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IT 관련 글을 쓰는 이주형입니다. 며칠 전 독일 베를린의 한 호텔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이 호텔은 옛날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전보망의 중심에 있던 전보국이 함께 있던 우체국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과거의 모습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호텔 여기저기에 전보국에서 썼던 기계들과 함께, 한편에는 여기서 전보로 보낸 러브레터가 전시되어 있었죠.
한때 모두의 삶에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하던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기술의 발전으로 그 중요도가 없어지고,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 건물과 여기서 행사를 연 인텔을 번갈아 보면 묘한 기분이 듭니다. 인텔은 1980년대 IBM PC의 필수 요소인 8086 프로세서로 개인용 컴퓨터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필수적인 존재이자, PC용 CPU 시장을 독점했던 기업이었습니다. 자체적인 파운드리(프로세서 생산지)를 보유한 인텔은 이를 이용해 경쟁에 우위를 점했고, 애플의 맥에도 프로세서를 공급하는 등 승승장구했었죠.
하지만 시장 상황은 계속해서 변화해왔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AI 시대가 도래하며 다양한 AI 기능들을 기기상에도 돌릴 수 있는가가 대두되기 시작했고, 거기에 퀄컴도 ARM 기반의 새로운 노트북 프로세서인 스냅드래곤 X 시리즈를 선보이며 PC 프로세서 시장에서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어수선한 환경 속에서, 인텔이 새로운 반격을 준비합니다. 인텔 코어 울트라 프로세서 제품군의 2세대, ‘시리즈 2′(코드명 ‘루나 레이크’)가 그 주인공입니다. 인텔이 코어 울트라 시리즈 2를 선보이면서 강조한 것은 바로 ‘x86은 건재하다’라는 점입니다. 애플의 M시리즈와 퀄컴의 스냅드래곤 X가 PC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가운데, 인텔은 이에 따르지 않고 x86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겠다는 것이죠.
루나 레이크는 인텔에서 ‘씬 앤 라이트(Thin and Light)’라 부르는 컨슈머용 노트북에 쓰이는 프로세서 라인입니다. 기존에는 CPU 따로, 칩셋에 내장 GPU 따로, 그리고 메모리는 슬롯형으로 따로 붙어 있었던 형태라면, 루나 레이크는 한 칩 위에 CPU와 GPU, 그리고 메모리까지 모두 올린 ‘SoC(System-on-Chip, 칩 하나에 시스템 전체를 올림)’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역시 SoC로 분류되는 애플의 M 시리즈와 비슷한 구조라고 보시면 됩니다.
특히 인텔이 이번 발표에서 강조한 것은 기존 앱과의 호환성입니다. 퀄컴의 스냅드래곤 X가 출시 초기부터 기존 윈도우 앱들과의 호환성 이슈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가운데, 기존 x86 기반의 루나 레이크는 이러한 이슈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 인텔에서는 발표 행사에서 퀄컴의 스냅드래곤 X 엘리트 탑재 제품과의 성능 비교에서 많은 앱들을 아예 구동도 못 했다는 점을 ‘DNR(Did not run, 구동불가)’이라는 표현을 쓰면서까지 유머스럽게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스냅드래곤 X 엘리트가 구동할 수 있었던 앱에서도 에뮬레이션의 성능 페널티로 인해 루나 레이크가 한참 우위를 점했고요.
ARM과 비교해 x86의 단점이라 지적되는 전력소모에도 신경을 썼다고 인텔은 밝히고 있습니다. 루나 레이크의 CPU 타일은 모든 모델이 총 4개의 성능 코어와 4개의 효율 코어 구성으로 전작인 시리즈 1(코드명 메테오 레이크)보다 전반적으로 간소화된 구조이지만, 코어 성능의 발전과 더욱 세분화된 코어 관리 기능으로 성능 개선과 전력 소모 감소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고 해요. 특히 사무 관련 작업 시나리오의 벤치마크에서 퀄컴 스냅드래곤 X 엘리트가 탑재된 비슷한 조건의 제품과의 비교에서 더 오랜 배터리 사용 시간을 보일 정도라고 합니다. 인텔은 이날 행사에서 “x86 역사상 가장 전성비가 높은 프로세서”라고 말하기도 했죠.
루나 레이크에 들어가는 새로운 내장 GPU 역시 게이밍 성능을 극대화했다고 합니다. 특히 인텔이 보여준 데모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출시 초기부터 돌리기 어렵다는 것으로 유명(?)해진 <사이버펑크 2077>을 1080p 해상도에 중간 옵션으로 초당 60 프레임으로 안정적으로 구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게임용 노트북도 아닌, 저전력 프로세서를 탑재한 씬 앤 라이트 노트북이 말이죠. 여기에 AI를 활용해 게임 성능에 영향을 주지 않고 해상도를 업스케일링하는 XeSS와 레이 트레이싱 또한 지원합니다.
인텔이 강조하는 또 다른 분야는 바로 AI입니다. 윈도우의 코파일럿 기능이나 어도비 라이트룸의 AI 기반 디노이즈(노이즈 감쇠) 기능 등 실생활에서 다양한 AI 기능들이 서버를 거치지 않고 PC에서 직접 구동되는데요. 루나 레이크는 신경망 연산을 담당하는 전용 유닛인 NPU만으로 최대 1초당 48조 회(48 TOPS)의 AI 계산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애플 M3의 성능은 물론, 퀄컴 스냅드래곤 X에 들어간 NPU의 성능도 뛰어넘습니다. 여기에 CPU와 GPU의 AI 연산 성능까지 합하면 최대 120 TOPS의 AI 연산 성능을 자랑합니다. 이러한 AI 성능을 바탕으로 라이트룸의 AI 디노이즈 성능은 전 세대인 메테오 레이크 대비 79-94%, AI 비디오 편집 소프트웨어인 토파즈 비디오 AI의 AI 업스케일링 작업은 최대 1,843% 증가했다고 하네요.
인텔은 이날 발표에서 300여 곳의 써드파티 개발사들이 인텔 코어 울트라의 AI 성능에 최적화된 AI 기능들을 써드파티 앱에 녹여낸 것을 강조했습니다. 모두가 생각하는 만큼 인텔이 AI에 있어서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는 느낌이었죠. 실제로 인텔의 루나 레이크 광고 포인트도 ‘AI PC’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루나 레이크 노트북들 모두 마이크로소프트의 AI PC 표준인 코파일럿 플러스 PC 기준을 충족하며, 11월에 코파일럿 일부 기능들이 루나 레이크 제품들에도 돌아갈 수 있도록 업데이트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이와 동시에 다양한 PC 제조사들에서도 루나 레이크를 활용한 신제품을 출시합니다. 삼성과 LG 또한 각각 갤럭시 북 5 프로 360과 그램 신제품을 선보였고, (두 제품 모두 한국에는 연내 출시 예정입니다) 그 외 에이수스와 에이서, MSI 등의 제조사들이 신제품을 선보였습니다. 각각의 제조사들 모두 자체 개발 AI 소프트웨어들로 인텔의 AI PC 내러티브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에이서가 이 부분에서 열심히였는데요, 자리를 비우는 것을 카메라로 감지해 자동으로 노트북을 잠그고, 자리에 돌아오면 자동으로 잠금을 해제하는 기능이나, 화상 회의 시 자동으로 회의에 참여한 사람의 뒤를 블러 처리하거나 AI를 활용해 주변 소리를 제거해버리는 기능 등을 선보였죠.
개인적으로 관심이 갔던 제품들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에이수스의 젠북 S는 알루미늄을 바탕으로 세라믹 재질을 만드는 것과 동일한 공정을 활용한 새로운 ‘세랄루미늄’ 재질을 적용했습니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표면을 실제로 만져보면 나무의 기둥 표면을 만지는 것 같은 독특한 느낌이었죠. 이번에 같이 출시한 루나 레이크 노트북 중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MSI의 클로 8 AI+입니다. 이 제품은 루나 레이크 프로세서를 장착한 게임에 최적화된 UMPC입니다. 스팀 덱의 많은 경쟁 제품 중 하나라고 보면 되는데, 대부분이 AMD의 프로세서를 채용하는 이런 류의 제품 중 흔하지 않게 인텔의 프로세서를 사용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론 휴대용 기기을 감안하면 ARM 기반 프로세서를 쓰는 게 이론적으로는 최적이었겠지만, 호환되는 게임이 없으니 결국 x86 아키텍처를 사용하는 것인데, 루나 레이크의 전성비와 게임 성능을 십분 활용하는 기기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내년 봄에나 출시한다는 점이겠네요.
인텔은 이번 루나 레이크를 개발하면서 기존에 고수했던 많은 전략을 바꿨습니다. 특히, 루나 레이크의 컴퓨트 타일(CPU, GPU 코어 등 중앙 연산을 담당하는 부분)은 자체 파운드리만 고수하지 않고 설계하는 제품의 방향에 최적인 파운드리를 선택한다는 IDM 2.0 전략에 따라 애플이 자사 프로세서의 생산을 맡기고 있는 TSMC의 3 나노미터 공정으로 제조됐습니다. 인텔 역사상 최초라고도 할 수 있죠. 발표 행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조시 뉴먼 인텔 클라이언트 컴퓨팅 그룹 제품 마케팅 및 관리 총괄은 “삼성 파운드리를 포함해 차기 프로세서 생산을 위해 다양한 곳을 엄두에 두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심화되는 프로세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체 파운드리를 사용하지 않을 정도의 초강수를 계속 둘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루나 레이크는 인텔의 반전 카드가 될 수 있을까요? 일단 인텔이 루나 레이크를 발표하면서 공개한 자료가 사실이라고 가정할 때, 결과적으로 나온 루나 레이크는 인텔이 사활을 걸고 만든 제품이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평가는 실제 제품을 써봐야 알 수 있겠죠. 그리고 시장의 평가도 받아야 할 것이고요. 그런 뒤에야 우리는 인텔이 과거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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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백수가 되었지만, 백수가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에디터이자 팟캐스터. IT가 메인이지만 관심가는 게 너무 많아서 탈이 나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