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영화평론가 김철홍이다. <대홍수>를 봐버렸다. 나는 모든 영화를 다 체크하는 영화평론가는 아니다. 특히 오직 OTT를 통해 공개되는 영화들의 경우, 사람들의 반응을 본 뒤 볼지 말지를 결정하는 편이다.
<대홍수>가 공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영화에 대한 ‘대 조롱 파티’가 펼쳐지는 것을 봤다. 그것만 보고 소위 ‘전설의 망작’이라 놀림받는 <성>, <클>, <7>, <리>(작품 보호를 위해 제목의 첫 글자만 적었다) 같은 영화인 줄 알고 넘기려고 했다. 그러다 12월 22일, 허지웅 전 영화평론가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을 보고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 글을 못 본 사람들을 위해 짤막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대홍수>가 그렇게까지 매도되어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 관객들은 작품이 자신의 도파민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비판을 넘어 저주까지 한다.”
“그 저주는 (대체로) 그에 걸맞은 최소한의 논리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러니 창작자분들, 이에 굴하지 말고, 힘내시라.”
보다 정확한 뉘앙스를 파악하고 싶다면 전문을 읽으시기를 추천드린다. (아래 허지웅이 쓴 표현들을 인용한 부분은 “큰따옴표“로 표시했다.) 작가 허지웅 특유의 단호하고 날카로운 문체 때문인지 이 글은 글 자체가 품고 있는 메시지 그 이상으로 더 큰 반응을 이끌어냈다.
요약문을 보면 알겠지만 허지웅은 너무나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선 <대홍수>를 좋게 봤다고 말한 것도 아니며, 그러기에 당연히 왜 좋았는지에 대한 근거가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다. 다시 말해 그 글은 <대홍수> 리뷰가 아니다. 허지웅이 리뷰한 것은, 최소한의 논리를 갖추지 않은 채 작품과 창작자를 매도하는 사람들이다. 창작자들이 “고민한 시간의 천분의 일”도 쓰지 않고 “밥숟갈을 놓으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한 것이다.

허지웅의 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갈라진 양상이다. 첫째는 허지웅의 취지에 공감한다는 사람들이고, 둘째는 자신의 혹평을 허지웅이 혹평한 것에 대한 반발들이다. 반발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이유 있는 혹평’이 ‘무논리’로 치부당한 것이 불편하다는 의견이다.

우선 콘텐츠가 사방에서 홍수처럼 밀려들어오는 시대에, 이렇게 많은 주목을 받게 된 것 자체는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관심이 가장 큰 재화이자 자원인 요즘 세상에, 영화 한 작품으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형성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당장 나처럼 이 이슈 때문에라도 작품을 찾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니까. 그런데 <대홍수>의 경우처럼 비난이 홍수처럼 몰아치는 경우는 문제가 복잡해진다. 악플이 무플보다 나은 것은 맞지만, 악플 홍수에 콘텐츠 자체가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금의 상태를 과연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창작자들만이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그게 관객인 우리에게도 좋은 일일까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비자 입장에선 복잡하지 않을 수 있다. 허지웅이 본문에서 ‘배달 플랫폼’ 비유를 한 것은 꽤 정확하다. 음식을 시켰는데 그 음식이 내 기준에 팔면 안 되는 음식이면 화가 난다. 그 식당이 “장사를 접는 것”을 바란다. 영화도 똑같다. 영화가 극장이든 넷플릭스에든 걸리면 안 되는 퀄리티를 갖고 있는데, 내 돈과 시간을 낭비하게 하면 화가 난다.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씩 ‘영화계’를 떠나면, 앞으로 나올 영화들의 퀄리티가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건 설의법처럼 답을 정해놓고 물어보는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그에 관해선 나도 정말 답을 모른다. 답을 모르지만, 아니 모르기에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어디까지가 정당한 비판이고, 어디까지가 과도한 비판인가. 소비자의 정당한 비판은 창작자의 어디까지를 제한할 수 있는 것일까. 쉽게 말해, 관객은 무슨 욕까지 가능할까! 허지웅이 쓴 글은 모두를 설득시킬 수 있는 완벽한 글은 아니었지만, 이런 질문들을 낳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욕을 ‘잘’ 하기 위해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 필요하다. 싫은 것에 욕하는 것은 물론 자유이지만, 싫다고 무턱대고 욕하는 것 또한 우리 사회에서 무작정 용납되는 행위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영화는 좋고 나쁨의 기준을 무 자르듯 정확히 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예술이다. 그래서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영화를 이야기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그런 의미에서 디에디트가 영화제까지 만든 건 정말 멋진 일이다), 그러므로 길든 짧든 시간을 들여 마련한 근거와 함께 영화의 나쁨을 얘기하는 사람은 허지웅의 비판 대상이 아닌 것이다. 허지웅은 오히려 자신의 영화에 대한 생각을 흔들리게 해줄 누군가가 나타나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래서 영화를 좋아하고, 그래서 사람들과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왜 돈이 아까웠고, 왜 시간이 아까웠는지 알고 싶다. 그래서 <대홍수>를 봐버린 것이다.
<대홍수>는, 다시 반복하자면, 좋고 나쁨의 기준을 무 자르듯 정확히 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작품이다. 우선 표면적으로만 말하자면, 장르가 복합적이다. 대홍수 속에서 살아남는 재난 영화인 줄 알고 본 관객들이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의 장르적 반전이 일어난다. 장르 전환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을 말하기 어렵다. 어려운 것은 창작자 입장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 장르를 하나의 틀에 섞는 것은 높은 수준의 극작 능력을 필요로 한다.
난이도가 어렵다는 전제가 뒷받침됐을 때 우리는 ‘시도는 인정한다’거나, ‘나이스 트라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또 곧이어 ‘어디까지가 인정할 만한 시도냐’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가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밝을 때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다른 직업을 알아보는 게 낫겠군”이라는 결론을 겨우 내릴 수도 있지만, 끝까지 판단을 유보한 채 “영화를 한 번 더 봐야겠다”며 다음 대화를 기약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영화에 대한 결론은 이런 지난한 시간을 통과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상징적이게도 <대홍수>에는 방금 말한 ‘지난한 시간’ 같은 장면이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 안나는 스스로 새인류 모델의 실험체가 되어, ‘어머니’가 가진 대표적인 감정을 엔진에 학습시킨다. 말은 어렵지만 영화를 보면 금방 이해하게 된다. 챗지피티에게 인간의 감정이 무엇인지 학습시키는 것인데, 그때 예시로 드는 상황이 모성애인 것이다. 차이점은 그걸 텍스트가 아니라, 롤플레잉을 통해 학습시킨다는 것. 그래서 <대홍수>는 난도 높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듯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안나는 수만 번의 반복 학습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아이를 구출해 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그 과정에서의 적지 않은 비약과 작위적인 깨달음 등이 영화의 아쉬운 점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건 영화가 게임만큼의 플레이타임을 보유하지 못하여 생긴 구조적인 문제다. 나에겐 영화적 허용으로 받아들여지는 정도였다. 대신 핵심은 안나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고, 그것이 안나의 티셔츠에 그려진 숫자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 또한 더 세련된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에도 동의하지만, 흔히 말하는 ‘일만 시간의 법칙’ 같은 것이 구체적인 숫자로 표현된다는 게 인상적이기도 했다. 티셔츠에 최종적으로 적힌 숫자와 비로소 인간 감정을 깨우친 진화를 한 안나의 모습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는 이 영화가 우리들의 이야기 같았다. 알 수 없는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가는 지구인들의 모습 같았다. 나는 <대홍수>를 보고 공들여 자신의 목소리를 낸 모두가 반갑다. 긴 시간 끝에 우리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결론이 나지 않았더라도 ‘나이스 트라이’라고 말하며 웃을 수 있을지 너무 궁금하다. 끝으로 <대홍수>에서 가장 좋았던 대사. “한 번 보고 싶네요. 안나 씨 마지막에 어쩌는지. 나 그거 보려고 여기 온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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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홍
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에서 최우수상 수상. 영화 글과 평론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