협업 모델들이 젊은 층에 브랜드를 알릴 기회이니만큼 참여한 것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물론 여전히 로얄 오크의 이미지에 먹칠을 할 거라는둥, 로얄 팝은 로얄 오크가 아니라는둥 격앙된 의견도 많이 있겠지만, 전 문스와치나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 때와 비슷하게 이런 협업은 시계 산업의 아이콘들을 젊은 층에게 소개시켜줄 수 있다는 지점에서 재미있고, 특히 이번에는 조금 덜 대중적일 수는 있어도 틀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도전을 하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 봅니다. 솔직히 로얄 오크의 이미지는 오데마 피게만 걱정하면 되는 것이고, 우리는 이왕 나온 거 즐기면 안 될까요?
로얄 팝은 지난 16일부터 판매를 시작했으며, 가격은 르핀 스타일이 57만 원, 사보네 스타일이 60만 5,000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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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테크에 대한 기사만 10년 넘게 쓴 글쟁이. 사실 그 외에도 관심있는 게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