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오랜 소주 친구 J가 있다. 그녀와의 인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3년 내내 같은 반이었음에도 우리의 우정은 어딘가 미적지근했다. 처음 함께 소주잔을 부딪치던 그 날까지는 말이다.
J와 나는 10년 우정이 무색할 만큼 별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소주 취향과 주량만큼은 기가 막히게 비슷하다. 둘이 마주 앉아 처음처럼을 각 두 병씩 마시면 기분 좋게 취한다. 이보다 더 마시면 지옥을 경험하게 되고, 이보다 덜 마시면 찝찝하게 헤어지게 된다. 그래서 대체로 지옥을 택한다. 오늘 만날까. 야근 안함? 7시? 천호? 오키.
약속을 잡을 땐 밀당없이 용건만 간단히. 늘 같은 장소에서, 같은 안주로, 같은 소주를 마셔줄 친구가 있다는 건 특별한 일이다.
이 웹툰을 발견했을 때, 우리 이야기냐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술꾼 도시 처녀들’. 간결한 그림체로 구성된 네 컷 만화다. 내용은 단순하다. 30대 중반의 세 친구가 매일 같이 모여 술을 마신다. 꽃게철이라 안주가 좋아서 마시고, 스트레스가 심해서 마시고, 비가 와서 마시고, 그냥 술이 좋아서 또 마신다.
한 편 한 편이 술을 마시기 위한 훌륭한 핑계다. 성격이 판이한 술꾼 도시 처녀들의 세 캐릭터는 술자리에서는 똑같이 귀여운 진상이다. 오늘은 1차만 가볍게 마시자고 다짐했건만, 정신을 차리면 3차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 가방엔 술집 메뉴판이 곱게 담겨있다. 다시 술을 마시면 내가 멍멍이다, 라고 외치고 다음날 “왈왈”거리며 다시 단골 술집에 모인다. 대한민국 음주인이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악순환의 반복이다. 네 컷에 담긴 뻔한(?) 음주 에피소드에 열광하게 되는 이유는 ‘격한 공감’의 영역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웹툰 속 캐릭터 ‘꾸미’가 술자리에서 각종 진상을 떨 때마다 데자뷰를 느낀다. 기억을 더듬어보자. 얼마 전엔 우리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근사한 와인바와 펍을 발견했다. J와 함께 도장깨기에 들어갔다.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2차로 갔던 동네 펍에는 다신 못 갈 것 같다. 술에 취해서 뭔가 창피한 짓을 한 것 같은 강력한 확신이 든다. 젠장!
술꾼의 밤은 화려하지만, 이튿날은 초라하다. 숙취에 알코올을 토해내면서도 출근길 지옥철에 몸을 맡기는 우리의 일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어떤 안주에 술을 마실지 고민하는 즐거움을 뿌리칠 수 없다. 궁합이 잘 맞는 짝을 찾았을 때의 행복. 굴튀김에 시원한 생맥주를 곁들일 때의 쾌감을 누가 대신해준단 말인가.
비겁한 변명을 보태볼까. 가끔은 사는 게 너무 뻔해서 비행을 저지르고 싶다. 하지만 우리에겐 좀처럼 삐뚤어질 틈이 없다. 내일 아침 시간을 월급에 저당 잡힌 인생이라면, 일탈은 사치스러운 얘기니까. 다음 날 후회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미련함.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일탈은 고작 이 정도다.
이 만화에는 작가가 가진 프로 술꾼으로서의 식견 또한 묻어난다. 매화 마지막에는 작가가 직접 추천하는 ‘오늘의 안주’와 한 장의 사진이 덧붙여진다. 안주의 스펙트럼이 어찌나 넓은지. 스크롤을 다 내렸을 때쯤엔 술이 당겨서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된다. 그래서 지금도 리뷰를 쓰다가 서랍장에 있던 블랑 캔맥주를 땄다(이게 왜 서랍장에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술꾼 도시 처녀들은 얼마 전 124화에 걸친 연재를 마치고 완결됐다. 술 친구를 잃은 것처럼 섭섭한 마음이다. 술 냄새 물씬 풍기는 즐거운 웹툰이었다. 혼술에 친구 삼으셔도 좋겠다. 일부는 유료화되었지만 차근차근 정주행해보시길. 건배!
TITLE : 술꾼도시처녀들
TYPE : 다음 웹툰
GENRE : 본격 음주 조장 일상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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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