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추운 날에도 한 번 나가면 뽕 뽑겠다는 일념으로 먹고, 마시고, 산책하다 들어오는 객원 필자 김정현이다. 최근에는 광화문에 다녀왔다. 정확하게는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문로2가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내수동까지. 고급 주택과 대사관 건물이 들어선 골목의 한적함과 점심시간이면 인근 오피스텔 단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의 활기가 공존하는 동네를 열심히 휘젓고 다녔다.
그때 가본 장소 중 몇 곳을 묶어 소개한다. 경희궁을 필두로 30년 된 미술관부터 재즈 공연이 열리는 와인 바까지, 총 7개의 공간을 모았다. 휴일을 맞아 경희궁-광화문 일대를 돌아다니며 눈과 입 모두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싶은 이들이라면 아래 리스트를 주목해 보자.
[1]
핸드드립 커피
커피스트
커피스트는 광화문을 대표하는 로스터리 카페다. 2003년에 문을 열어 무려 20년째 영업 중이다. 세월을 품은 가게가 주는 차분한 분위기와 숙련된 바리스타의 여유로운 응대에 올 때마다 마음이 편해지는 곳. 투박한 나무 가구와 하나 같이 잘 관리된 화분들, 중간중간 시선을 빼앗는 촌스러운 패턴의 기물과 소품까지 오랜 시간 축적된 질서와 개성이 있다. 언제 들러도 한결같은 공간에는 자연히 단골이 생기는 법이다. 인근 주민과 직장인, 핸드드립 커피 마니아들의 걸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있다.
따뜻한 드립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싱글 오리진 원두를 고르려다가 20주년 기념 블렌드 원두 ‘나이테’를 발견했다. 20주년을 기념해 만든 원두라는 것부터 이미 멋진데 거기에 나이테라는 이름을 붙이다니… 응원과 경외의 마음을 담아 주문했고 한 모금 마시자마자 감탄이 터져 나왔다. 부드러운 산미와 과일 향이 퍼지다 끝에 가서 흑설탕이 연상되는 어두운 톤의 단맛으로 마무리되는, 여운이 짙은 커피였다. 30주년 블렌드를 마시게 되는 날도 머지 않아 오겠지?
커피스트
- 주소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39
- 영업시간 월-토 09:00-21:00 일 12:00-18:00
- 인스타그램 @coffeest_com
[2]
예술영화
에무시네마
영화관과 공연장, 스튜디오와 카페가 한데 모여 있는 복합문화공간 에무. 국내외 예술영화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극장 에무시네마는 건물 2, 3층에 위치한다. 1층에 자리한 북카페에서 티켓을 발권하고 상영관으로 올라가는 구조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기다릴 수 있으니, 괜히 조금 일찍 도착해서 여유를 부리고 싶어진다.
2층 상영관 옆으로는 자유롭게 열람 가능한 영화 서적과 편안한 소파를 마련했다. 덕분에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을 앞에 두고 영화가 선사한 여운을 느긋하게 곱씹어볼 수 있다. 1층 북카페와 연계해 ‘시네마앤카페’라는 이름의 이벤트도 진행하는데, 매주 개봉작 중 하나를 골라 작품에 어울리는 특별 음료를 할인 판매하는 식이다. 작은 규모 안에서도 영화 관람의 즐거움을 더 풍성하게 만들고자 한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에무시네마
- 주소 서울 종로구 경희궁1가길 7 복합문화공간에무 2층
- 인스타그램 @emuartspace
[3]
치킨버거
펀치스낵
에무시네마가 위치한 작은 언덕을 오르기 전, 빨간색의 굵은 글씨와 귀여운 햄버거 픽토그램에 눈길이 간다. 창문 위쪽에 둥근 모양으로 달린 어닝과 매장 안쪽에 보이는 소파가 미국의 작은 다이너를 연상시키는 가게. 펀치스낵은 닭다리살 치킨 패티를 여러 종류의 소스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캐주얼한 분위기의 치킨버거 전문점이다.
나는 6개의 메인 메뉴 중에서 별표가 3개나 달린 ‘레드 마요’를 주문했다. 매콤한 양념이 발린 치킨 패티에 크리미한 타르타르소스가 더해져 감칠맛이 폭발하는 버거다. 버거 번과 닭다리살, 소스 모두 무척 부드러워서 열심히 씹어 먹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세트 주문 시 감자수프 옵션이 있다는 게 이 집의 강력한 무기가 아닐까? 동일한 가격으로 감자튀김과 감자수프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물론 버거 세트에는 감자튀김이 국룰이라지만, 요즘처럼 몹시 추운 날에는 수프를 고르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레드 마요가 많이 맵지 않을까 걱정되는 분들이라면 나를 믿고 감자수프에 도전해 보자.
펀치스낵
- 주소 서울 종로구 경희궁1길 27 1층 펀치스낵
- 영업 시간 월-토 11:00-21:00 일 12:00-18:00
- 인스타그램 @punchsnack_
[4]
고궁
경희궁
경복궁이나 창덕궁, 덕수궁은 많이 가도 경희궁에 놀러 가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현재 남아 있는 궁의 규모가 다른 고궁에 비해 작아서일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고즈넉하고 차분한 풍경을 만끽하기 좋다는 이점도 있다. 별다른 목적 없이 궁 안을 거닐다 보면 새삼 이 현실이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조선 왕조의 주요 궁궐 중 하나였던 곳이 지금은 회사 고층 빌딩과 현대식 건물에 둘러싸여 이렇게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니. 매일 출근하는 회사 바로 옆에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국가 유적이 있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임금이 나랏일을 하던 그 공간을 걸으며 소소한 일상의 고민을 나누고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경희궁의 정전(正殿)인 ‘숭정전’을 보고 나왔다면, 숭정문 옆길로 빠져 산책로로 향해보자. 숭정전과 ‘자정전’을 옆에 두고 걷다 보면 농구대와 철봉, 벤치가 마련된 작은 공터로 이어진다. 점심시간을 맞아 나온 회사원들과 마실 나온 동네 주민, 위아래로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은 스포츠맨들 사이에서 가볍게 운동하기 좋은 코스다.
경희궁
- 주소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45 경희궁.시립미술관
- 영업시간 화-일 09:00-18:00 (월요일 휴무)
[5]
와인
Unfussy
아치형의 붉은 색 철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일순간에 공기가 바뀐다. 낮은 층고와 울퉁불퉁한 돌벽, 어둑하게 내려앉은 조명과 샌드 컬러의 나무 가구까지 비밀스러운 이국의 바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선물하는 언퍼시. 와인과 칵테일, 맥주, 커피 등을 판매하는 캐주얼한 카페 겸 바로 매주 금요일과 일요일에는 재즈 공연이 열린다.
가게 문 앞의 메뉴판을 보면 악보처럼 연출된 것부터 ‘느낌 온다’ 싶었는데, 매장을 채우는 음악이 예사롭지 않았다. 재즈, 소울, 보사노바 등을 아우르는 플레이리스트에 반해 머무는 내내 틈만 나면 ‘샤잠shazam’을 켜야 했다는 후문.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는 해피아워로 운영된다. 할인된 가격으로 음료와 주류, 디저트를 즐길 수 있어 부지런을 떨어 낮술을 즐겨 보는 것도 추천한다. 높은 산도와 깔끔한 후미가 좋은 화이트 와인 한 잔을 7,000원에 마시고 있자니 ‘참 가성비 좋은 사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Unfussy
- 주소 서울 종로구 경희궁2길 10 지하
- 영업시간 주중 11:00-24:00 주말 12:00-24:00
- 인스타그램 @unfussy_seoul
[6]
전시
성곡미술관
광화문 신문로 일대에 뭐가 있냐 묻는다면 나는 성곡미술관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여러 크고 작은 매장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30여 년간 이 자리를 지켜온 신문로의 터줏대감. 대규모의 합동 국제전부터 실력 있는 신진 작가의 개인전까지 양질의 동시대 미술 전시를 선보이는 미술관으로, 건물 뒤편으로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1,000평 규모의 조각정원을 품고 있다.
중앙 입구와 주차장을 기준으로 양쪽에 각각 전시관 1관과 2관이 자리한다. 방문 당시 1관에서는 요르단과 한국의 공동 협업전이, 2관에서는 이재훈 회화 작가와 박윤주 미디어 아티스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특히 이번 기회로 처음 알게 된 박윤주 작가의 《에피몽제로 Epimongzero》가 인상적이었다. 가상건축과 3D 모션 그래픽을 기반으로 구축한 세계관에 관람객을 참여시키는 방식이었는데, 전시를 보는 내내 신비롭고 몽롱한 분위기에 푹 빠져드는 경험을 했다. 관람 후에는 꼭 조각정원에서 느긋한 산책을 즐겨 보자.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전시의 여운을 느끼고, 국내외 예술가들의 조각 작품도 구경할 수 있는 도심 속 휴식 공간이다.
성곡미술관
- 주소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 성곡미술관
- 관람 시간 화-일 10:00-18:00 (월요일 휴무)
- 인스타그램 @sungkokartmuseum
[7]
초콜릿과 견과류
프레드매스
서울지방경찰청 부근 파크팰리스 상가에 꼭꼭 숨어 있는 작은 카페. 직접 로스팅한 커피, 그리고 견과류를 듬뿍 넣은 초콜릿 ‘프레드너츠’의 매력을 알아본 인근 주민과 직장인들이 주로 찾는 동네 가게다. 내가 방문한 당시에도 단골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4시간 뒤에나 집에 들어가는데도 굳이 여기서 커피를 사 오라는 아내의 명령(?)이 있었다며 너털웃음을 짓던 그. ‘아니,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식어도 좋다는 거야?’ 싶어 기대가 커졌다.
처음부터 블랙커피보다는 초콜릿이 궁금해 찾아왔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너티프레드’라는 이름의 메뉴를 주문했다. 수제 초콜릿 아이스크림과 헤이즐넛, 에스프레소로 만든 아이스 커피다. 두세 번 저어서 슥 들이켜면 아이스크림이 부드럽게 씹히며 넘어간다. 그 형태와 질감이 신기해 물어봤더니 유화제를 따로 넣지 않고 카카오버터로 만들어 그렇다고 한다. 초콜릿의 진한 단맛에 견과류의 고소함이 기분 좋게 섞여 단숨에 마셔버렸다. 오후의 당 보충과 카페인 보충이 필요한 직장인들에게는 거부하기 어려운 음료다.
프레드매스
- 주소 서울 종로구 사직로8길 20 파크팰리스 102동 3,4라인 1층 프레드매스
- 영업 시간 월-금 10:00-19:00 토 12:00-18:00
- 인스타그램 @fredmass_roasters
About Author
김정현
라이프스타일 잡지부터 토크 프로그램까지, 분야 안 가리는 프리랜스 콘텐츠 에디터. 멋있는 사람과 흥미로운 콘텐츠를 소개할 때 제일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