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피비 파일로가 돌아왔다

올드 셀린느 스타일을 만든 패션계의 전설
올드 셀린느 스타일을 만든 패션계의 전설

2023. 11. 09

안녕하세요, 오늘도 파리에서 인사드리는 HAE입니다. 요즘 패션 업계 사람들과 이야길 나누면 반드시 언급되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 존재 자체로 패션 이슈이자, 기사에 오르내릴 때마다 ‘특종’이 붙는 그 이름. 바로 피비 파일로(Phoebe Philo)입니다. 지난 10월 30일, 그녀가 자그마치 5년간의 공백을 깨고 자신의 이름을 딴 첫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피비 파일로 2023 A1 컬렉션]

아마 그녀의 팬이라면 이번에 공개된 새로운 A1 컬렉션을 보면서 ‘아, 역시 피비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우아한 카리스마, 그리고 다채로운 연출이 가능한 창의적인 아이템들은 올드 셀린느 시절 우리가 사랑한 디자인 그 자체였으니까요. 여기에 찢어진 듯 연출된 프린지 디테일은 날 것의 느낌으로 색다른 신선함을 더해줍니다.

“생산과 수요 사이의 책임감 있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량 제작되었다는 피비 파일로 표 뉴 컬렉션 아이템들은, 사이트 오픈과 동시에 무서운 속도의 품절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그녀의 화제성과 브랜드의 희소가치, 여기에 지속 가능성까지 동시에 잡은 영리한 전략이었죠.

이렇듯 그녀의 등장은 느슨했던(?) 패션 신에 팽팽한 긴장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 피비 파일로라는 여성이 누구이기에 모두가 이렇게나 열광하는 걸까요?

[T 매거진 2014 봄 여성호 표지 속 피비 파일로. 사진= Karim Sadli]

이번에 첫선을 보인 그녀의 브랜드는 LVMH의 전폭적인 투자와 지지 아래 론칭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루이뷔통과 디올, 셀린느 등 굵직한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는 LVMH가 그녀를 이렇게까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었던 까닭이 분명히 있었겠지요.

피비는 2008년부터 2018년까지, 약 10여 년 간 셀린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이 엄청난 유명세는 단순히 스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기 때문에 얻은 게 아닙니다. 패션계에 한 획을 그을만큼 아이코닉한 디자인을 대거 선보였기 때문이죠.

[셀린느의 카바스 백을 든 아말리 무스가드. 출처: @amaliemoosgaard]
[셀린느의 러기지 백을 든 켄달 제너(2014)]

아마 피비 파일로라는 이름은 몰라도 셀린느의 카바스 백, 러기지 백을 아는 사람은 많을 텐데요. 이러한 셀린느의 수많은 레전드 피스들을 처음 소개한 주인공이 바로 피비입니다. 이렇게 히트작을 연달아 낸 덕분에 당시 브랜드 매출을 무려 4배까지 끌어올렸다고 하죠. 당시 그녀의 추종자를 일컫는 ‘파일로 파일(Philo-phile)’ 혹은 ‘셀리니즘(Celinism)’과 같은 신조어가 탄생할 정도였으니, 가히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버버리 2023 겨울 컬렉션 캠페인. 포토그래퍼: Tyrone Lebon]
[보테가 베네타 2023 F/W 컬렉션 캠페인. 포토그래퍼: Malick Bodian, Louise & Maria Thornfeldt, and Sander Muylaert, 디렉터: Massimiliano Bomba]
[피터 도 2023 가을 컬렉션. 포토그래퍼: Duke Winn]

현재 패션 업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다니엘 리(버버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보테가 베네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Peter Do의 피터 도(헬무트 랭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ROKH의 황록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정답은 모두 피비 파일로 아래에서 일을 한 경력이 있다는 것! 이렇듯 피비가 패션계를 떠나있던 와중에도 그녀의 영향력과 존재감은 지대했습니다. 그만큼 패션 피플들이 그녀를 그리워했다는 증거겠지요? 오죽했으면 셀린느의 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디 슬리먼이 버젓이 있는데도, 피비 시절을 그리워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올드 셀린느(@oldceline)까지 생겨났겠어요. 심지어 이 올드 셀린느 계정은 자그마치 393K라는 엄청난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죠.

이쯤 되면 궁금해집니다. 대체 그녀의 디자인에는 어떤 특별함이 있기에 이렇게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지요. 사실 피비가 셀린느에서 선보인 디자인들은 우리가 펜데믹 기간 동안 SNS에서 익히 볼 수 있었던 하입(Hype)한 디자인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고급스러운 소재와 섬세한 테일러링이 돋보이는 클래식 아이템에, 디테일의 한끝 차이로 변주를 준 것이 피비 표 디자인의 특징이죠. 이러한 특징 덕분에 그녀가 디자인한 옷들은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손이 가고, 기존에 옷장 속에 가지고 있던 옷들과도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셀린느 2010 봄 컬렉션]
[셀린느 2017 S/S 컬렉션]
[셀린느 2018 S/S 컬렉션]

피비가 센트럴 세인트 마틴 패션 스쿨을 졸업했던 90년대 말은 질 샌더(Jill Sander), 헬무트 랭(Helmut Lang), 프라다(Prada) 등을 필두로 한 미니멀리즘 트렌드가 강세였던 시기였습니다. 때문에 그녀 역시 이러한 트렌드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요. 미니멀리즘의 주요 특징으로 정의되는 단순성, 실용성, 착용성은 여전히 그녀의 디자인 철학을 지탱하는 핵심 요소들입니다.

[끌로에 2004 가을 컬렉션 캠페인]

패션 스쿨을 졸업한 피비는 1997년 끌로에의 디자인 어시스턴트로 패션 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2001년, 같은 브랜드에서 처음으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직을 맡게 되죠. 과연 피비 파일로라는 이름의 전설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끌로에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로맨틱 무드를 가져가면서도, 소위 ‘여덕’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멋쁨’이 공존하는 디자인을 선보이며 브랜드에게 제2의 전성기를 가져다주었죠. 덕분에 끌로에는 기업 가치를 약 3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며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끌로에의 클래식 백 중 하나인 패딩턴 백도 그녀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랍니다.

[끌로에 패딩턴 백을 든 니키 힐튼(2012)]

피비가 성공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바로 동시대 여성들이 원하는 디자인을 선보였기 때문이죠. 그녀는 누군가의 판타지 속 여성이 아닌,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여성을 위한 디자인을 합니다. 직장에서는 물론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데이트 등 일상생활 속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실용적이며 편안한 디자인을 가진 동시에 남다른 취향과 감각도 함께 뽐낼 수 있는 옷들이죠.

[셀린느 2011 봄 캠페인. 포토그래퍼: Juergen Teller, 셀린느 2016 봄 캠페인. 포토그래퍼: Juergen Teller]

피비의 디자인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강인한 인상을 지닌 듯 보이다가도, 섬세하고 부드러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고, 이따금씩 웃음을 자아내는 위트 또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그녀는 고정되고 획일화된 여성상이 아닌, 다채롭게 변화하는 여성의 모습 그 자체를 조명하죠. 피비의 옷을 입으면 자신감이 생기고 당당해지는 기분이 든다는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도 그 때문일 겁니다. 옷을 통해 여성이 주체가 되는 경험을 함께 선사하는 것이죠.

[셀린느 2015 리조트 캠페인. 포토그래퍼: Juergen Teller]
[끌로에 2003 봄 컬렉션 런웨이 백 스테지에서의 피비 파일로]

끌로에를 통해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리던 중 피비는 가정에 집중하고 싶다며 거침없이 쉼을 선택했습니다. 셀린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와중에도 휴식을 위해 과감히 자리를 내어놓았죠. 모두의 선망을 받는 자리에서 두 번이나 스스로 물러났다는 사실 역시 파격적이지만, 일 년에도 몇 번이고 트렌드가 바뀌고, 또 새로운 브랜드가 태어나고 저무는 이 치열한 패션계에서 수년간의 휴식을 선택한다는 것은 대단히 드문 결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관성 있는 행보를 통해 그녀에게 흔히 ‘성공’의 척도로 여겨지는 돈과 명예는 첫 번째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죠. 그녀에게는 ‘인간 피비 파일로’로서의 ‘행복’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입니다.

[피비 파일로 2023 A1 컬렉션 캠페인]

결국 여성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그녀의 디자인에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가치가 아닐까요? 옷을 통해 전해지는 이러한 가치에 수많은 여성들이 공감했고, 또한 같은 여성으로서 피비의 행보에 지지를 보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한편 두 번째 컬렉션이 될 A2는 2024년 봄에 출시 예정입니다. 화려하게 돌아온 그녀의 새로운 활약에 기대감을 표하며 이번 기사를 마무리해 봅니다.

About Author
HAE

파리에서 패션을 공부하는 에디터. 내면에 락 스피릿을 간직한 미니멀리스트. 내세울 숟가락 색깔은 없어도 글 쓰는 펜수저 만큼은 대대로 물려받았다.