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수영복은 챙겨오지 않았어요

왜냐고 물으신다면
왜냐고 물으신다면

2019. 10. 19

“얘 너는 영상 출연하는 애가 어쩜 그렇게 관리를 안 하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가볍게 핀잔을 준다. 그러게. 크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웅얼거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억울하다. 한 마디 톡 쏘아줄 것을. 나는 왜 바보처럼 헤헤 웃고 말았을까. 물론 친구가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다. 거울 속에 내 얼굴을 보고 나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서른이 넘어 하루가 멀다 하고 카메라 앞에 선다. 참으로 기묘한 인생이다. 내 친구들은 지금도 내가 영상을 찍는다는 걸 신기하고 어색해한다. 하지만 관리라고는 아침저녁 로션과 크림을 바르는 게 전부인걸. 잦은 야근과 늘어나는 스트레스는 내 얼굴에 깊은 팔자주름과 군살을 훈장처럼 남겼다.

“에디터M님 살이 통통하게 오르셨네요.” “외모에 물이 오르셨네요.” 내가 나오는 영상엔 좋은 의미 건 나쁜 의미건 외모에 대한 평가가 끊이질 않는다. 애써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나도 사람인데. 그런 댓글을 보면서 이불 속에서 울지는 않지만, 적립률이 낮은 포인트처럼 차곡차곡 내 마음속에 쌓이고 있었나봐.

굳이 남이 하는 말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시칠리아 도착한 다음 날. 우리 집 코앞에 있는 바다는 내 상상보다 더 가까웠고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결국 난 시칠리아에 오면서 수영복 한 벌 챙겨오지 않았다. 10월은 수영하기엔 좀 추울거라며 막판에 캐리어에서 수영복을 빼고 비행기에 탔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내 몸뚱아리가 수영복을 입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거다. 후회는 없었다. 해변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기 전까지는.

“혜민아, 우리도 수영복 가져올 걸 그랬나 봐. 봐봐, 여기 있는 사람들 아무도 우리 뱃살 같은 건 신경 안 쓰는 거 같지?” 그 말을 듣고 돌아본 해변엔 누구도 남의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는 눈치다.

이곳에서 우리는 철저한 이방인이다. 단순히 내가 살고 있는 몬델로 지역이 작은 시골이라서가 아니다. 어차피 뜨내기들이 들고 휴양지에서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할까. 조막막한 수영복을 입고 이미 까많게 태운 살을 더 까맣게 굽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위아래로 옷을 잔뜩 껴입고 어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건 나뿐 인 것 같았으니까.

이곳 사람들에겐 자유로움과 여유가 있다. 축 쳐진 뱃살, 허벅지의 셀룰라이트 따위 보이면 어때. 남의 눈치는 커녕 카메라를 들이대도 그 자리에서 V를 그리며 얼굴엔 미소를 띄운다. 몸이야 어떻든 바닷가에 왔으니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 그들은 흔한 커버업은 거추장스러운 것처럼 보이더라.

그들의 몸이 아름답지 않다거나 보기 좋지 않다는 소리 같은 걸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왜 그렇게 남들 눈을 신경 썼을까? 아닌 척했지만, 수영복 입을 몸이 아니라며 수영복을 챙기지 않은 나는 사실 누구보다 남들 눈치를 많이 보았던 걸까.

시칠리아의 낮은 덥고 밤은 서늘하다. 계절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더 추워지기 전에 바다에 한 번은 들어가야지. 그러려면 수영복을 사야겠어. 음, 아직은 비키니는 좀 그렇고 일단 원피스가 좋으려나?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나도 시칠리아 사람이니까. 누구도 쳐다보지 않고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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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