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디에디툰] 딱 한 잔만 더

나에겐 오랜 소주 친구 J가 있다. 그녀와의 인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3년 내내 같은 반이었음에도 우리의 우정은 어딘가 미적지근했다. 처음...
나에겐 오랜 소주 친구 J가 있다. 그녀와의 인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3년…

2017. 05. 07

나에겐 오랜 소주 친구 J가 있다. 그녀와의 인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3년 내내 같은 반이었음에도 우리의 우정은 어딘가 미적지근했다. 처음 함께 소주잔을 부딪치던 그 날까지는 말이다.

J와 나는 10년 우정이 무색할 만큼 별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소주 취향과 주량만큼은 기가 막히게 비슷하다. 둘이 마주 앉아 처음처럼을 각 두 병씩 마시면 기분 좋게 취한다. 이보다 더 마시면 지옥을 경험하게 되고, 이보다 덜 마시면 찝찝하게 헤어지게 된다. 그래서 대체로 지옥을 택한다. 오늘 만날까. 야근 안함? 7시? 천호? 오키.

약속을 잡을 땐 밀당없이 용건만 간단히. 늘 같은 장소에서, 같은 안주로, 같은 소주를 마셔줄 친구가 있다는 건 특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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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웹툰을 발견했을 때, 우리 이야기냐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술꾼 도시 처녀들’. 간결한 그림체로 구성된 네 컷 만화다. 내용은 단순하다. 30대 중반의 세 친구가 매일 같이 모여 술을 마신다. 꽃게철이라 안주가 좋아서 마시고, 스트레스가 심해서 마시고, 비가 와서 마시고, 그냥 술이 좋아서 또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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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한 편이 술을 마시기 위한 훌륭한 핑계다. 성격이 판이한 술꾼 도시 처녀들의 세 캐릭터는 술자리에서는 똑같이 귀여운 진상이다. 오늘은 1차만 가볍게 마시자고 다짐했건만, 정신을 차리면 3차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 가방엔 술집 메뉴판이 곱게 담겨있다. 다시 술을 마시면 내가 멍멍이다, 라고 외치고 다음날 “왈왈”거리며 다시 단골 술집에 모인다. 대한민국 음주인이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악순환의 반복이다. 네 컷에 담긴 뻔한(?) 음주 에피소드에 열광하게 되는 이유는 ‘격한 공감’의 영역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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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마찬가지다. 웹툰 속 캐릭터 ‘꾸미’가 술자리에서 각종 진상을 떨 때마다 데자뷰를 느낀다. 기억을 더듬어보자. 얼마 전엔 우리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근사한 와인바와 펍을 발견했다. J와 함께 도장깨기에 들어갔다.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2차로 갔던 동네 펍에는 다신 못 갈 것 같다. 술에 취해서 뭔가 창피한 짓을 한 것 같은 강력한 확신이 든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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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의 밤은 화려하지만, 이튿날은 초라하다. 숙취에 알코올을 토해내면서도 출근길 지옥철에 몸을 맡기는 우리의 일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어떤 안주에 술을 마실지 고민하는 즐거움을 뿌리칠 수 없다. 궁합이 잘 맞는 짝을 찾았을 때의 행복. 굴튀김에 시원한 생맥주를 곁들일 때의 쾌감을 누가 대신해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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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변명을 보태볼까. 가끔은 사는 게 너무 뻔해서 비행을 저지르고 싶다. 하지만 우리에겐 좀처럼 삐뚤어질 틈이 없다. 내일 아침 시간을 월급에 저당 잡힌 인생이라면, 일탈은 사치스러운 얘기니까. 다음 날 후회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미련함.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일탈은 고작 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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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에는 작가가 가진 프로 술꾼으로서의 식견 또한 묻어난다. 매화 마지막에는 작가가 직접 추천하는 ‘오늘의 안주’와 한 장의 사진이 덧붙여진다. 안주의 스펙트럼이 어찌나 넓은지. 스크롤을 다 내렸을 때쯤엔 술이 당겨서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된다. 그래서 지금도 리뷰를 쓰다가 서랍장에 있던 블랑 캔맥주를 땄다(이게 왜 서랍장에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술꾼 도시 처녀들은 얼마 전 124화에 걸친 연재를 마치고 완결됐다. 술 친구를 잃은 것처럼 섭섭한 마음이다. 술 냄새 물씬 풍기는 즐거운 웹툰이었다. 혼술에 친구 삼으셔도 좋겠다. 일부는 유료화되었지만 차근차근 정주행해보시길. 건배!

TITLE : 술꾼도시처녀들
TYPE : 다음 웹툰
GENRE : 본격 음주 조장 일상툰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