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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먹는 게 두려우면 새로운 걸 못해요, 배해선 인터뷰

"나에게 당혹스러움을 선물하고 싶어요"
"나에게 당혹스러움을 선물하고 싶어요"

2024. 02. 19

천사와 악마가 한 남자의 선택을 놓고 내기를 한다. 남자의 이름은 존 파우스트. 결국에는 선한 선택을 할 것이라 믿는 천사와 인간을 유혹 앞에 쉽게 타락할 거라고 믿는 악마의 대결이 2시간 동안 이어진다. 이것은 뮤지컬 <더데빌: 파우스트>(이하 ‘더데빌’)의 내용이다.

<더데빌>은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실험적이고 난해하며 불친절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작품은 어느덧 10년째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10주년 기념 공연으로 열린 <더데빌>을 6년만에 재관람했다. 이유는 단 하나, 배우 배해선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X블랙’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 X블랙을 여성 배우가 맡은 경우는 배우 차지연 이후 처음. 뮤지컬, 연극, 드라마, 영화를 종횡무진하며 내공 깊은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가 연기하는 X블랙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뮤지컬 더데빌 배해선 인터뷰

디에디트의 두 번째 인터뷰이는 배우 배해선이다. 배해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궁금하다. <아이다>로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이후로도 여우주연상에만 세 번 노미네이트될 정도로 인정을 받았지만, 뮤지컬에 관심이 없다면 얼굴을 봐야 비로소 ‘아, 이 배우 알아’ 할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 <용팔이>의 사이코패스 간호사 역으로 인상적인 드라마 데뷔를 했고, <해피니스>의 사기꾼 동대표,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4선 야당 의원, <호텔 델루나>의 객실장 등 스펙트럼 넓게 캐릭터를 소화하고 있다. 나는 이번 인터뷰에서 <더데빌>과 함께 지금껏 출연했던 작품에 대한 해석을 깊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보다는 궁금한 건 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배해선 그리고 그녀의 감정이었다. 오직 연기 생각밖에 안 하는 듯한 그녀에게 도대체 쉴 때는 무엇을 하는지부터 물어봤다.

매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생활 패턴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요.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공기를 느끼고 해가 지는 거나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관찰하려고 해요. 평소에 느껴보지 못했던 시간대와 공간이 주는 특별함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걸 저에게 선물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그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나뿐만이 아니라 저 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게 자기 시간 안에서 행복과 고통이 있는 시간을 보냈겠구나.’ 그런 걸 보며 새롭게 자극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거죠. 말씀드렸듯이 저는 그게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고 제가 좋아하는 취미이기도 해요.

그럼요. 물론이죠. 필사적이어야 해요. 그리고 취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저는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요. 자기가 못하는 걸 취미로 해라. 아니, 꼭 못하는 걸 하라는 뜻은 아닌데 못해도 되는 것을 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실 그게 진짜 취미 아니에요? 우리는 취미에서조차 성적을 매기고 경쟁해야 하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성적표가 없는데 스스로 성적을 매기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제가 손재주가 없고 소질이 없어서 그림을 잘 못 그려요. 못해도 배워가는 과정이 재미있을 수 있는 건데,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면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죠.

제가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도 늘 그랬어요. “이걸 왜 하세요?”, “어떻게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된 거예요?” 이렇게 질문을 하거든요. 그럼 저는 이렇게 말해요. “그냥 제가 좀 더 하고 싶어서요.” 그럼 이렇게 또 물어보는 거죠. “근데 돈을 더 많이 주고, 관객도 많이 오고, 배해선 씨가 더 주목받는 큰 작품을 하는 게 좋지 않아요?” 맞는 말이죠. 근데 제가 그런 작품을 싫어해서 일부러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단지 이번에는 비중이 작고, 작은 작품이어도 해보고 싶은 게 그 역할이니까 하는 거예요. 그게 저의 기준인 거예요. 저는 작품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새로운 나를 만나게 해주고 싶고, 당혹스러움을 선물해 주고 싶거든요.

근데 욕먹어야죠. 어떻게 항상 잘하는 것만 해요? 욕을 안 먹으면 다행인데, 욕을 먹는 건 너무 당연한 것 같아요. 제가 맡는 캐릭터가 매번 다르긴 하지만 배해선이라는 사람이 살아온 삶이 똑같은 어떻게 매번 ‘완전히’ 다를 수 있겠어요. 조금이라도 다르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스케치는 비슷할 수 있고 본질까지 다를 순 없어요. 그럴 때 연기가 비슷하다고 욕할 수 있겠죠. 그래도 제가 좋으니까 하는 거죠. 욕먹을 각오가 없으면 어떤 것도 매번 새롭게 시작할 순 없어요.

그렇다기보다는 우연한 계기였어요. 꼭 이 작품을 해야겠다고 맘을 먹고 있었던 건 아니었고요.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연극 <파우스트>를 알고 있으니까 그거랑 좀 다르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제가 워낙 연극성이 강한 작품을 좋아하다 보니 재밌게 놀 수 있는 요소가 많겠다 싶었죠. 배우는 물체가 될 수도 있고, 공기가 될 수도 있잖아요. 남자와 여자가 구분되는 작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꼭 구분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더데빌>이 그렇구요. 차지연 배우가 참여했던 경우를 제외하면 <더데빌>의 X블랙은 남자 배우들이 계속했으니까 제가 연기하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요. 언제 또 내가 이런 작품을 해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부담 내려놓고 젊은 배우와 협업할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참여했어요.

솔직히 친절하지 않은 건 사실이에요. 반대로 생각하면 저는 이 작품이 10년 전에 올려졌다는 게 아주 흥미로웠어요. 앞서간 거잖아요. 뭐든지 앞서가는 사람은 외롭고 힘들고 지지받기 어려워요. 스토리 위주의 작품이 아닌 송스루(Sung-through: 대사 없이 노래로 진행되는 극)라고 말은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이야기가 있는 콘서트 같은 느낌이었어요.

아, 부산에 내려간 건 사투리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다른 배우들은 일찍 내려가서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저는 짧게 촬영을 하니까 서울에서 촬영 날짜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다른 분들과 달리 저는 서울에서 혼자 사투리를 연습해서 촬영에 맞춰 내려가면 이질감이 있을 것 같은 거예요. 또, 제가 맡은 역할이 부산에 사는 대구 여자였거든요.

대구 사투리랑 부산 사투리랑 다른 지역 사람들이 들으면 비슷한데, 그 지역에 사는 분들은 분명히 다르다고 얘기하니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죠. 근데 저는 뉘앙스나 억양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그 여자가 처한 상황에 들어가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부산에 내려갔던 거죠. 의상도 미리 받았어요. 촬영날 바로 받으면 느낌이 안 날 것 같아서 미리 받아서 평소에 입고 다니고, 잘 때도 입고 연습할 때도 입었어요. 저는 그렇게 더 잘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게 너무 재밌어요. 틈만 나면 그런 데 시간을 쓰니까 저한테 쓸 시간이 없는 거죠(웃음).

특별히 준비하기 위해 뭘 했다기보다는 마지막에 가서는 오히려 생각한 부분을 많이 뺐어요. 상상한 부분을 연기로 채워서 해봤는데 우리끼리 약속된 것을 하기에도 바빴고, 모든 게 유기적으로 물려 있어서 정신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하려고 했던 건 결국 덜어냈어요. 뭘 하지 않으려고 해야 오히려 관객에게 잘 전달되겠다 싶었죠. 스토리를 보더라도 X블랙이 인간에게 말을 걸고 혹하게 만들지만 실제로는 인간 스스로의 마음에서 나온 선택이지 X블랙이 주도한 건 아닐 수 있거든요. 그래서 연기를 통해서 채워 넣을 게 아니라 오히려 무색무취로 있는 것이 훨씬 강렬한 느낌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벌써 그렇게 됐어요? 만으로 하면 아직 30주년은 안 됐을 거예요. 근데 30주년이 저한테는 그렇게 큰 의미가 있지는 않아요.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아직도 너무 신인이거든요. 저는 연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연기를 알게 될 줄 알았어요. 연기는 이런 거야! 이렇게 해야 돼! 라고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세상에! 아닌 거예요. 아직 어렵다는 게 놀라워요. 저는 여전히 신인이고, 저를 못 알아보는 게 좋고, 도전할 수 있는 게 남아 있어서 즐거워요.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어서 지금도 하는 거예요. 연기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너무 힘든데… 그만큼 재밌어서 하고 있어요. 완성이 안 돼요. 완성이 안 되는 집을 계속 허물고 짓는 기분이에요. 허문다고 해도 그 집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의미로는 제 마음속 집을 계속 늘려 나가고 있어요.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견고한 집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의 과정이 초석이 되겠죠.

한동안은 없었고 최근에는 계속 찾고 있어요. 엄청 많이 찾아내고 싶어요. 제가 2G폰을 오래 쓰다가 최근에서야 바꿨는데, 그러면서 생각을 한 게 저는 여러 가지를 잘하는 듀얼코어로 태어났을 수도 있는데 너무 하나만 열심히 한 것 아닐까였어요. 연기만 따지면 저만큼 잘하는 사람 너무 많아요. 요즘 저는 연기 외에 나한테 어떤 재능이 있는지 내가 또 뭘 잘하는지, 어떤 걸 할 때 행복을 느끼는지 알고 싶어요. 저는 어찌 보면 지금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 있는 것 같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아요. 매일 몇 번이라도 배우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무엇 때문에 그만두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인 것 빼고는 이 일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네. 너무 힘들어요. 지금까지 오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가 봐요. 제가 너무 사랑하고 좋아하니까 연기를 하는 거지,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하거나, 언젠가는 뭔가 될 것 같은 꿈이 있어서 하는 건 아니에요. 버티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게 이것밖에 없고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그래서 우울하고 불행하고 힘들고 눕고 싶은 순간이 너무 많아요. 그러다 보니까 연기 아니라 딴 거 해도 너무 잘할 것 같아,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저에게 보상으로 주지 않으면 버티기가 힘들죠.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부족함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왜 갑자기 병이 나거나 삶을 포기하겠어요. 표현할 수 없는 고충과 말할 수 없는 치열함이 너무 큰 거예요.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저는 되게 행복한 게 맞긴 해요. 운도 좋았고. 하지만 제가 얼마나 치열하고 힘들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간을 걸어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죠. 그리고 알 필요도 없죠. 조금 서러운 건, 체력이 조금이라도 좋을 때, 어렸을 때 지금과 같은 시간을 맞이했다면 헤매는 시간을 줄였을 텐데 싶은 거죠. 연기만 하지 말고 다른 일도 해볼걸, 해외로 많이 나가볼걸 그런 생각을 하죠. 내가 너무 연기밖에 모르고 긴 시간을 투자했나 싶고. 그 시간을 후회한다는 건 아니에요. 저란 사람은 이게 맞으니까.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시행착오를 겪었겠죠.

음… (3초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칭찬해 주고 싶을 것 같아요. 너무 예쁘고 너무 착하고 괜찮고 가진 게 많다고. 앞으로 어떻게 될 거다 이런 얘기는 해줄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시행착오를 겪어봐야 알 수 있으니까. 상처받고 울어봐야 아는 게 있으니까. 인간적으로 너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고 싶어요. 배우를 해도 잘할 거고, 다른 일을 해도 잘할 거니까 배우도 하고 다른 것도 해보라고. 뭘 해도 다 성공할 거라고. 성공의 의미는 특별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그 일을 하면 성공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살아남은 게 성공이잖아요. 뭘 더 바래요. 만약에 내가 돈을 벌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참고 해요. 그래서 돈을 벌었잖아요? 그럼 성공이에요.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성공은 이루어지기 힘들어요. 더 중요한 건 우리가 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 않고, 버티고 있잖아요. 그게 성공이죠. 얼마나 대견해요.

네, 좋아요. 최근 10년 안에 받은 질문 중에 가장 아름답네요.

배우들의 이야기를 해줄게요. 젊은 배우들이 연기를 하다 보면 어머니와 아버지 또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연기해야 하는 순간이 와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때 그런 순간이 와요. 그러면 그 배우는 이제 불행해질까요? 어떤 면에서는 불행할 수 있어요. 김수미 선생님은 주름으로 아름다운 미모를 가리고 20대 때 일용엄니 역을 했잖아요. 저도 뮤지컬 할 때는 아름답고 멋진 역할 많이 했죠. 그런데 다른 역할도 많이 했어요. 그럴 때면 내가 마치 밀려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모멸감이 들 수도 있고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놓아야 한다는 거예요.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결국에는 와요. 지금 있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날들이 와요. 생각한 것보다 젊음의 시간은 더 빨리 가니까요.

요리가 됐든, 댄스 스포츠가 됐든, 줄넘기가 됐든 목표를 세우잖아요. 예를 들어서 처음에는 100개, 그다음에는 150개. 근데 꼭 150개로 늘려야 하는 거예요? 줄이거나 비슷하면 안 되는 거예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거예요. 했으면 된 건데 목표를 계속 상향 조정을 하면서 나를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모자란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행복하고 싶고, 행복하다고 말은 하는데 실제로는 즐겁지 않은 거예요. 자기에 대한 가치를, 눈높이를 하향 조정하면 자신은 생각보다 되게 괜찮은 사람일 수 있어요. 질문 하나 할게요. 나를 지키기 위한 중요한 단어 두 개만 대봐요.

꿈은 되게 추상적이에요.

건강 오케이. 하나 더 대봐요. 지금 너무 오래 생각하고 있어요. 생각하지 말았어야 해요. 그 단어가 마음속에 언제나 있어야 돼요.

가족은 나 다음이에요. 무엇이 되었든 두 단어의 균형이 중요해요. 오늘 고기를 많이 먹었으면 다음에는 채소를 좀 먹고, 오늘 술을 많이 마셨으면 다음에는 간에 부담을 주면 안 되니까 술을 안 마시고. (테이블에 있던 컵 두 개를 왼손과 오른손에 각각 들고 수평을 맞춘다) 이게 균형이 아니에요. 이건 에너지가 없는 상태예요. (두 컵을 엇갈리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이게 균형이에요. 맞추려고 노력하는 이 에너지가 균형이에요. 하나가 내려왔으니까 어떻게든 반대를 높여서 맞춰보려고 하는 동력, 그 동력이 뭔지, 끌어올리는 키워드가 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찾아야 해요. 신발 밑창이 닳으면 버리고 새 걸 사는 게 자연스럽잖아요. 근데 버리기 전에 밑창을 봐야죠. 안쪽을 닳았구나, 내가 걷는 자세가 이렇구나, 그래서 내가 허리가 아팠구나 이렇게 해야죠. 나를 들여다보고 진단할 시간을 주지 않으면 좋아지지 않을 거예요. 내가 어디에 있고, 내가 뭘 원하는지 알기 위한 시간을 주지 않고 밖에서만 찾으면 안 돼요.

예전에는 연기가 다였고,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다면 배우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야 명예롭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요즘 생각하는 건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에요. 150년 뒤에 누가 배우 배해선을 기억하겠어요.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는데. 그냥 지금 살아 있는 동안 맛있는 새로운 과자를 발견하면, 이게 왜 더 맛있는지 알고 느끼는 게 훨씬 행복한 거 아닐까 싶어요. 못해도 기쁜 일을 좀 더 찾아봤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거예요. 저는 배우를 하면서 완벽에 가깝게 스스로를 밀어붙였지만 지금 제 연기가 완벽해요? 아니에요. 너무 허점투성이고, 그 정도로 연기하는 사람 많고, 더 잘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니까 결국에는 내가 즐거운 일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에 대해서 그동안 무관심했던 것 같아요. 나에 대해서 내가 더 잘 알았어야 했는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못했던 거고, 다른 사람과 연결하려고 바빴어요.

그러게요. <맛있는 녀석들>을 보다가 생각하긴 했거든요. 근데 저는 한 가지를 못 고르겠는 거예요. 고르기 어렵지만 그냥 선택하는 거예요. 다른 것보다 더 맛있어 보여서는 아니고 무조건 선택을 해야 하니까. 앞으로는 바뀔 수도 있는 거고. 일단은 제가 배달의민족에서 가장 주문 많이 했던 걸 살펴봤어요. 꽁치김치찌개예요. 꽁치의 진함과 김치찌개의 시큼함과 힘들거나 우울하거나 유독 땡겨요. 근데 재밌는 게 저는 사람들한테 꽁치김치찌개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근데 배달의민족에서 가장 많이 시킨 게 꽁치김치찌개인 거예요.

네 그냥 마시고 싶을 때 마시는데, 뮤지컬 할 때는 술은 절대 마시면 안되니까 요즘은 금주 상태예요.

사케하고 맥주. 그리고 요즘에는 술 다운 술은 못 마시니까 하이볼에 엄청 빠져서, 맛있게 하는 곳에 찾아가서 테이크아웃해요. 큰 텀블러에다가 얼음 잔뜩 넣어서 진하게 세 개를 넣어 달라고 해요. 그걸 희석해서 먹어요.

음… 저는 요즘은 아니고 클래식한 가수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아델도 좋고,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 레이디 가가도 좋고 존 메이어도 좋아하고.

좋아하는데 많이 못 가죠.

각각 다른 좋음이 있었어요. 코타키나발루는 제일 아름다운 섬이었고, 발리도 놓았고, 파리도 좋았어요. 몽마르뜨언덕에 있는 샤크레쾨르 성당에 갔을 때를 잊을 수가 없는데, 어떤 바에 들어 갔어요. 할아버지가 제가 아는 노래를 연주하고 있길래 제가 흥얼거리니까 그 분이 같이 하재요. 그래서 노래를 불렀는데, 거기서 하루 종일 밥과 와인을 서비스로 주면서 놀았어요.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예술가들이 탄생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구나 싶었어요. 안 가본 곳 중에서는 페루, 스페인, 그리스 너무 가고 싶고, 이스탄불도 계획은 했는데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그런 것 이제는 없어요. 어차피 저를 기억하는 사람 별로 없을 거예요. 어떤 배우로 남고 싶다는 대답을 예전에 다른 인터뷰에서는 말한 적이 있어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그 사람 참 좋은 사람 같아, 그래서 연기도 참 좋았어’ 이런 얘기가 듣고 싶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배우로 기억 안 되면 어때요. 나는 어차피 좋은 사람인데. 나 되게 괜찮은 사람인데, 그걸로 뭘 남기지 못하면 어때, 나는 이미 괜찮은 사람이야.

그렇죠. 때때로 다르죠.

근데 불만이 있어요.

장어덮밥은 너무 비싼 것 같아요.

너무 좋아해서 자주 먹고 싶은데.

아니요. 그거 아니고 저는 그냥 장어를 되게 좋아해요. 장어덮밥 자주 먹고 싶고 어제 먹었는데 1인분이 너무 조금인 거예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추가해서 더 많이 시켰는데 비싼데도 제가 금방 다 먹어버리더라고요. 하나씩 세면서 먹었는데 먹다 보니까 너무 빨리 먹었어요(웃음).

엄청 친하게 지내야겠어요. 어디라고요?

비싸긴 하죠?

아, 그거 알아요.

나중에 같이 투어가서 글 쓰고 사진 찍고 그러면 좋겠는데요?

먹지만 말고 신랄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왜 맛있는지 고민하고 찾아내고. 저는 부산에 좋아하는 팥빙숫집이 있는데, 가끔씩 생각나요. 엄청난 레시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유, 얼음, 팥밖에 안 들어가는데 너무 맛있어요. 그 주변에 다른 가게는 바뀌었는데 거기는 그대로 있는 것도 고맙고. 그리고 부산에 가면 너무 좋은 게 미역국 종류가 다양해요. 생선 한 마리 통째로 들어간 미역국도 있고. 부산에 가서 꼭 먹어야 하는 게 멸치짜글이 도다리쑥국.

멸치는 회로 먹어야죠. 무침으로도 먹고. 멸치가 크거든요. 껍질 벗겨서 무침으로 해줘요. 저는 기장에 그런 거 먹으러 가고 간 김에 젓갈도 사고, 김도 사고 그래요. 기장 김 맛있거든요. 엄마 아빠가 좋아하셨어서 가면 잔뜩 사와요. 사람들이랑 나눠 먹으면 좋으니까. 지금은 너무 힘든 일들이 많으니까 그걸 못했네요. 그런데 나중에 기회 되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 갑시다.

<더데빌 : 파우스트>

출연 배해선, 임병근, 김찬호, 박규원, 김준영, 정동화, 조형균, 백인태, 김지온 등
기간 2023.12.05 – 2024.03.03
시간 평일 20:00 / 주말 및 공휴일 14:00, 18:00(월 공연 없음)
장소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
가격 R석 8만 8,000원 / S석 6만 6,000원 / A석 4만 4,000원

About Author
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